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하는 자마다” (Anyone Who Is Anger)
“노하는 자마다”
(Anyone Who Is Anger)
3-16-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21~22
21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urder, and anyone who murders will be subject to judgment.’)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설교 요약]
우리가 지난시간 <산상수훈>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시면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v.17)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물론 주님의 ‘율법을 완전케 한다’는 뜻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심’이겠지만, 또한 그 의미는 ‘유대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왜곡되어버린 율법의 정신을 올바로 깨우쳐 주심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율법의 참된 가르침인지?’를 주님은 오늘 말씀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v.21)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말씀을 ‘누가 말한 것 (=가르친 것)인지를 환기시키십니다. 그들은 그 당시 성경교사로 여겨졌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제기하시는 문제점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곧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율법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의 구체적인 예로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언급하십니다. 바로 <십계명>의 제 6계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전하시는 핵심은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미워하고 화를 내는 것도 동일한 심판을 받는 것’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님의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율법준수는 심령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외모나 행위 이전에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살인은 그 출발이, 우리의 내면에서, 그 심령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둘째, “분노와 살인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5) 라고 사도 요한은 말입니다.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하시면서, ‘형제에게 노하는 것’이 ‘형제를 죽이는 것’과 동일한 죄악임을 밝히십니다.
셋째, “온전한 율법준수는 형제를 사랑함이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노하지 말라>는 율법의 정신인가?’하는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롬. 13:8)는 말씀과 같이, 율법의 정신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몰아내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유대종교지도자와 같은 굳은 마음이 아니라, 겸손하고 말씀을 간절히 사모함으로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선하신 율법의 깊은 뜻을 깨닫고 순종해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지난시간 살펴보았듯이, <산상수훈>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시면서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율법을 폐하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완전케 하려 왔다’고 선언하심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주께서 ‘율법을 온전케 하신다’는 그 의미에 대해서, 그것은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다’는 뜻이요, ‘율법준수는 먼저 우리의 내면에서 시작되어야’하고, 이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완성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 자신임’을 주님의 선언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말씀을 포함한 <21절>에서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인데, 그 주제는 “노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팔복의 말씀’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오늘 주님의 ‘노하지 말라’는 주제의 말씀도 갑작스럽게 불거져 나온 엉뚱한 말씀이 아니라, 앞선 말씀과 연결되고 더욱 구체화되어지는 논리 정연하고도 질서 있게 전개되어지는 말씀임을 우리는 주의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더욱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주께서 ‘분노하지 말 것’에 대한 말씀 속에 있는 놀라운 진리와 가르침을 더욱 이해해 나감으로 우리의 육신의 소욕과 분노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진리로 자유케 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v.21)라고. 그런데 먼저 여기서 “옛사람에게 말한 바” (it was said by them of old time)라는 주님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점에 대해 <로이드 존스>목사가 본문을 강해설교 하면서 잘 해석하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단순히 모세의 율법을 말씀하고 계신가, 아니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계신가?”라고 질문하고 나서, 그는 “저는 <둘째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그는 다시 설명하는데 “주님께서 여기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만든 율법에 대한 거짓된 주장과 대조해서 <율법의 참 교훈>을 말씀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가르침의 큰 특징들의 하나는 항상 조상들의 글을 인용한다는 것입니다”라고.
그런데 이와 같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항상 조상들의 글을 인용했다’라는 로이드 존스의 기적이 의미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다 백성 가운데 ‘유대종교지도자’이자 ‘성경교사 (랍비)’로 불렸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는데, 특별히 예수님 당시 이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소수의 종교지도자들 만이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의 말씀’을 맡아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대략 600년전에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히브리말>을 잊어버리게 되고 포로기간동안 <아람어>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이후 예수님 당시까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사용함으로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된 모세와 선지자들의 율법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백성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모든 율법지식을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배하던 중세시대에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성경말씀’은 주어지지 않은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세시대에 소수의 성직자들만이 성경을 독점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이 성경말씀이 그 당시 ‘헬라어’로 쓰여 있어서 헬라어를 배운 성직자들을 제외한 일반 성도들은 성경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예수님 당시의 유대민족과 유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때 카톡릭교회 성직자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례’를 믿어야 하고, 카톨릭 교회와 사제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식의 전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행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에 대해 <오직 성경> (Sola Scriptura)라는 케치플레이어를 내걸고 새롭게 종교개혁에 불을 붙인 개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진정한 성경말씀으로만 우리의 믿음이 세워져야 한다’는 강력한 영적 깨닫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그 뜻을 올바로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제가 제차 강조할 필요조차 없는데, 문제는 우리 성도와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바리새인과 서기관’, 혹은 ‘천주교사제’가 끼어서 진리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점을 강력히 도전하시고, 문제제기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도전하시고 나서 그들의 가르침의 실제적인 문제점을 언급하십니다. 먼저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될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v. 21~22a)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께서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가르쳤다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심판을 받게 된다’라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가르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사형에 처해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출. 21:12). 요즘으로 말하면, ‘형법’의 기준에 따라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살인’에 관련한 말씀에 대해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오해하고 왜곡되게 가르쳤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살인’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된 말씀을 살펴본다면, 그 말씀을 <출애굽기 20장>입니다. 바로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두 돌판에 새겨 주신 <10계명>의 말씀 가운데 <제 6계명>이 그것입니다. “살인하지 말찌니라” (출. 20:13)라고. 여기에는 더 이상 구체적으로 ‘만약 살인하게 되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출애굽기 21장>에서 하나님은 ‘살인’에 대한 더 구체적인 형벌로서 <12절>에서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출. 21:1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예외조항’을 두셨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이런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헤친 경우라고 하더라도, 비록 드문 경우라 할찌라도 누군가가 고의가 없이 우발적으로 사람을 헤치게 되었을 때는 한 곳 (도피성)을 예비해서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율법을 통해 생명을 건져 주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제가 언급했듯이,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대표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의 말씀을 어떻게 오해하고, 또한 그릇되게 백성들에게 가르쳤는지? 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담긴 뜻일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도전하시는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예수님의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율법준수는 심령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저는 이미 지난 시간에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 (마. 23:23)고 주님은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삶과 믿음을 고발하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단지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무시하고 하찮게 보는 행위를 실제로 그 형제를 살인하는 자가 받는 사형에 준하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으로 준엄하게 도전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도 더 심각하고 큰 문제는 우리 인간의 ‘내면적인 상태’라는 것입니다. 마치 남극 바다에서 밖으로 드러난 빙산은 사실 그 바다 밑에 잠겨 있는 거대한 얼음덩어리의 실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전체 중에서 지극히 작은 일부분을 표현할 때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도 거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많은 경우, 우리 인간의 삶의 모습에 있어서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내면에서 행해지는 생각과 영적 상태의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간의 내면과 영적 상태를 늘 민감히 다루고 살피는 성경은 언제나 우리의 내면을 드러내시고, 심각하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우리 인간의 내면상태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시는지에 대한 여러 말씀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무엘서>의 말씀은 그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자주 자주 사람의 외모와 조건과 드러난 행동을 보고 판단하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중심 곧 ‘마음의 동기와 진심’을 꿰뚫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완악함을 고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5)라고.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율법준수의 동기가 단지 밖으로 사람 앞에서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주님은 강하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눈에서부터 그 행한 율법의 준수가 옳다고 인정함을 받지 못할 때 그것은 도리어 거짓이요, 위선이 된다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형제를 살인한 것과 진배없다고 하나님의 율법은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분노와 살인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살인죄에 대해 가르쳤는지’ 언급하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v. 22) 라고. 여기서 <라가>라는 말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아람어’로서 ‘멍청한 혹은 미련한 놈’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형제를 향해 <멍청한 놈>이라고 말로 하든지, 아니면 마음 속으로 하든지, 욕하고 미워하는 자는 그 죄가 매우 엄중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를 실제로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으로 그 형제를 미워하고 얕보고 업신여기는 그것 자체가 ‘지옥 불’ 곧 ‘사형’에 해당하는 형제를 죽이는 행위라고 평가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점을 영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말씀이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5)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선언합니다. 정확히 주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욱 심각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만약 당신이 형제를 미워한다면, 이것은 당신속에 영생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요한은 우리를 도전합니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주장하기를 <만약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면, 형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연약함으로 잠시 형제를 미워하고 화낼 수는 있을찌라도 결코 지속적으로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 (요일. 3:14) 이고, ‘우리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 (요일. 4:20) 입니다. 그럼으로 율법의 실천은 결코 외적준수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형제를 미워하고 화내는 것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끔찍한 악으로 하나님은 바라보시는 것’임을 주님은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분노와 미워함’이 가진 이 엄청난 해악을 이해하십니까?
셋째, “온전한 율법준수는 형제를 사랑함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제 한가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어떻게 나타내시고 있느냐? 는 점입니다. 먼저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옛사람에게 말한 바”라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율법을 잘못 오해하고 왜곡되게 가르쳤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놀라운 말씀의 권세와 주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유대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단순히 율법을 인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스스로의 말씀의 권위’로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점이 주께서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마치셨을 때 그 말씀을 들은 모든 유대백성들이 그 말씀의 권세와 능력에 놀랐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저자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산상수훈)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 7:28-29)라고 말입니다.
이제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해 나가면서, 성도 여러분과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주님은 <팔복>의 말씀을 마무리하시고, 새로운 국면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시작하시면서 <천국시민의 의로운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율법의 말씀을 온전히 행하여 지키는 것’으로 가르쳐 주셨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v. 19)고 말입니다. 문제는 구약의 율법을 맡아서 가르친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엉뚱하게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엉터리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이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럼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가르침은 정말 ‘형제를 살해’하는 끔찍한 죄악 뿐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고 깔보고 성질부리는 우리의 사랑 없음까지’를 모두 포함하여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안된다고 하시는 엄중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의 정신이요, 이것이 ‘형제를 사랑함으로 율법을 완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8)고 선언했듯이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형제를 그리고 자매를 용납하십니까?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부족함을 힘들지라도 품어 줌으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해 나가고 있으십니까?
성도 여러분, 시편기자는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시. 119:9-10)라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시인이 깨닫은 <18절>말씀입니다. 곧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열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율법의 놀라운 진리를 더욱 깨닫게 될 때, 말씀을 더욱 더 사랑하고 그 계명에서 떠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굳은 마음으로 율법의 잘못 이해하고 그릇되게 전하는 자가 아니라, 주의 영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의 온전하심과 깊은 뜻을 날마다 겸손함과 순종가운데 깨닫아 나감으로 생명의 넘치는 기쁨을 누리고,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별같이 빛나는 천국시민 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