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Not Ashamed of The Gospel)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Not Ashamed of The Gospel)
2-15-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설교 요약]
이제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다시 한번 보다 본질적으로 정의하며, 이것이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라고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v.16)라고.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여기서 사도는 ‘나는 복음을 자랑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반어법을 통해 자신이 복음을 심히 자랑함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일까요?”
첫째,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다메섹 언덕에서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의 핵심은 자신이 미워하고 핍박하던 ‘나사렛 예수’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동족 유대인들이 간절히 기다려온 ‘오실 메시야’임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던’ (빌. 3:7~9) 이유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구원과 모든 약속의 유업을 누리기에 그는 예수님을 자랑했습니다.
둘째, “그는 구원의 은혜를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청년시절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함’으로 절망했지만 (롬. 7:15~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롬.8:1~2).
그럼으로 바울은 ‘십자가에 목 박히신 그리스도’를 온 힘을 다해 전했고 (고전. 1:23~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고자’ (갈. 6:14) 결심했던 것입니다. 주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허락하신 구원의 풍성한 은혜들을 끝없이 누렸기에 그는 언제나 복음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보화들을 발견하고, 넉넉히 누려 나감으로 복음을 진실로 자랑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다시 한번 보다 본질적으로 정의하며, 이것이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라고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v.16)라고.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솔직하게 복음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자세를 되돌아보고, 그 이유를 성찰해보는 시간 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음을,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합니까? 아니면 부끄러워합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데로, 사도는 <1장>을 시작하며 <2~4절>에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선언했고, 이어지는 <5~15절>까지 수신자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한 구체적인 이 편지를 쓰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음을 지난시간 확인해 보았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사도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로서, 먼저 ‘로마교회 성도의 믿음을 칭찬’하기 원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은 한번 듣는 것만으로는 끝나서는 안되며, 또다시 들어야 된다고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를 ‘오직 오늘이라 일컬어지는 시간 동안’ (히. 3:13)에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과거나 다가올 미래가 우리의 믿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오늘이라 일컬어지는 시간’이 여러분과 저의 믿음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날마다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사도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특별히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무슨 영적 은사’를 나눠 주기 원했는데, 그 ‘영적 은사’는 그 무엇보다도 ‘복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5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v.15)라고 그가 말한 이유인 것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는 복음을 단 한번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뿐 아니라, 여전히 복음의 더 깊고 넓은 진리를 깨닫고, 복음이 주는 구원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지 못했기에 사도는 그들이 복음을 다시 들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주 함께 나눈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오늘말씀을 통해 사도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뿐 아니라, 신구약성경 전체에서도 ‘복음’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정의로 인정되는 말씀이 바로 오늘본문 <로마서 1장16~17절>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 말씀이자, 중심 요절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주와 다음주에 거쳐 <16~17절>에 대해 살펴보겠는데, 이번주는 <16절>을 통해서 ‘왜 사도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지?’를 중심으로, 그리고 다음주는 <17절>을 통해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곧 ‘왜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지?’하는 것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16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씀을 시작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v.16)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한가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울이 복음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바울은 “나는 복음을 자랑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사학’적으로는 ‘곡언법’ (曲言法 Litotes)이라고 하는데, <’부정어’를 사용하여 본래 의도보다 약하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강한 긍정의 의미를 전달하는 수사법>입니다. 사도는 이 곡언법을 통해 자신이 ‘복음을 자랑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오히려 자기가 진실로 복음을 자랑하고 영광스럽게 여김을 역설적 (반어법적)으로 강조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처럼 복음을 자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지난 시간 ‘로마교회성도들’이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복음으로 변화된 인물’의 구체적인 예로 사도 바울의 삶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청년시절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자신’ (롬. 7:15)에 대해 괴로워하고 절망했는데, 그러던 어느날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혐오하던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던 나사렛 예수께서 다메섹 언덕위를 달려가고 있던 자신에게 찾아와 만나 주심으로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년 사울이 변화된 핵심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변화의 핵심은 바로 자신이 그동안 그토록 미워하고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는 ‘유대교에서 뛰쳐나온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자신뿐 아니라 모든 동족 유대인들이 간절히 소망하고,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오실 메시아’임을 주님을 만남으로써 그가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청년사울이 나사렛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임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제 그는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구원의 주인>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것은 청년 사울은 지난날, 결코 하루 하루를 허툴게 산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비록 자기 스스로도 나중에 시인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열심’으로 인해 그릇된 방향으로 인생을 방황했지만, 그러나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그분의 구원을 얻고자 그 어떤 바리새인보다도, 그 어떤 율법교사보다도 뒤쳐지지 않고자 발버둥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러던 그에게 ‘다메섹 언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참된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깨우쳐 주심으로 이제 자기 인생과 통째로 바꾸기를 주저하지 않을 참된 보물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럼으로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 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9)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로 만이 아니라, 바울은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요즘말로 ‘올인’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왜냐면,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하늘의 보화와 유업이 송두리채 있음을 그는 성령의 충만을 통해 분명히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은 그 무엇보다도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해를 시작하며 함께 주님의 <산상수훈>을 살펴보았는데, 그때 예수님은 ‘누가 복있는 자인가?’를 여덟가지 복, 곧 <팔복>으로 설명하시며 마지막 여덟번째 복을 이렇게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0)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삶’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어지는 <11~12절>에서 이렇게 다시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1~12)고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주님은 장차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수많은 그의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핍박당하고 심히 미움을 받을 것임을 미리 알려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악하고 무슨 큰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어두움에 속한 세상이 빛되신 예수님께 속한 우리를 미워하고 모욕하고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주를 믿는 믿음 위에 견고히 서 있지 못한 적지 않은 성도들이 주님과 세상 가운데서 우왕좌왕하며 갈등하고 나약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자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식사할 때도 남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기도하고, 자신이 예수님 믿는다는 것도, 예수님이 나의 주요 나의 구원자라는 사실도 남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하고 숨기려 애쓰는 것입니다. 왕따당하고, 미움과 핍박당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도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너희가 나를 먼저 부끄러워했으니, 나도 너희에게 그렇게 무시당한 만큼 돌려주겠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앙가품을 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감추고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 자의 심령 속에는 이미 주의 복음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상실했기에 자기 자신이 먼저 주님을 거부하고 떠난 상태임을 일깨우는 말씀이요, 그럼으로 속히 주님 자신과의 사랑의 관계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한다’는 뜻임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복음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세상의 헛된 가르침과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권능을 부인하는 사상’을 분별함으로 부끄러워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로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뿐 아니라, 앞서도 언급했듯이 오직 복음 안에서 누릴 ‘구원의 은혜’를 남은 이 땅의 삶을 살아가면서 놀랍도록 풍성하게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참된 성도의 삶’입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은 과거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 다시 말해 ‘그 강력한 죄의 힘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죄에게 끌려 다니며 그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무기력한 자신의 존재를 처절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그 보혈로 죄 씻음 받고, ‘과거의 자신’에게서 그는 벗어나는 은혜의 감격을 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지 못할 때’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눈을 돌리면 돌릴수록 우리는 더욱 더 부끄러움을 느께기 됩니다. <고린도전서1장>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목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우리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십자가에 목 박힌 예수’는 언제나 거부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철학과 학문을 자랑했던 헬라인들에게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리석고 우매한 미개인들의 지어낸 신화 정도로 밖에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날 일부 ‘신학자’라고 불리는 자들조차도 소위 ‘고등비판’이란 이름 하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이라는 잣대를 통하여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상식과 논리로 제단하고,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성경의 신화를 제거한다’는 의미의 ‘비신화화’라는 명목 하에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제거했던 것입니다.
이런 신학은 주로 20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아돌프 불트만을 중심으로 한 독일 신학자들이 펼친 신학 사조인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비신화화’라는 딱지를 붙여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여러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들’ 그리고 주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자연현상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모두 거부하고 잘라내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곧 그들이 불신자이든 아니면 방금 언급한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권능과 부활의 실제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들의 자랑이 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도리어 의심스럽고 신화처럼 치부되는 것이기에, 복음은 결코 그들에게 자랑이 아니요 부끄러움이요, 창피 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신뢰하신다면, 우리는 주의 깊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선언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 하였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증인으로 발견되리니” (고전.15:12~15)라고 사도는 매우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역사성, 곧 ‘진실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사건이요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않으셨다면, 그를 믿는 우리 모든 성도들도 다시 살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죄와 죽음에 갇힌 절망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의 참된 소망과 능력과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과 부활하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했고, 심히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리하리라” (갈.6:14)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세상의 철학과 헛된 가르침’ 그리고 심지어 ‘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교회 깊숙이 뿌리내린 ‘인본주의적 사상과 하나님의 권능을 거부하고 선한 뜻을 왜곡하는 거짓 신학사상’에 잠식당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를 계속해서 누려 나가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허락하신 모든 풍성한 구원의 은혜들을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바로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진정 사랑합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락하신 그 크신 구원의 은혜와 함께 그 말할 수 없는 하늘과 땅에 속한 유업과 보화들을 성도 여러분은 발견해가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날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심으로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 안에서 이 풍성한 보화들을 발견하시고, 넉넉히 누려 나가심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진실로 자랑하는 은혜의 삶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