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8, 2026

“상실한 마음” (A Depraved Mind)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1:28~32
Service Type:

“상실한 마음”
(A Depraved Mind)
3-8-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28~32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사기, 살인, 본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곧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이제 본격적으로 밝혀 나가면서, 이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시작됨을 진술했음을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도 바울의 ‘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지?’에 대한 영적 논리를 따라가 본다면,

첫째,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아니함’ (‘불경건’/Godlessness)으로 생각이 허망하고, 마음이 어두워졌고 (v.21)
둘째, 이때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형상으로’ 바꾸는 <우상숭배>를 행하게 됩니다 (v.23)
셋째, 이런 ‘우상숭배’를 행할 때, 모든 ‘죄’ (‘불의’/ Unrighteousness)를 짓게 됩니다 (v.24~32); 이런 <죄의 목록>에는 ‘성적 타락’ (24~27), 그리고 ‘모든 불의, 추악, 악의, 사기, 살인, 분쟁, 가득한 악독, 수군 수군거림과 같은 수많은 불경건의 열매를 맺습니다 (28~32)

이와 같이 점점 더 깊은 죄로 물들어가는 인간의 죄악된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시고,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을 “내어버려 두셨다” (gave them over) (v.24,26,28)고 바울은 3번씩이나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실 때, 우리의 마음상태가 바로 ‘상실한 마음’ (a depraved mind)입니다. 이것은 ‘삶의 목표와 의미를 상실한 상태’요, 그 <상실>의 핵심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상실했기에, 그 필연적 결과는 ‘타락과 부패’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돌아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진노 가운데서도 절망에 빠진 우리를 돌아보셔서 자비를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아의 고백임을 믿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예레미아애가 3:22~23)라고.

이 세대의 헛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고, 복음의 충만한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곧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이제 본격적으로 밝혀 나가면서, 그 첫 복음의 시작을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죄 용서>가 복음의 출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복음의 출발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망하게 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일까요? 그 이유는 지난 시간 살펴봤듯이, ‘암에 걸린 사람을 살리기 위해선, 먼저 그 발생한 암세포를 제거해야만 (도려내야만)’ 하듯,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죄에 대해 진노하심으로, 우리를 회개함으로 죄에서 돌아서게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돌아서지 않을 때 징계와 심판으로 그 영적 암세포를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는 그의 자녀를 구원하시고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가장 적극적이고, 강력한 행동이요,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의 첫 출발인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1장>을 마무리하는 본문 말씀 <로마서 1장28~32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 대한 진노하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함꼐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묵상함으로 이 영적 암세포인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단절시키는지를 통해 죄의 흉악하고 거짓됨을 함께 성찰하고 깨닫아가기 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시는 그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며, 그것은 ‘우리 인간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가 있음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경건치 않음/ 불경건>은 ‘하나님을 무시한 태도’ 곧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면, <불의>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모든 결과’라고 우리는 지난 시간 묵상해 보았습니다 (v.28~32). 그리고 이런 영적 정의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정확히 일치하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히브리어’ 원어에서 ‘죄’는 “헤트”(חֵטְא)로써 ‘과녁에서 빗나가다’ 혹은 ‘목표에서 벗어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과녁은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죄’는 작은 죄 큰죄 따지기 전에 그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도 바울이 <18절>에서 선언한 ‘하나님의 진노’가 복음의 출발이라면, 이 복음이 <18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1장의 마지막 <32절>까지 이어지는 우리 인간의 ‘불경건’과 그 열매인 ‘불의’가 무엇인지를 그 뿌리에서부터 본질적으로 밝혀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번 시간에 이렇게 영적 암세포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 인간을 장악하는 죄의 흉악한 단면을 함께 직면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바울은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난 이유는 ‘인간의 불경건과 불의’가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9~20절>에서 본격적으로 우리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파헤쳐 나갑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제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롬. 1:19~20)라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요? 크게 볼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방법, 신학적으로 말해서 ‘계시하시는 방법’에는 2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먼저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 안에 깃들여 있는 그분의 창조의 권능과 그 아름다우심을 드러내심으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교를 가졌건 아니건 상관없이 아름답고 광활한 자연만물을 바라보면 볼수록 그 안에 숨쉬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과 그분의 능력을 느끼고 감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반계시’의 방법인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특별계시/ Special Revelation>는 “특별히 ‘성경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자신이 누구신지를 인격적으로 밝혀 주신 것”이 ‘특별계시’의 핵심입니다. 이 특별계시를 통해 우리 인간은 생명과 사랑의 관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사도 바울은 <19~20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심어 놓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일반계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우리 모든 인간은 인지하고 깨닫을 수 있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근거의 하나가 <창세기1장26절>인데,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1:26a)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image)을 따라 ‘모양’(likeness)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과 모양으로 우리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영으로 하나님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1장20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럼으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롬.1:20b)라고. 무슨 말입니까?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만한 능력, 곧 영적 감각을 새겨 넣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나는 하나님을 몰랐다’라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관계없이 말입니다.

이렇게 <19~20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 대해 진노하시는 이유를 밝히고 나서, 그 구체적인 <불경건>의 핵심적인 내용을 <21~2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v.21~23)라고.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우상숭배’입니다. 여기서 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의 진술논리를 따라 가보자면,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가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근원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상숭배’일까요?

물론 ‘우상숭배’라는 개념을 우리가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저에게 ‘우상숭배’를 간략하게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저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그 무엇>이 ‘우상’이요, <그것을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가 ‘우상숭배’라고 저는 정의하겠습니다. 좀 쉽게 말씀드려서, 내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면, 그 돈은 나에게 있어서 <우상>이요, 돈을 쟁취하고자 추구하는 모든 행위는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분별해야 할 것은 ‘돈 자체’는 결코 ‘죄악’도 아니요, ‘우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은 돈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돈/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이웃을 돕고 섬기는 축복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돈이 내 삶의 전부인 냥 착각하고, 돈이라는 막강한 힘에 사로잡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자리에 그 돈을 모셔 놓았다면, 이 돈은 더 이상 돈이 아니라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내가 돈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컨트롤하고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우상’인 것입니다. 더 이상 구약성경에서 묘사한 사람이나 짐승이나 벌레 형상만이 아니라, 우리 속에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 무엇이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우상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우상은 없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런 우상이 ‘돈’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육신의 쾌락’과 ‘세상 명예’와 ‘성공’ 심지어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바람직하고 훌륭해 보이기까지 하는 ‘자기계획과 철학’ ‘건강’ ‘지식’ ‘자식’까지도 이것이 어느 날 나에게 ‘우상’으로 둔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것을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에 대처하는 순간 말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사도가 ‘우상숭배’의 민낯을 영적으로 고발하면서, <23절>에 이렇게 선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v.23)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히 우리의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썩어질 피조물, 곧 사람과 짐승과 벌레와 같은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이 대신 차지하는 <우상>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돈이든 욕망이든 자기 계획과 신념이든 철학이든 그 무엇이 되었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고 숭배하는 것’이 곧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가장 강력하게 명령하신 것의 하나가 <신명기 6장>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 어떤 율법학자가 찾아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마.22:36)라고 질문했을 때, 주께서 대답으로 주신 말씀이 바로 <신명기 6장>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장)는 말씀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곧 <핵심적인 가르침>’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가르침은 바로 <구약의 모든 율법의 명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의 명령은 ‘하나님사랑’ 곧 ‘하나님을 향해 온 힘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라면, 이것과 정반대 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임은 제가 새삼 길게 설명 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은 충분히 공감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하나님을 떠난 ‘불경건’의 죄 가운데 ‘우상숭배’만큼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죄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상숭배’의 심각한 죄를 우리 인간은 어떻게 짓는 것일까요? 감사하게도 사도 바울은 이런 영적 진행과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구조로 잘 설명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우리 심령/마음 가운데 그분을 알만한 것을 주셨지만, 그분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함으로써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v.21a). 둘째, 만약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생활할 때,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v.21b). 그럼으로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하지만, 어리석게 되어 결국 ‘썩어질 피조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고 경배’하는 가증한 <우상숭배>를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v.22~23). 이것이 불행히도 ‘우상숭배’를 행하는 모든 인간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이요, 영적으로 본다면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24절>부터 1장 끝절 <32절>까지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그분께 감사치도 않고, 영화롭게도 아니함으로 ‘허망한 생각’과 ‘어두워진 마음’을 통해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는 ‘우상숭배’를 행함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의 ‘목록들’을 사도는 한가지 한가지 날카롭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우상숭배가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를 설명하는 가운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사도가 3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을 대하시는 태도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 내어버려 두사” (God gave them over) (v.24,26,28)라는 것입니다. 그는 <24절>, <26절> 그리고 <28절>에서 세번씩이나 “내어버려 두셨(다)”는 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의 뜻은 말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하고 싶은 데로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고, 방치하셨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매우 심각하고 엄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비유하자면,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어긋날 때 타이르기도 하고, 벌도 주고, 다양한 방법을 쓰지만, 끝까지 정신 못 차릴 때 마지막 쓰는 것이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큼 힘들고 준엄한 징계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물든 그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마지막 단계는 ‘내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내어 버려 둠’을 당하게 되는 그 대표적인 죄악을 이렇게 그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24~2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정욕으로 불타올랐습니다. 그들은 같은 남자끼리 부끄러운 일을 행했고 이런 타락한 행위로 인해 그들 자신이 마땅한 징벌을 받았습니다” (v.27)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을 ‘성적 타락’이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동성연애’ (homosexuality)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볼 때, 언제나 극심한 타락의 중심에는 성적 타락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극심한 성적 타락은 앞서 설명 드렸던 것처럼,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떠나 허망한 생각과 어두워진 마음에서 필연적으로 비롯되는 죄의 목록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 밖에도 사도가 마지막 몇절 동안 밝혔듯이 “모든 불의, 추악, 악의가 가득한 자,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 (v.29~32)라고 여러가지 어두움의 목록을 진술하지만,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육체적 타락’임을 바울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지막 질문은 ‘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가?’아니 ‘왜 하나님은 진노하셔야만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원인적으로는 볼 때는 ‘우리 인간의 하나님을 무시한 불경건과 그로인한 모든 불의의 열매’ 때문이지만, 더 깊은 내면에서 성찰해 볼 때, 그 중심에는 ‘우리를 죽이는 영적 암세포인 죄를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가장 적극적이고 의로우신 구원의 은혜에서 비롯된 ‘그분의 진노’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우상숭배로 허망하고 어두워진 심령 가운데 필연적으로 열매 맺는 육체적 타락과 온갖 불순종의 열매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함, 수근수근거림’입니다. 이것이 왜 시작되었다고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셨기 때문’ (v.28)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상실한 마음상태>일까요? 여기서 ‘상실’을 사전적의미로 본다면 “무언가를 잊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리고 ‘상실한 마음’을 영어로는 “a depraved mind”로써 그 의미가 ‘타락/부패한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꿰뚫고 있는 우리 인간문제의 핵심은 ‘상실한 마음’인데,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상실하고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에는 필연적으로 ‘부패와 타락’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우리 모든 인간의 실존이기에,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그 선하심과 의로우심으로 그의 택한 자녀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요, 이것이 복음의 출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우리를 건져 주시고, 오히려 새 소망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잘 밝혀주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예레미아애가 3장>의 말씀일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하심으로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와 불순종 가운데 심히 고초 당함으로 심령이 크게 낙심되었음을 고통스럽게 하나님께 토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중심에 주시는 새로운 소망을 깨닫고 도리어 이렇게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애. 3:22~23)라고. 하나님은 그 진노의 혹독한 잔을 주시는 가운데서도, 그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이스라엘을 절망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 진멸되지 않게 남은 자를 허락하시고, 아침마다 새로운 소망으로 눈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아가 누렸던 고난 가운데 누렸던 크나 큰 하나님심으로의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은 죄로 얼룩진 우리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이렇게 ‘1장’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v.32) 이것은 ‘악을 도모하는 자들의 삶의 행태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자신들만 악을 저지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그 악을 함께 행하도록 서로 권장하고 충동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에 물든 이 세상의 적나라한 모습이요, 사도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롬.12)고 성도들에게 도전한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지금 심령은 어떻습니까? ‘가난하고 청결한 마음으로 날마다 주와 함께 새롭게 변화되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두기 싫어함으로 상실한 마음으로 고통받고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 누구도 섰다고 말할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날마다 우리의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신념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그 선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 세대의 헛된 가르침과 가치관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심과 온전하신 뜻을 날마다 분별함으로 자녀의 권세와 능력을 드러내며, 복음의 충만한 열매를 날마다 맺어가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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