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판단하는 사람” (A Person Who Judges Others)
“남을 판단하는 사람”
(A Person Who Judges Others)
3-15-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2:1~2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로마서2장>에 들어섰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도가 로마서를 시작하며 <1장>에서 ‘왜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신지?’를, 그리고 ‘왜 하나님의 복음은 그분의 자비와 용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진노에서 시작하는 것인지?’를 지난시간까지 묵상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2장>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 우리 인간의 죄와 허물은 무엇인지를 복음의 진리 가운데 사도 바울이 철저하게 드러내는 말씀과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먼저 사도는 <2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v.1)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남을 판단하는 이 사람’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크게 <2가지 견해>가 있는데,
- 첫째, ‘이방인중에서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견해
- 둘째, ‘유대인’이라는 견해
이렇게 두가지로 성경학자들은 ‘이 사람’을 추측합니다. 다시 말해, 사도가 <1장18~32절>까지 고발한 불경건과 불의 가운데 상실한 마음으로 죄에 빠진 자는 총체적인 ‘이방인’이라면, 이런 사도의 말을 듣고,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런 죄인들은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맞장구치는 사람은 ‘이방인 도덕주의자’라는 견해, 혹은 ‘유대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2장1~2절>은 이렇게 사도의 말을 듣고 <맞장구 치며, 남을 판단하지만, 자신도 같은 죄를 범하는 사람>의 모순을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 사람’의 모순일까요?”
- “유대인의 민족적 모순”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으로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영적 착각과 <이방인은 악하고 자신들은 의롭다>는 높아진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로 남을 비판하지만, 동일한 죄를 범하는 유대인의 민족적 모순인 것입니다.
- “하나님의 진리를 적용함의 모순”입니다: 이 모순은 ‘민족’이 아닌 ‘개인’적 모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1~3)라고 남을 비판하면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는 자신의 더 큰 죄와 허물은 깨닫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모순을 지적하십니다.
- “우리 크리스챤의 모순”입니다: ‘크리스챤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구원받은 것으로 여기거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율법주의’ (legalism)의 올무에 빠지거나, 스스로 진리의 재판관인 양 믿지 않는 친구나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대표적으로 우리 크리스챤이 범하는 모순입니다.
바라기는 주의 영으로 우리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봄으로 허물과 죄를 고백함으로, 영적 모순의 올무에서 벗어나 영으로 자유함을 누리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그동안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며 ‘1장’에서 밝힌 주요한 개념, 곧 ‘로마서의 주제’인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그동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왜 나사렛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복음의 주인공인 그리스도이신지?’ ‘왜 로마교회 성도들은, 아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다시 들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복음의 출발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자비 혹은 용서가 아니라, 진노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인지?’ 하는 것을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2장>으로 넘어섰는데,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1장>만큼 많은 시간이 요구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뜻을 우리 나름데로 이해하고자 함에 있어서, 이해하기가 쉬우냐 어려우냐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의 의미를 원래 저자의 의도를 따라 바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사도 바울을 감동시키셔서 <우리 인간의 참모습> 곧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르고, 모순된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심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히 성찰함으로 주의 사랑과 성령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복음의 은혜를 누려 나가는 시간 되길 기대합니다.
이제 사도는 <2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v.1~2)라고 말입니다. 이 문장을 가만히 보면, 바울이 지금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가 부르는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누구를 뜻할까요? 이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 신학자들 사이에서 몇 가지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첫째 <이방인들 가운데서 윤리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1장’의 말을 모두 듣고나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맞아요! 사도 바울 당신의 말이 100% 맞아요! 그처럼 우상숭배하고, 육체적으로 타락하며,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가 가득한 자가 얼마나 죄악된 자인지 나도 잘 알아요! 이런 자들이 벌받는 것은 당연해요!” 라고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 견해는 ‘이 사람’은 <유대인>을 의미한다는 견해입니다. 그 역시 이렇게 바울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당신의 말이 맞아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해요, 이 모든 이방인들의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그럼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에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해요!”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성경학자들에 따라서 <1장18절~32절>까지의 사도가 지적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이방인들의 총체적인 죄>라면, <2장1절~16절>까지의 문제는 <이방인 가운데서 도덕과 윤리적으로 산다고 자신하는 자>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것이요, 혹은 <1장>은 <이방인> 그리고 <2장>은 <유대인>의 문제점을 바울이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견해로 크게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각자의 타당한 논리는 있겠지만, 제가 이해할 때, 오늘부터 시작되는 <로마서 2장>에서 사도가 주장하는 바는 <첫번째>견해보다는 <두번째>견해 곧 ‘이 사람’은 <유대인>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좀더 타당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큰 그림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이 일차적으로 <1장18절>에서 <3장20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진노를 범하는 인간의 문제’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파헤치며 문제를 주장하는 주된 대상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방인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이방인들의 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2장>을 시작하면서 소위 자기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1장에서 고발하는 그런 죄인, 그렇게 흉악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는 죄인이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이 사람’은 일차적으로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스스로 <도덕적이고 죄 없다고 주장하는 이방인>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말씀이 먼저 <1장16절>에 나오는데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1:16)는 말씀입니다.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이 임하는데, 첫째는 유대인이고, 그 다음은 ‘헬라인’으로 대표되는 ‘모든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나서 <2장>에서도 사도는 <9절>과 <10절>에서 다시 ‘유대인과 헬라인’을 언급합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롬. 2:9,10)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과 ‘진정한 예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2)는 말씀과 같이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시작되었고,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기 때문’에 그만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와 진리의 빛을 누리는 특권을 누렸던 것입니다. 한편 이런 은혜와 특권을 누리는 만큼 그들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도 큰 것입니다. 그럼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유대인들은 깨닫은 진리에 순종해야 하며, 율법의 요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는’ 항상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먼저 구원의 진리를 받았고, 선한 율법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이 헬라인이요, 모든 이방민족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계속해서 ‘첫째는 유대인이요 또한 헬라인이라’고 거듭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입니다. 그럼으로 저는 이런 사도 바울의 말을 영적으로 이해할 때,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도 또한 바울이 말하는 ‘이 사람’을 적용해야 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그렇다면, 사도가 <2장>을 시작하면서 ‘이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존재에게 도전하고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자 자신의 모순 (영적 무지)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 사람’의 모순일까요?” 그것은
첫째, “유대인의 민족적 모순”입니다: 먼저 <사도행전>을 비롯한 신약성경과 그 당시 초대교회때의 상황을 기록한 문헌들을 읽어보면, ‘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강히 거부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영적 모순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크게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는) <유대인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으로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이기 때문에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태복음>에 보면, 이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임으로 자신들은 당연히 천국가고 구원받는다고 오만하게 주장하는 확신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침례 요한>은 이렇게 강하게 그들의 영적 무지를 도전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 3:8~9) 아브라함의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가지)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이 낳은 해악은 <이방인은 모두 악하다>는 것입니다. 왜 악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이방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요, 그들이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했기 때문이요, 그럼으로 악을 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고,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초대교회 크리스챤들이 나타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이들 유대인들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과 아브라함의 후손인 자신들을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그 자체가 그들은 자존심 상하고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이 복음을 완강히 거부했던 대표적인 이유라고 신학자들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비뚤어진 선민의식이 낳은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와 편견과 선입관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정신적으로 자신을 객관해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영적으로 올바른 분별력을 잃어버린 모순된 유대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이 낳은 모순성이 오늘날 현재까지도 ‘세계의 화약고’라 일컬어지는 심각한 중동사태를 끊임없이 발생시키는 그 한 축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요?
둘째, “하나님의 진리를 적용함의 모순”입니다: 저는 사도가 <2장>을 시작하면서 ‘이 사람’이라고 지칭되는 사람의 모순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먼저 ‘유대인의 민족적인 모순’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의 모순’에 대해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이 되었건, 헬라인이 되었건 관계없이 개인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적용’함에 있어서의 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장>을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그는 이렇게 선언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 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v.1)고 말입니다. 지금 사도의 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자신은 남의 행동을 잘못됐다고 비판하고는, 자신도 똑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모순 말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얼마나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1,2)라고 말입니다. 사도의 오늘 말씀의 도전은 본질적으로 주님의 도전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모순된 행동을 행하는 자들에게 이와 같이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3)라고.
지금 사도가 <2장>을 시작하며 문제제기하는 핵심은, 앞장 <1장18절>에서부터 끝절 <32절>까지 그가 제기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불경건과 불의한 모든 죄악된 모습을 듣고 나서 앞에서 살펴봤듯이 ‘바울 당신 말이 맞아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해요!’라고 비판하는 <이 사람> 역시 동일한 죄를 범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기 스스로 의로와져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도 동일한 죄를 범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첫째는 ‘유대인들’로써 특별히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과 같이 유대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삶에 대해 여러 차례 책망받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겸손하게 돌아보고 뉘우치기는 커녕, 자신의 죄와 위선을 드러내는 주님을 미워하고 눈의 가시처럼 여겨 결국 죽이고자 획책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중에서 스스로 의롭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 또한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도덕과 윤리적으로 상대적 우월감’을 누릴지는 모르지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눈앞에서는 모두 동일한 죄를 범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 9편>에서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시. 9:7~8)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정직하며, 민족이나 성별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언제나 차별없이 공평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한편 <시편 96편>에서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 96:10,13)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2장>을 진행해 나가면서 <11절>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심으로 언제나 만민을 차별없이 공평하게 진실하게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 하심이니라”(롬. 2:11)라고 말입니다.
이런 두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모순된 사람들은 주로 ‘지식인’ ‘종교지도자’ ‘철학자’ ‘도덕론자’와 같은 <사회지도층에 속한 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많이 배우고, 남을 가르친다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진리에 대해 역행하는 아이러니가 있다는 것이 안타깝게도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그 유명한 명언처럼, 만약 우리 자신이 진리를 사랑한다면, 더욱이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혹은 ‘세상의 ‘모순된 도덕주의자들’처럼, 자기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눈이 감긴 존재가 되지 안토록 겸손히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래도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 크리스챤의 모순”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저는 ‘이 사람’의 한명으로 ‘우리 크리스챤’을 적용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사도 바울이 <2장>을 시작하면서 도전하듯이, ‘이 사람’이 그 누가 되었건 ‘남에 대해서는 엄격한 판단을 행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판단력을 전혀 상실한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겸손하고 정직하게 성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정확히 사도가 도전하는 ‘이 사람’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도전하는 핵심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도전하는 존재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 이글을 읽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떤 모순을 행할까요? 제가 앞서 ‘유대인의 민족적 모순’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유대인들은 자신이 ‘유대인의 한명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곧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곧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적지 않은 크리스챤들 중에는 ‘구원’을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민족적 혹은 가족적 차원으로 오해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과거 유대민족들처럼, 국가적으로 <기독교국가>라고 불렸던 ‘영국’이나 ‘미국’(요즘은 더 이상 ‘기독교국가’로 불리지 않음)의 국민들은 자신이 기독교국가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받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기독교를 믿는 부모의 가정, 곧 ‘신앙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도 자동으로 구원받았다고 믿는 성도들도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이것 만이 아닐 것입니다. 말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임을 믿는다고 하고서는, 실제로는 ‘행함을 통해 의롭게 되고자’ 하는 <율법주의> (legalism)적 신앙생활하는 성도들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크리스챤은 ‘신구약성경’과 복음의 진리를 믿기에 우리 자신들이 진리의 재판관인양 아직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성경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불신자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진리를 깨닫았다는 나 자신은 과연 그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되돌아볼 때, 나의 옷깃을 겸손히 여미지 않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 각자 자신의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모순덩어리’가 우리 자신인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순된 모습은 어쩌면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크나 큰 도전과 교훈을 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속에서 동일한 우리 크리스챤의 모순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요, 불순종한 백성’이요, 신약에서 ‘스스로 의롭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맹인’이 됨으로 예수님께 큰 꾸지람을 받았던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의 모습은 아닐지 하고 저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가 <2장> 후반절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도전한 말씀일 것입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23-24) 이 말씀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바로 우리 크리스챤들, 곧 ‘하나님의 율법인 말씀을 믿고 전한다’는 우리 크리스챤을 향한 도전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서 영적 맹인과 같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며, 세상의 철학자와 지식인들처럼 남의 허물과 죄에는 민감하지만 자신의 죄에는 둔감한 모순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라기는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거울이 되고, 성령께서 이끄셔서 우리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겸손하게 바라봄으로, 우리의 허물과 모순을 깨닫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정직한 나의 죄에 대한 깨닫음이 자신의 무능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런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깨닫고 확신하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런 나 자신에 대한 정직한 인식과 고백이 바로 복음이 내 안에서 참된 능력으로 역사하는 출발점이요, 성령을 신뢰함으로 승리하는 삶의 시작점임을 확신함으로 주의 진리로 자유함을 누리고,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날마다 거두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