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To Preach The Gospel Also To You)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To Preach The Gospel Also To You)
2-8-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11~12, 15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설교 요약]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은 ‘로마서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1~4절>을 통해 ‘왜 나사렛 예수는 복음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증명)되셨는지?’를 밝혔습니다.
이제 사도는 오늘 본문을 포함한 <5~15절>에서, 이 편지의 수신자인 <로마교회성도들>에게 구체적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 <성도들의 믿음을 칭찬>하고자 함이고 (v.8),
- <사랑의 교제 나누길> 원했으며 (v.10,12), 그리고
-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v.11)
이처럼 사도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 (spiritual gift)를 나눠 주기를 원했는데, 이 은사의 핵심은 ‘복음’이기에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v.15)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교회성도가 다시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사도는 생각했던 것일까요?’
첫째, “복음은 한번 듣는 것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로마교회성도들은 믿음의 칭찬을 받는 공동체였지만,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지 않을 때 첫사랑은 식어지고, 받은 은혜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계.3:15~20). 복음을 한번 듣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성도들이 ‘오늘’이라는 은혜 받을 시간(히.3:13)을 놓치지 않고, 복음 안에서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여전히 복음의 진리를 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중요한 로마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 누구도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온전히 깨닫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롬.11:33). 그러나 ‘하나님의 영, 성령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는 복음의 풍성한 지혜’ (고전.2장)를 깨닫을 수 있다고 사도는 도전합니다.
셋째, “복음 안에서만 모든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많지만,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롬.12:1)로 드리는 ‘성화의 삶’에는 관심이 없는 것은 복음의 가져오는 ‘구원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성도들이 이런 풍성한 복음의 은혜를 놓치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롬.5:3~4/빌.4:12~13).
‘오늘’이라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시간 가운데,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깊은 복음의 진리를 날마다 깨닫고, 자랑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부르심 받은 사도>로 소개했는데, 이런 그의 정체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인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자>임에 대한 확신임을 그동안 살펴보았습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1장>을 시작하는 <1~4절>에서 앞으로 펼쳐질 ‘복음의 전체내용’ 곧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며, 이 땅에서 그는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핵심적으로 밝히고 있음을 지난 4주간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 성도 여러분 중에는, <로마서>시작에서부터 너무 진도가 천천히 나간다고 불만인 분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로마서를 묵상하는 이유가 단지 한번 본 것에 만족한다든지, 진도 나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이 로마서전체를 요약한 <1~4절>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앞으로 펼쳐질 로마서 전 내용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올바른 기초가 된다고 저는 믿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사도가 <1장> ‘5절’을 시작하면서 ‘15절’에 이르는 말씀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내기를 원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v.15)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로마교회 성도들도 참된 복음을 듣고 깨닫기를 사도는 간절히 원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같은 질문을 우리 아포슬교회 공동체에게 하기 원합니다. “우리 ‘아포슬공동체’의 성도 여러분과 저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복음을 듣는 것이요, 듣고 깨닫는 것이 아닌가?” 바라기는 계속되는 로마서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 각자가 자원하는 심령과 갈급한 마음으로 복음의 말씀을 대하고, 주의 영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지켜 주시고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셔서 한사람도 빠짐없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복음을 자랑하고 기뻐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도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1장 ‘3~4절’에서 복음의 주인공 되신 ‘나사렛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이요, 오실 메시아인지?’를 이렇게 잘 영적으로 밝혔던 것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경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v.2~4)고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여기까지 <복음>을 잘 요약하고 나서, 사도 바울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로마교회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v. 5~6)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도 바울 자신뿐 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성도라 칭함 받은 그리스도인 모두는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기쁨과 확신 가운데 복음전파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이 편지를 받는 로마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있습니다’라고 사도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성도들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사도는 쓰고나서, 이제 보다 구체적인 편지를 쓰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로마교회 성도의 믿음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세상에 전파됨이로다” (v.8) 사도는 그동안 로마교회 성도들을 직접 가서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여러 동역자들이나 소문을 통해 로마교회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좋은 평가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세상에 널리 전파됨을 그 무엇보다도 기쁘게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랑의 교제 나누길 원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비록 실제로 로마교회 성도들을 단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만, 그가 개척한 교회성도들, 곧 자신의 가슴과 믿음으로 낳은 여러 이방교회 성도들과 동일하게 기도로 그들을 섬겨왔던 것입니다. 그점을 사도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담대히 고백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v.9)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뿐 아니라, 직접 그들을 마주 대하여 풍성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연결된 지제들의 자연스런 마음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그들과 만나 교제하고자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원하노라 ~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v. 10,12)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사도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은사를 나눠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v.11)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앞서 설명했듯이, 그들과 직접만나 깊은 사랑의 교제 나누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그 이유 가운데서 특별히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기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가지 이해할 것은 사도가 지금 말하는 “어떤 신령한 은사” (some spiritual gift)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은사>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로서 <성령에 의하여 부여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은사’ 곧 ‘카리스마’’는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이기에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자 은혜’이며, 그럼으로 영어로는 ‘gift’ 곧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정리해보자면, ‘신령한 은사’란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서로 안위함 (격려)을 얻기 위하여 그 필요를 따라 주께서 성령을 통해 나눠 주시는 영적인 선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로마교회 성도들을 방문하여 교제나누기 원하는 이유들인데, 안타깝게도 그 기회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 ‘그동안 여러분 그들에게 가고자 했지만, 길이 막혔다’ (v.13)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언제든지 주께서 허락하시면 꼭 로마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고, 언젠가 서바나 (=스페인)에 가는 길에 먼저 그곳을 들러 가고자 계획함을 이 편지를 마감하면서 <15장>에서 다시 밝히는 것입니다 (롬. 15:22~28).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러한 상황 곧 ‘지금까지 로마로 가는 길이 여러 번 막힌 상황’이 사도로 하여금 이런 ‘신령한 은사’ 나눠 줌을 지연시키지 않고 아름답게 성취되도록 <편지를 쓰게 된 이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가슴과 영에 충만한 열심과 열정을 통해 언젠가 그들을 만나기 전에 이 편지를 통해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령한 은사를 한마디로 한다면, 저는 ‘복음’ 곧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사도는 로마교회 성도들과 만나 하나님께 부여받은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고 싶었는데, 그는 먼저 이 편지를 통해 그 복음의 핵심을 적어 보내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지혜와 열심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으로, 그리고 성령의 충만하신 능력과 지혜로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결론적으로 사도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하는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v.15)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도 다른 교회성도들과 같이 복음 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교회성도가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사도는 생각했던 것일까요?’ 다시 말해, “왜 로마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을까요?” 저는 이점을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며 오늘 말씀을 정리해 나가고자 합니다.
첫째, “복음은 한번 듣는 것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왜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토록 복음 전하기를 원했을까?’를 생각할 때, 여러분들 중에서는 상당히 의야하게 여기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들은 이미 ‘그들의 믿음이 세상에 널리 전파될 정도’로 신실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로마교회 성도들은 굳이 새삼스럽게 ‘복음’을 또다시 들을 필요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왜 사도가 그렇게 신실한 성도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여러가지로 추측합니다. 그중 하나로 <예방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순수한 믿음의 열정으로 여러 교회에 칭찬을 듣지만, 머지않아 초대교회에 독버섯처럼 들어올 ‘거짓교사’의 헛된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고 믿음에서 떠나게 될 것을 사도는 알았기에 예방적 차원에서 진정한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순교 당하기 얼마전에 이렇게 ‘에베소’ 성도들에게 경계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행.20:29-30)라고.
그런가 하면, <전략적인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수도 <로마>는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천하를 주름잡던 로마제국의 심장인 수도 로마는 말 그대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그 로마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신실한 신자이자, 복음전도의 뛰어난 전략가인 사도 바울은 이 로마를 복음으로 점령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효과적으로 ‘세계 복음화’를 이룰 수 있는 지름길임을 확신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수도 로마를 중요한 <선교적 전략 지역>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그곳을 방문하기 전에 ‘복음의 액기스’와 같은 이 ‘로마서 편지’를 통해 먼저 성도들을 복음의 진리로 준비시키고, 나중에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로마를 복음으로 품기를 계획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추측도 나름 일리가 있지만, 우리가 로마서뿐 아니라 바울의 모든 서신서를 읽으며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는 언제나 ‘목회자’로서 말씀 전하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학자나 선교전략가의 입장이 아니라, 언제나 주께서 그에게 맡기신 양들을 돌보는 ‘목회자’의 심정으로 성도들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비록 로마교회 성도들의 현재의 믿음의 바람직한 본을 아낌없이 칭찬하고 자랑했지만, 또한 그들과 직접 교제하지는 않았다고 할찌라도 그들의 믿음의 연약과 영적 한계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14장>에서 ‘음식에 대한 서로를 판단하는 태도’라든가, <16장>에서 일부성도들이 ‘영지주의적 가르침을 따르는 모습’을 사도가 경계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누구할 것 없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을 때 누렸던 ‘구원의 감격’ 곧 <주님과의 첫사랑>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식어버린다는 것이요, 우리 성도 대부분은 영적 건망증으로 인해 어제 받은 말씀에 대한 은혜와 성령께서 주시는 새롭게 하시는 감격과 결단이 오늘도 지속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께서 주님과의 첫사랑이 식어져 버리고,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전전하는 ‘라오디게아’ 성도에게 주시는 도전의 말씀인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고 말입니다. 우리는 한번 받은 감격과 은혜가 영원히 갈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그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은 한번 듣고, 깨닫았다고 영구히 지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의 깨닫음과 주께서 주시는 은혜는 일주일씩, 한달씩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민족에게 매일 매일 아침마다 만나로, 저녁마다 메추라기로 부어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히브리서>기자는 우리를 향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의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 3:13)고 강하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니요, 오직 ‘오늘’이라고 일컬어지는 시간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교회 성도가, 아니 우리 모든 성도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여전히 복음의 진리를 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여전히 깨닫고 알아야 할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복음서 중의 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서편지>를 전하는 바울 조차도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모두 깨닫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깊고 높은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밝혀 나가는 가운데 이렇게 감탄하고 놀라움으로 고백하는 이유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롬. 11:33~35)고 말입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우리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창조자 하나님의 그 깊고 넓은 구원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깊은 마음은 오직 그분의 영, 성령님을 통해 허락하시는 만큼 우리는 깨닫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의 마음을 분별하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은 어떻게 누릴 수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관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주인공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임을 사도가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 잘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 2:2~7)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이 깊고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의 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깨닫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그 깊은 것까지도 모두 헤아려 아시고 우리에게 그 선한 뜻을 따라 깨닫게 허락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0) 이것이 왜 사도가 그토록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 (갈. 6:14)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세 전에 감추어 두셨던 구원의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고스란히 밝히시길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의 영 성령을 통하여 ‘복음의 비밀과 능력’을 드러내시고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복음의 무한히 값진 보화들’을 결코 로마교회 성도들이 놓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그토록 사도가 로마의 성도들이 복음을 다시 듣기를, 아니 더욱 더 깊고 온전하게 듣고 깨닫기 원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셋째, “복음 안에서만 모든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사도가 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지를 살펴보면서,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의 삶을 잠시 돌아보기 원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여전히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부족과 연약함이 있었을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15장>에 언급되어 있듯이, <1차전도여행>에서 중도에 포기하고 되돌아 간 ‘마가’를 다시 전도여행에 합류시키자는 바나바와 그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자 했던 바울이 이 일로 심하게 다투고 결국 서로 갈라져서 따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바울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 손 치더라도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처럼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완전한 삶은 결코 살수 없는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후회스럽고, 아쉬운 순간들이 한두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스스로 고백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사도가 되어 그가 걸어왔던 삶의 족적은 실로 주님의 제자로 살고자 소망하는 모든 성도의 귀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저는 인정하게 됩니다. <로마서7장>에서 사도는 <죄와 우리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과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써 그토록 율법준수를 생명처럼 알고 온 힘을 다해 행하고자 했지만, 행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19)고 말입니다. 그토록 율법준수를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고자 노력했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가 절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은 그 막강한 죄의 힘 앞에 전적으로 무기력한 존재요, 그 율법을 통해 자신이 점점 더 통감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요 절망적인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고 그는 탄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이해는 <7장>설교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탄식의 주체는 ‘로마서를 쓸 당시의 사도 바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절망하는 바울은 ‘과거 율법준수를 통해 의롭고자 했던 청년 사울’의 탄식이요, ‘강력한 죄의 힘 앞에 무기력하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청년 사울’의 절망이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그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롬. 8:1~2), 바울은 더 이상 과거의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런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놀라운 실천력이나 지적 능력이나 강인한 성격’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주인공이신 나사렛 예수의 진정한 종이 된 삶을 그가 살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부활의 능력에 사로잡힘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의 영 성령을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함으로 인간적으로는 심히 감당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당하는 모든 고난과 핍박의 삶’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고 사도 바울 자신이 고백하듯이, 복음 안에 나타난 구원의 능력이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속한)바 되어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이런 충성되고 담대한 주의 제자로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은 ‘모진 고난과 핍박’을 견디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모든 환난 가운데 도리어 세상이 줄 수 없는 넘치는 기쁨과 만족 그리고 감사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말로 만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 축복의 역설의 삶’을 풍성하게 누려 나갔던 것입니다. 사도가 <로마서 5장>에서 고백하듯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빌립보> 교회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밝히고 있듯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2)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능력주시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 4:13). 자신의 육신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사도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강한 주의 군사가 된 것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서 자족하고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엄청난 영적 비결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은 성도가,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보화를 날마다 발견하는 자의 삶에서 맺어가는 풍성한 열매요, 축복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로마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다시 듣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십니까? 로마교회 성도들과 같이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십니까? 성도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허락하신 구원의 비밀과 은혜’를 영의 눈을 열어 깨닫고 누려 나가고 있습니까? 마치 한 알의 작은 겨자씨가 땅에 심기어져 점점 자라나, 많은 새들과 짐승이 깃드는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듯이, 복음은 계속해서 성도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날마다 생명으로 자라나고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오늘’이라는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세월을 아껴 지혜롭게 사용함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더욱 깨닫고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복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복음을 편만하게 증거하고 자랑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