December 14, 2025

“충만한 기쁨” (Full of Joy)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복음 (John) 16:24
Service Type:

“충만한 기쁨”

(Full of Joy)

12-14-25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16:24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설교 요약]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요한복음 16장>의 주제는 “예수님 자신의 임박한 십자가 고난의 예고와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심”입니다.

주님은 이제 제자들이 머지않아 맞이하게 될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염려함을 아시기에 이렇게 <16장>말씀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요. 16:1)라고.

이처럼 주님은 제자들이 결코 염려하거나 실족해서는 안된다고 도전하십니다. 왜냐하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충만한 기쁨과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이 약속을 누릴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떻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그것은

첫째,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으로써 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라고 ‘누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인지’를 밝힙니다. 그는 바로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로 구원받아 주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약속한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출발점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써 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고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날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해 나가는 것이 참된 주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이러한 삶 가운데 성령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로 우리는 자유케 됩니다. 이 영의 자유가 기쁨의 원천인 것입니다.

셋째,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입니다: 성경말씀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도전합니다 (갈. 5:16). 왜냐하면 성령에 순종하며 추구해 나갈 때 육체의 욕심과 세상 유혹과 싸워 승리하고, 주께서 약속하신 충만한 기쁨과 만족과 함께 성령의 열매를 거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는 약속을 붙들고 간구함으로 믿음의 환난 가운데 충만한 기쁨과 승리를 넉넉히 누리는 성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한편에서는 매우 본질적인 질문이지만, 어떻게 본다면 ‘뜸금 없는 질문’이 될 수도 있는 질문 한가지를 여러분에게 하기 원합니다. 그것은 ‘성도 여러분은 왜 사십니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만큼 중요하면서도 주관적인 질문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이 질문에 대한 예상되는 수 없는 대답 중에서도 대표적인 답변 가운데서도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혹은 ‘기쁘고 즐겁고, 걱정없이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라는 답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챤과 ‘행복한 삶’ 곧 ‘기쁘고 즐겁고 걱정 근심이 없이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이 둘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무엇이 우리 인간의 <삶의 목적>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저는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과 같이 “인간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삶의 목적을 이루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쁨과 생명의 삶을 충만하게 베풀어 주십니다”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의 영, 성령을 통하여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과 만족과 감사가 풍성한 삶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충만한 기쁨’의 삶은 우리 크리스챤이 추구함으로 쟁취하는 삶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지으시고 또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가운데, 그 결과로 주어진 열매의 삶인 것입니다. 바로 주께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경험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심령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생수로 인해 충만한 기쁨과 감사의 삶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오늘 묵상하게 될 <요한복음 16장>은 그 ‘소주제’가 <예수님 자신의 임박한 십자가 고난의 예고와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좀더 풀어 설명하자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의 쓴 잔을 마시심으로 대속죽음을 담당하시게 될 것인데, 이런 주님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예언은, 곧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 또한 그 고난과 핍박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머지 않아 제자들에게 닥칠 혹독한 핍박과 연단의 시간으로 인해, 그들이 당황하거나 낙심하여 실족지 않도록 주님은 미리 말씀으로 그들을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요. 16:1)라고 주님은 16장을 시작하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사랑하는 제자들이 혹독한 고난과 핍박당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대가지불의 삶이지만, 그러나 이로 인해 그들이 낙심하거나 실족해서는 안됨을 주님은 격려하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제자들을 지켜 보호하여 주실뿐 아니라, 충만한 기쁨을 허락하여 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16장>에서 말씀으로 제자들을 격려하고 도전하시는 주제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이제 이 땅에 남겨질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소망의 약속을 하십니다. 그 약속은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우리의 ‘위로자 되시고 상담자 되시는 성령님’에 대한 약속을 이미 앞의 <14장>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고 말입니다. 이제 주님은 <요. 16장>에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실 때 그가 행하실 사역, 곧 ‘성령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십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먼저 “성령이 누구신지?”에 대해 잠시 나눠보겠습니다. 첫째,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바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하나님’의 세 위가 본질상 하나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데, 성령은 그 세번째 위격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자의 독특한 위격을 가지시지만, 동시에 이 세분은 함께 본질상 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단순한 하나님의 능력이나, 기운이 아닌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무엇이 성령의 사역, 곧 역할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령님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신’으로서 천지만물이 창조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창조사역을 행해신 주체이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거듭나는 <구속사역>’을 행하십니다. 이처럼 성령은 하나님의 택한 자녀의 마음 문을 열어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는 사역을 행하실 뿐 아니라, 또한 중요한 사역은 하나님의 자녀의 평생의 삶 가운데 함께 동행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을 닮아 갈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성도의 성화’라고 합니다. 바로 주님께서 오늘 본문 앞에서 밝혀 주시듯이,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며 (요. 16:8), 더 나아가서 날마다 진리와 생명의 은혜로 주님의 제자된 우리를 든든히 세우시고 보호하셔서 세상의 어떤 고난과 핍박과 유혹과 맞서 싸워 나가 마침내 주와 함께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략적인 ‘성령님의 정체성과 사역’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성령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주님은 이제 자신의 임박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통해 제자들이 닥칠 환난 가운데서도 도리어 누릴 충만한 기쁨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주의 약속의 의미를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과연 어떻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그것은

         첫째,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으로써 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의 첫걸음은 그 무엇보다도 ‘성령의 다스림’아래 놓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의 다스림 아래 놓인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성령께서 내 마음을 열어 주셔서 그분께 순종한다는 뜻이요, 이것은 곧 ‘성령께서 내 마음의 문을 여셔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잘 영적으로 잘 설명하는 말씀이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밤중에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5~7)라고. 한마디로 ‘사람이 거듭남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오직 물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잘 설명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그의 마음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지 않는 자는 구원받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 곧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처음부터 성령의 충만을 바라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령이 계심도 믿지 않고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충만을 향한 그 출발점은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각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누리는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오직 성령님만이 주시는 사역>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 참석한 여러분 중에 ‘아직까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인정하신다면, 지금도 문밖에 서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성령의 다스림을 누리는 은혜의 삶을 사시길 소망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써 입니다: 저는 신구약 모든 성경말씀 가운데서도 가장 사랑하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신 이 말씀을 꼽고 싶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깊은 영감과 가슴 벅찬 소망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만큼 ‘누가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지?’를 간명하고 본질적으로 밝히는 말씀도 드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주님의 참된 제자일까요?’ 먼저 주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의 <새번역>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이라고, 그리고 <우리말성경>에서는 “내 말대로 산다면”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제는 ‘헬라어 원어’에서 볼 때 ‘동사’ <메네테>는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써 ‘만약 너희가 계속해서 내 말 안에 머문다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으로 단순히 일회성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메네테>라는 헬라어 원어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묵상한 말씀을 깨닫아 나가며 깨닫은 말씀에 순종으로 나아가는 삶의 태도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주님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태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자는 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라고 주님은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주의 생명의 말씀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채워 나가고, 그 진리의 말씀이 나를 온전히 다스리고 이끄시도록 그 말씀에 순종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그는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주께서 약속하신 ‘주의 생명을 사랑하고 그 안에 거하는 자’ 곧 ‘주의 제자’가 누릴 엄청난 축복이 ‘시편 전체의 주제장’이라고 인정되는 <시편 1편>에서 시인이 ‘누가 복 있는 자인지?’를 노래한 이유라고 믿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1~2) 참된 축복을 누리는 자는 그 무엇보다도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신약의 말씀만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요,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영원한 말씀 (요. 1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곧 ‘여호와의 율법의 말씀’임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여셔서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말씀의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사역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 14:16~17)고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가 ‘성령충만’해 간다는 것은 단순히 ‘영적인 흥분상태’나 ‘세상만사를 낙관적으로 봄으로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심적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영’이시자 ‘순결하고 의로우신 영’이신 성령으로 인해 참된 하나님의 진리의 바다로 들어가게 되는 삶이 <참된 제자의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자신들을 소위 <성령파>라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물질을 탐하고, 거짓말을 서스럼 없이 행하고, 비인격적인 행태’를 일삼는 일부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성령께 인도함 받은 주의 제자의 모습도 아니고, 성령충만 함으로 얻어지는 성령의 열매는 더더욱 아님을 우리는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그 무엇보다도 온마음을 다해 주의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하고, 묵상하고 순종함으로 점점 더 생명의 진리를 깨닫아가는 참된 주의 제자로 성장해가고 있습니까?

셋째,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그들을 격려하였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라고. 왜냐하면, 성령의 소원과 육체의 소원이 서로 부딪치고 대적함으로 결국 권능의 성령께서 육신의 힘을 꺾고 죄악된 생각들을 물리치셔서 그의 선한 뜻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포함된 <16장>말씀에서 주님께서 <아이를 밴 여인>을 영적 비유로 말씀하심에 주목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요. 16:21)라고. 무슨 뜻일까요? 여자가 아이를 임신하여 이제 곧 출산이 가까워 올 때 크게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여인이 자녀를 잉태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그 가정에 있어서 축복된 일이지만, 의술이 발달한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이 낳는 출산의 순간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나 산모 모두 말입니다. 더욱이 예수님 당시의 고대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출산과정에서 더욱이 아기와 산모에게 있어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 올 때 산모는 그 해산의 고통과 더불어 자신이나 아이의 안전의 문제로 인해 근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를 안전하게 순산하게 되었을 때, 그 산모의 기쁨은 너무도 커서 그동안 출산의 고통과 이전에 가졌던 모든 근심은 다시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을 통한 충만한 기쁨>입니다. 지금 예수님 자신의 임박한 죽음과 또한 제자들이 당하게 될 핍박과 고난은 그 당시 제자들의 눈에는 청천벽력 같고,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벽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사랑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안정감과 평화와 승리의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보혜사되신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보호와 인도하심’ 그리고 ‘충만한 기쁨과 만족’의 채워 주심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v. 22)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이런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v. 24)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약속하신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기쁨을 구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각자 추구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원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런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고 할찌라도 말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참된 행복과 넘치는 기쁨을 풍성히 누려 나가는 삶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위해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역설’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고난 가운데 주시는 평화요, 믿음의 고통스러운 대가지불 가운데 주시는 충만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v. 33)라고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의 역설적인 약속은 ‘고난과 핍박을 피하게 해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환난 가운데 누리는 풍만한 생명의 은혜요, 주의 제자의 역설적인 삶은 ‘무사태평한 삶의 보장이 아니라, 믿음의 대가지불의 불 같은 연단 가운데 누리는 성령님이 부어주시는 풍성한 기쁨과 승리의 삶’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약속하신 성령의 은혜로 주와 함께 승리하며,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충만한 기쁨과 평화를 누려 나가는 축복된 성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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