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외로움” (Solitude And Loneliness)
“고독과 외로움”
(Solitude And Loneliness)
11-17-24
본문말씀: 시편 (Psalms) 112:7~8
7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They will have no fear of bad news; their hearts are steadfast, trusting in the Lord.)
8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Their hearts are secure, they will have no fear; in the end they will look in triumph on their foes.)
[설교 요약]
저는 말씀 가운데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한 서로를 이해해 가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시편 112편>의 주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뢰하는 자의 삶”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뢰하는 자’를 성경은 ‘의인’이요, ‘복된 자’라고 일컸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v.7~8)고 선언합니다. 의인은 흉한 소식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21세기의 대표적인 영성가인 <리챠드 포스트>는 ‘영적 훈련과 성장’ (Celebration of Discipline)에서 ‘홀로 있기’ (solitude)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화가 옮을 설명합니다.
- “우리는 외로움과 공포에서 자유케 하는 ‘내적 홀로 있기’와 ‘고요함’을 개발할 수 있다. ‘외로움’ (loneliness)은 내적 공허요, ‘홀로 있기’ (=고독/solitude)은 ‘내적 충만’이다. 그럼으로 <홀로 있다>는 것은 장소라기보다는 마음과 정신의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말입니다.
<R. 포스트>는 우리 성도를 향해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도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군중 속에서 떨어져 나와 ‘나 자신을 마주하는’ 홀로 있음을 어색해하고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이런 ‘홀로 있음’ (solitude)을 통해 역설적으로 ‘성숙된 공동체’를 이룰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위를 보면, 이처럼 혼자의 시간을 어색해하고, 못견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성격의 타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각자는 ‘혼자 있기를 연습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아빌라의 테레사>는 “당신이 홀로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바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영적 훈련’을 통해서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고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주님과의 홀로 있는 영적 훈련을 감당하며, 세상이 주는 내적 공허와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사자처럼 담대하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한 명 한 명을 얼마나 그 생긴 얼굴만큼이나 다양하고 독특하게 지으셨는지를 경험해 나가며, 하나님 아버지의 신묘막측한 창조의 손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각자 다양한 기질과 특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렇게 자기의 색깔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좋다 나쁘다고 할 것도 없이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대로, 그 성품과 기질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 완전하지 않기에 또한 우리 각자가 거하는 육신이 연약하기에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허물과 부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먼저 우리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받아들이고 또한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용납하는 마음으로 말씀 가운데 특별히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통해 함께 변화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시작이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시편 112편>은 그 주제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뢰하는 자의 삶”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자면, ‘의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몇 주전에 시편의 첫장이자, 시편 전체의 주제와 같은 말씀인 <시편 1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시편 1편’의 주제는 ‘누가 복된 사람인가?’ 다시 말해, ‘누가 축복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인가?’라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바로 소극적 (부정적)으로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이 서지 아니하며,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요, 적극적 (긍정적)으로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곧 ‘여호와의 말씀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자가 복되고 행복한 자라고 성경은 선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전체에서 한결같이 이런 ‘복 있는 자’를 ‘의인’ (the righteous)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의인’은 행동에 있어서 한점의 실수도 없고 완벽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분의 말씀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기뻐하시는 뜻에 순복하여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 ‘의인’은 주께서 주신 가장 값지고 놀라운 은혜이신 ‘구원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영생’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의인’의 삶이 왜 복된 것인지? 가 또한 오늘 <시편 112편>의 주제인 것입니다. 그 주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그분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112편>은 이렇게 시작됨을 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v.1)라고. 시편 전체, 아니 성경전체의 주제가 되는 ‘의인이 누리게 될 복’이 무엇인지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앞의 <6절>에서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v.6)라고 시인은 선언합니다. 지난번 <시편 1편>에서 “악인은 ~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4)는 묘사와 같이 악인의 삶은 늘 정함이 없고, 흔들리고, 요동치며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요동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더 깊이 묵상하고자 하는 요점입니다.
단순히 ‘시편말씀’만이 아니라, 성경말씀 전체에서 ‘의인은 흔들림이 없이 견고한 반면, 악인은 흔들리고 요동치며, 마침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성경은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의인의 흔들림 없는 견고한 삶의 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v.7~8)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오늘 말씀을 통해 좀더 깊이 살펴보기 원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독과 외로움>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먼저 이 두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외로움’의 의미는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라고 되어 있고, ‘고독’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이라고 개념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국어사전>적 의미에서 볼 때, ‘외로움과 고독’은 그 의미가 별 차이가 없이 대등소이해 보입니다. 단지 두 단어 모두 쓸쓸한 상태인데, 차이는 ‘고독’이 ‘외로움’보다 좀더 심한 정도라고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거기에 비해 ‘영어 사전’에서는 ‘고독’ (solitude)를 <the state or situation of being alone>라고 하며, ‘외로움’ (loneliness)은 <sadness because one has no friends or company>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까, 영어사전의 개념에서 볼 때 ‘고독’은 ‘쓸쓸하다’ ‘외롭다’는 식의 느낌이나 마음상태를 부각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혼자된 상황’을 강조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solitude’ (고독)은 단지 ‘혼자인 상태’이지 이것을 ‘외롭다’니 ‘쓸쓸하다’니 이런 감정적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점을 영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사람이 <리차드 포스터>라고 저는 믿습니다. 포스터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대표적인 영성가의 한사람인데, 이제 기독교의 고전이 된 그의 책 “영적 훈련과 성장” (Celebration of Discipline)에서 이점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스터는 이 책에서 <’홀로 있기’의 훈련>라고 번역된 <solitude>라는 장 (chapter)에서 무엇이 ‘홀로 있기’ (solitude) 곧 ‘고독’인지를 영적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혼자 있기’ (고독)을 무서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소음과 군중 속으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공허한 말일지라도 계속해서 말을 하며 우리 곁에 가까이 둘 수 있는 라디오를 구입한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하서라도 고요한 가운데 처해 있지 않으려고 한다 ~ 그러나 외로움과 소음 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외로움과 공포에서 자유케 하는 ‘내적 홀로 있기’와 ‘고요함’을 개발할 수 있다. ‘외로움’ (loneliness)은 내적 공허요, ‘홀로 있기’ (=고독/solitude)은 ‘내적 충만’이다. 그럼으로 <홀로 있다>는 것은 장소라기보다는 마음과 정신의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포스터는 탁월하게 ‘외로움’과 ‘고독’ 곧 ‘홀로 서기’를 영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포스터의 결론은 ‘홀로서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홀로 설수 있을 때 역설적이지만, 비로소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이, 부부가, 친구가, 신앙공동체가 그 서클 안에서 서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서로 하나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먼저 각자가 ‘홀로 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홀로 선다’는 것이 처음엔 어색할 수도 있고, 쓸쓸하고 두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 혼자 있는 시간을 이겨내지 못하고 우선 편하자고 ‘사람들’ (군중들) 속으로 도망한다면 우선은 잠시 편안함을 느낄지라도 이것은 결국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홀로 서지 못하는 ‘평생 유아상태’를 벗어날 수 없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잠시라고 옆에 나를 돌봐 줄 부모가 없으면 불안해하는 <정신적인 어린 아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보면, 안타깝게도 이런 ‘외로움’을 못견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외롭다’ ‘쓸쓸하다’ ‘혼자 있기를 두려워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외향적 타입’이라고 말하고, ‘사람들과 잘 사귀는 ‘ESFP’형 인간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당연히 성격 (기질)적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타입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여러가지로 좋은 장점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많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은 ‘내가 어떤 타입 (유형/성격)의 사람이냐?’ 를 떠나 ‘나는 홀로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일하는 시간 말고, 순전히 혼자 휴식하고 자신만의 홀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여러분은 혼자 고적히 자신만의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는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은 영적이든, 세상적이든 상관없이 성숙된 인격체로 나아가는데 큰 걸림돌이 됨을 두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홀로서기’ 곧 ‘고독’의 훈련이 영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신앙성숙에 유익한지를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당신이 홀로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혹시 성도 여러분이 평소에 ‘왜 나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와 은혜의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하나님을 믿음에도 내 속엔 평화가 없고, 조그만 자극에도 신경이 날카로와지고, 끊임없는 인생의 풍랑속에 요동치고 흔들리는가?’라고 궁금해한 적은 없습니까? 그 이유의 중심에는 ‘홀로 서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젖동생이었던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삶이 흔들리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도전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 두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1:6~8)라고. 여기서 야고보는 믿음으로 굳게 서지 못하는 자를 ‘강풍에 밀려 요동치는 파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속에 두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요, 또 하나는 세상을 향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의 속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마음’이 그 사람의 중심을 서로 잡아당김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저는 ‘외로움’과 ‘고독’ 곧 ‘홀로서기’라는 이 두 단어를 통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홀로 선다는 것이 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꼭 필요한 것인지?’를 성도 여러분이 깨닫고, 진정한 홀로서기를 연습 (훈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응원하고 기대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유명한 <참회록>을 쓰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 주님! 당신에게 찬양을 드릴 때에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는 결코 쉽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our hearts are restless till we find rest in Thee!)라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시고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라고 말입니다. 이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어대고, 요동치게 하는 세상 속에서 오직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소유함으로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원합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잠.28:11)는 말씀과 같이 날마다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와 묵상 가운데 홀로 서기를 연습하며, 두려움 없이 사자처럼 담대한 복된 주의 자녀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