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 2025

“긍휼히 여기는 자” (One Who Are The Merciful)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5:7
Service Type:

“긍휼히 여기는 자”

(One Who Are The Merciful)

2-2-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7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설교 요약]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팔복>의 의미를 묵상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다섯번째 팔복으로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긍휼’의 뜻은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 (국어표준 대사전)이고, 헬라어로는 ‘옐레에몬’ (λεήμων), 그리고 ‘히브리어’는 <헤째드> (חֵסֵד)인데,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힘듦을 도와 주고자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 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히브리 성경학자들은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헤째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신적 긍휼>이라고 지적합니다

사실 이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인들은 ‘힘’과 ‘용맹’와 ‘훈련’을 추구했지만, ‘용서’니 긍휼’이니 하는 말은 매우 생소했습니다. 한편 로마에 지배를 받았던 유대인들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좋은 백성들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율법의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아감으로 예수님의 많은 질책을 받았습니다 (마. 5-7장; 눅. 6장).

한마디로 세상은 ‘무정하고 무자비함’으로 전혀 긍휼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세상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긍휼이 여기는 자로 살수 있을까요?” (How are we to be merciful?) 그것은

  • 긍휼의 시작은 하나님임을 이해함”으로써 입니다: 주님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눅. 6:35)라고 놀라운 도전하시고 나서, 그 이유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 6:36)고 밝히십니다. ‘긍휼’은 ‘나의 노력과 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서 시작되고, 또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내가 얼마나 긍휼함을 받은 존재인지를 깨닫음”으로써 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만 달란트’의 빚을 진 어떤 '종'이 선한 주인의 은혜로 그 빚을 모두 탕감 받았지만,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만 달란트의 ‘1/50만’)의 빚을 진 한 동료를 긍휼이 여기지 않고 옥에 가두는 악을 행함으로 주인의 심판을 받게 됨>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마. 18:23-35). 주님은 ‘만약 네가 하나님께 그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을 깨닫는다면, 형제의 작은 허물을 용서함이 당연하다’고 도전하십니다.
  • 말씀의 인도와 성령충만으로 행함”으로써 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좇아 이웃을 긍휼히 여기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의 자비의 성품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던 스데반과 같이, 우리도 성령충만을 통해 긍휼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 6~7장).

바라기는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닮아감으로 이웃을 긍휼이 여기고, 또한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삶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팔복>의 의미를 묵상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주님은 <8가지의 복>을 나열하시면서 생각나는데로 즉흥적으로, 산만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 기반 위에 점진적인 확장의 개념으로 팔복을 선언하심을 우리는 살펴 보았습니다. 이 팔복의 공통점은 모두 ‘구원받은 자’ 곧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근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이 복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자>에게서 보게 되는 ‘자기성찰에서 비롯된 복’에서 출발하여, 지난 주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서 보았듯이 점점 더 ‘외부로 향하는 복’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는 ‘영적 배부름의 복’은 본질적으로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추구함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과 성화의 복’인 것인 것입니다. 이제 계속해서 이런 확장되어지는 복,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주께서 선포하신 복의 의미를 함께 이해해 나가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긍휼’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국어 표준대사전>에 보면 ‘긍휼’ (矜恤)은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의미는 ‘사람이 그 누군가를 불쌍히 여김으로서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긍휼히 여기다’는 ‘헬라어’원어는 ‘옐레에몬’ (λεήμων)이고,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째드> (חֵסֵד)인데, 그 의미가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힘듦을 도와 주고자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 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히브리 성경학자들은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헤째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신적 긍휼>이라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 한없는 긍휼과 자비, 곧 ‘헤째드’를 베풀어 주셔서 죄 용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이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우리 성도들도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이웃을 향해 이 ‘헤째드’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긍휼’에 담긴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긍휼’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긍휼’은 <허물과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을 대하여 그 넘쳐 흐르는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그 억제하실 수 없어서 보여 주시는 그분의 태도와 행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3:16; 롬. 5:8; 시편 103:12-18).

한편 오늘 주께서 말씀하신 본문의 ‘긍휼’ (mercy)에 대한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데, 먼저 그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여러 국가를 정복하고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며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로마제국>에 있어서 ‘긍휼’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사실 그 당시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긍휼과 자비’는 상당히 미약하고 부정적인 개념이었음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논리와 선은 언제나 ‘힘’이요, ‘정복’이요, ‘훈련’과 ‘용기’였지,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로마인들의 ‘긍휼’에 대한 가치관이 과연 어떤 한 것인지를 대해 어떤 로마의 철학자의 ‘긍휼’에 대한 이런 표현에서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정신적 질병이다”라고 말입니다. ‘강함과 세계 제일’을 추구하는 로마의 시대정신은 ‘긍휼이니, 자비니, 용서니 하는 것들’은 하나의 가치 없는 나약 함이요, 병적인 온정주의이자,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그들은 매도했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로마에 지배당했던 유대인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겉으로 볼 때는 자타가 인정하는데로,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종교>에 온 삶을 바치고 살아 가는 자들이지만, 내면적으로 볼 때는 그 유대종교의 기초가 되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적용으로 그 당시 예수님께 많은 책망과 도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게 될 주님의 산상수훈에 그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그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율법준수>, 즉 ‘겉과 속이 다른 종교적 모습’을 주님은 매우 강하게 질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지 못함’에서 오는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외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들의 내면은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의 정신과는 모순 (반대)되는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긍휼함이 없는 냉정하고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예수님의 몇 가지 유대인을 향한 몇가지 도전의 말씀을 살펴본다면, 주께서 팔복을 선언하고 나서 같은 <마태복음 5장>에서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율법준수를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모세의 십계명에는 ‘남을 실제로 죽여야만 사형에 처하지만, 이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v.21-22)고, 그리고 과거에는 ‘육체적인 간음을 행해야만 처벌을 받았지만, 이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다’ (v.27-28)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만약 형제에게 잘못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나서 그 후에 와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라’ (v.23-24)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날카로운 유대인을 향한 질책의 핵심은 형식적인 율법준수가 아닌, 진정한 내면에서부터 출발하는 <진정한 율법의 정신>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라 실천하는 삶이요, 이런 정신이 그 어떤 것보다도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히 여기는 자’의 성품에서 잘 드러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물론 ‘우리 함께 긍휼이 넘치는 크리스챤이 됩시다!’라고 결론짓고 끝내면 좋겠지만, 이것이 결코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몇 주전에 한 자매랑 ‘보육원’에서 돌보는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잠시 얘기하면서, 아직 말도 잘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들 눈에도 뭔가 약하고 자기들과 다르다고 느껴지는 아이가 있으면 괴롭힌다는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그 어린 아이들의 눈에도 본능적으로 자신들과 뭔가 다른 아이가 느껴지면 집적거리고 못살게 군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본성과 마주 대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이문열의 소설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어린 학생들의 잔인성과 같이, 그리고 얼마전 한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학교폭력>를 주제로한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에서 고발하는 ‘학급 친구를 왕따 시키고 괴롭히는 것’과 같은 인간의 폭력성과 무자비성을 우리는 잘 기억하시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학작품이나 연극 등을 통해 드러난 인간 존재의 어두운 면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긍휼함’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존재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우리 속에는 본성적으로 긍휼과 자비가 넘치는 존재가 아님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께서 도전하시고 격려하시는 긍휼이 풍성한 자의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떻게 우리는 긍휼이 여기는 자로 살수 있을까요?” (How are we to be merciful?) 그것은 첫째, “긍휼의 시작은 하나님임을 이해함”으로써 입니다: 제가 대학생때, 교회 대학부에서 말씀으로 섬기셨던 목사님이 계셨는데,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이 납니다. ‘만약 여러분의 원수가 여러분의 머리를 밟고 지나갔다면, 여러분은 어디가 가장 상처를 입겠습니까?’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머리를 밟고 지나 갔으니, 머리가 가장 크게 상한 것일까요? 그 분의 대답은 ‘여러분의 자존심’이라는 겁니다. 원수가 여러분의 머리를 밟고 지나 갔다면, 가장 상한 것은 자존심이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 대부분의 인간은 어쩌면 이처럼 ‘자존심’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은 우리 각자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상관없이 이와 같이 내가 누군가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받은 ‘자존심의 상처’와 그로인한 ‘상대방에 대한 분노의 감정’으로 인해 그 대상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불쌍히 여기지도 긍휼히 여기지도 못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주님께서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눅. 6:35)라고 놀라운 도전을 하십니다. 어쩌면 성경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숙제이자 도전의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 아닐까요? 사실 제가 앞에서도 함께 살펴보았듯이, 우리 인간은 결코 쉽게 서로를 사랑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원수는 고사하고, 나 자신과 성격이 안 맞아도, 취미가 달라도, 사는 동네가 달라도 사랑하기 부담스러워 하는데 말입니다. 솔직히 우리 크리스챤들도 마음 속으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매우 좋은 도전이지만, 결코 이뤄지기는 힘든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엄청난 말씀을 하시고 나서, 다음 절에서 어떻게 그런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열쇠를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 6:36)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는 원수를 사랑할 능력이 없음을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아니,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도전하시고 격려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덧 입음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둘째, “내가 얼마나 긍휼함을 받은 존재인지를 깨닫음”으로써 입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한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성도 여러분에게 하기 원합니다. 그것은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과 저는 이웃을 자비와 긍휼함으로 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주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마. 18:21) 라는 질문에 대해 “일곱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2)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악한 종’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18:23)라고 말씀하시며, 어떤 종이 <일만 달란트>(≒ 5조원)의 빚을 졌는데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그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모든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1천만원) (만 달란트의 ‘1/50만’)의 빚을 진 동료 한 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자기 빚을 갚지 못하자 이 종은 그를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알게 된 다른 동료들이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주인은 크게 진노하여 그 종을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마. 18:32-33)라고 질책하며,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넘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말씀을 마무리하시면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주님께서 도전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 받기 위해서는, 먼저 너희가 남을 용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는 것입니까? 지금 주님의 교훈의 요지는 그것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 ‘악한 종’의 비유에서 진정으로 도전하고 격려하는 것은 ‘깨닫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를 얼마나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내여 주심으로 너를 값주고 구원하셨는데, 너는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지극히 작은 형제와 자매의 허물과 약점을 품어주고 용서해 줄 수 없느냐!?’고 도전하시고, ‘왜 그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에 넘치는 사랑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라고 말씀하신 것도 마찬가지로, ‘만약 너희가 먼저 서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라는 겁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안다. 너희 힘과 의지로는 결코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너희가 어떻게 하여 긍휼에 넘치시는 아버지의 구원의 은혜를 진정 누리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너희는 결코 <갚을 길 없는 크나 큰 빚을 탕감한 선한 주인의 은혜를 악으로 갚는 종>과 같이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고 말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도전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 입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나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해하고 있는지를? 진정으로 나는 그 긍휼에 넘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받은 구원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지를? 만약 여러분과 제가 그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각자를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구원받은 것이 맞는지를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와 은혜에 빚진 자라면, 우리는 진정 감사와 기쁨으로 비록 완전하시는 않을지라도, 그리고 부족할지라도 긍휼한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아들과 딸로 살아가길 힘쓰고 추구할 것’입니다. 벌이 무섭고,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그 아버지의 아름다우심을 닮고자 하는 감격과 거룩한 욕망으로 인해서 입니다. 바로 철든 자녀로서 말입니다.

셋째, “말씀의 인도와 성령충만으로 행함”으로써 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긍휼’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살펴볼 것인데, 이것은 사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긍휼’의 출발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고, 먼저 하나님께 받은 그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긍휼에 넘치는 은혜를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누려 나갈 수 있다면, 이제 우리 각자는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 오히려 어렵지 않고 쉽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긍휼의 원인과 이유 그리고 그 놀라운 결과를 내가 삶을 경험하고 또 계속해서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무엇보다도 날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함으로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 되고, 내 길에 빛이 되도록’ (시. 119:105) 그 말씀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맡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할 때 세상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고, 오직 성령 말씀을 통해 생명을 살리시는 긍휼에 넘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는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자랑과 자아를 내려 놓고, 상처와 아픔을 치유 받고, 하나님의 긍휼을 놀랍게 배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긍휼’을 행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우리는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보면, 마지막 죽어가며 동일한 기도를 드린 두 인물이 있습니다. 그 한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가운데 자신을 목 박고, 침 뱉고, 욕하고 저주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 아버지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 하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자기 몸을 바쳐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 다운 긍휼에 넘치는 놀라운 용서의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용서의 기도를 한 인물이 또 한 명 더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유대인들이 목이 곧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했음을 한편의 설교를 통해 강력하게 고발했을 때, 그들은 이를 갈며 스데반을 돌로 쳐 죽었습니다. 성경에는 그 당시 상황을 ‘스데반의 죽어가는 얼굴이 두려움과 고통에 일그러졌다고 기록하지 않고,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충격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어가면서 천사와 같이 밝고 거룩하게 빛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스데반은 이렇게 하나님께 이런 마지막 기도를 올릴수 있었을까요?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라고 말입니다.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인간으로서 스데반은 어떻게 이처럼 놀라운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용서의 기도를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지막 순교하는 그 순간에 성령께서 충만하신 능력과 은혜로써 그를 지켜 주시고, 능력 주심으로 ‘그 용서와 긍휼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이웃을 향한 긍훌이 여기는 삶은 오직 성령의 열매임을 저는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챤이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요, 천국시민임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임을 믿습니다. 어떻게 드러난 행위를 통해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칭찬을 받을 것인가가 아니라, 이전에 세상이 줄 수도 모방할 수도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풍성하신 자비와 긍휼하심’을 닮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깨우쳐 주심과 성령의 충만하신 감동으로 아버지의 그 인격을 더욱 닮아가는 그분의 자녀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 6:36)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서 말입니다. 이러할 때, 내 육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했던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 주었던’ 그 누군가를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됨으로, 날마다 여러분을 긍휼히 여겨 주시는 아버지의 은혜를 넘치게 누리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