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9, 2025

“마음이 청결한 자” (One Who Are The Pure in Heart)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5:8
Service Type:

“마음이 청결한 자”

(One Who Are The Pure in Heart)

2-9-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8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주님의 여섯번째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소중히 여기는 <탈무드>에 보면, “눈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마음이 보이지 않는 쪽이 더 두렵다”라고 마음의 중요성을 피력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대해 무엇이라고 평가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예레미아를 통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 17:9)라고 선언하십니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 모든 인간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함으로 ‘타락된 죄’ 곧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유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과연 누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일까요?그는

  • 마음이 정직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시며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간사함이 없는 마음’이 정직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 당시 위선적인 삶으로 예수님께 심한 책망을 받았던 바리새인들과 반대로,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께 정직한 자가 ‘마음이 청결한 자’일 것입니다.
  •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자”입니다: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1:6~8)라고 성도들을 도전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서 두 마음 품는 자가 아니라, 여호수아처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한분만을 택하는 사람입니다 (수. 24:14~15).
  • 영적 갈망이 있는 자”입니다: 사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v. 8)라는 주님의 말씀은 매우 어렵고 심오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눈으로 본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요.1:18).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우리의 영으로 깨닫고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을 본다’는 말씀의 핵심임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청결한 마음 가운데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맛보고, 그분의 거룩하신 얼굴을 보게 되는 은혜의 삶 살아 가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주님의 여섯번째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의 마음은 청결하고 깨끗하십니까? 바라기는 깨끗한 마음 가운데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다’라든지, 그 반대로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다’ 혹은 ‘마음이 혼탁하다’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저는 먼저 주님께서 말씀하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한 자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마음>에 관련한 <금언/명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드 코사드>는 “내 마음 외에 바꾸여야 할 것은 없다”라고 했고, <존 러스킨>은 “내 자신이 어두우면 동시에 세상이 모두 어둡다. 내 마음의 눈을 뜨게 하라 그러면 길을 열어 줄 것이다”고 했습니다. 한편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너의 내면을 살펴보라. 마음 속에는 착한 마음의 샘이 있다. 그 샘은 아무리 길어내어도 결코 마르지 않는다”고 했으며, <그리시안>은 “눈동자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라. 눈은 마음의 창이다”고 말했으며, <탈무드>에서는 “눈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마음이 보이지 않는 쪽이 더 두렵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펴봤듯이, 우리 인간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다양한 시각과 관점에서 평가되고 있지만, 한가지 이들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인간의 마음’은 우리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그 사람의 마음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그 사람의 존재가 결정된다’라고 말해도 저는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 외에 바꾸여야 할 것은 없다”는 <드 코사드>의 말이나, “눈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마음이 보이지 않는 쪽이 더 두렵다”는 <탈무드>의 지적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있어서 이렇듯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여러분도 충분히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마음’에 대한 ‘부정적 사실’ (bad news)을 인식하는데서 이 마음의 이해는 출발할 수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성경’에서 우리 인간의 마음상태가 어떤지를 이렇게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 17:9-10)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계십니다. 어떤 특별히 사악한 인간이나, 극소수의 엽기적인 살인마와 같은 자 몇 명의 경우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히도 성경은 우리 모든 인간이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졌다고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 속에서 비롯된 것 중 하나가 지난 시간 ‘긍휼한 자’에게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인간은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존재가 아니라, 잔인하고 왕따시키고 괴롭히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은 이런 나쁜 마음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우리 모든 인간은 그런 나쁜 마음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그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왜 우리인간은 이런 악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짧게 결론만 말하면, 성도 여러분 대부분 잘 알고 있듯이 ‘첫 인간 부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한 그 죄가 모든 후손들에게 유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손가운데 저와 여러분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모두 첫 인간부부의 범죄로 인하여 그 ‘타락된 마음’ (존재/ DNA/ 본성/ 성품)을 유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런 ‘인간 마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듣는다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참된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가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도 없지만, ‘내 안에 존재하고 나를 강력히 컨트롤하는 마음의 실체’를 분명히 이해하게 될 때, 주께서 격려하시고 도전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는 축복된 삶으로 우리는 점점 더 나아가게 될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주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과연 누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일까요?그는 무엇보다도

         첫째, “마음이 정직한 자”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 그를 제자 삼으시면서 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라고. 주님은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그를 칭찬하십니다. 비록 현실적으로 볼 때는 그를 처음 만났을지라도, 주님의 신적 권능으로 이미 그를 잘 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거짓이 없이 정직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인격이 신실하고, 고결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그러나 이 ‘간사하지 않다’는 말씀은 언제나 ‘거짓이 없는 정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 당시 ‘참 이스라엘사람’ 혹은 ‘마음에 간사가 없는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전혀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아 감으로 주님께 강한 책망과 도전을 받은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굴까요? 그들은 흔히 ‘유대종교지도자들’라고 불렸던 ‘바리새인들’를 비롯하여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이해하기에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할 때 ‘위선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위선’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겉과 속이 서로 다른 것’인데, 이 <다르다>는 것은 결국 <정직하지 않음에서 출발하는 불일치>를 의미합니다. 이런 부정직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함’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내가 나에게 정직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살펴볼 때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가 나를 속이는 상태’ 곧 ‘자기기만’의 상태가 지속되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할 수 없고, 결국 거짓된 허상이 곧 ‘나’라고 스스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속이는 정신적 늪에 빠지게 되면, 결코 ‘이웃’에 대해 정직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더욱 정직하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v. 8)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 출발이 이미 주께서 앞절에서 도전하시는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빈 마음’ 가운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있는 죄의 거짓된 덩어리를 보고 가슴 아파하고, 내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먼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바라볼 준비가 된 사람일 것입니다.

         둘째,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젖 동생,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그 마음에 정함이 없이 늘 흔들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두 주인을 섬기는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도전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1:6~8)라고 말입니다. 교회에 오면 매우 신앙적인데 (경건한데), 교회 문만 나서면 완전히 세상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크리스챤도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옳은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의 가치관과 가르침도 내게 득이 된다면 따르겠다는 크리스챤도 드물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실용적인 것 같고, 신앙의 중용을 취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두 마음>을 품은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 내일은 세상에 발을 담그고 정함이 없이 ‘무언가 내게 더 좋을 것 같은 것’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돌아서서 그곳에 마음을 의지해 보려 하지만, 이런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의 삶에서는 안타깝게도 안식이 없습니다. 늘 불안과 염려와 갈등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한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 한분에게만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뿌리 내리지 못하는 인생은 진정한 심령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늘 작은 풍랑에도 흔들리는 돛단배 (조각배)처럼 흔들리며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두 마음 품지 않고,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주 <큐티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이제 그의 긴 인생 여정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눈 앞에 두면서, 자신의 결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정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4~15)라고. 이와 같은 여호수아의 분명히 결단하는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기웃거리며 ‘두 마음 품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택한 ‘정한 마음’이요, 이 마음이 ‘청결한 마음’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셋째, “영적 갈망이 있는 자”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료를 살펴보는 중에, 여러 설교자들이 오늘 본문말씀을 강해 설교하면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주님의 오늘 말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v. 8)라는 말씀은 성경 중에서도 가장 설교하기 힘든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라고 했는데, 저 자신도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주께서 말씀하신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v. 8b)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있어서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과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데 있어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그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신.구약 성경>말씀 모두에서 한결같이 ‘우리 범죄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죄를 유전 받은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살아남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성전 제단 앞에서 제사 드리는 중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크게 소리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라고 말입니다. 왜 이사야는 “망하게 되었도다” 곧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를 물려받은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망하는 것’ 곧 ‘죽음’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특별한 예외적인 은혜로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죽지 않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는 차원의 ‘하나님을 본다’는 뜻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인데,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본질은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시는 외아들이 그분을 알리셨다” (요. 1:18/ 현대인의 성경)고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주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우리 인간이 영적으로 깨닫는 놀랍고 심오한 경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 연약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영적으로 깨닫고 경험하는 그 놀라운 경험’인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에서 가능하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한 가지 사례가 <역대하>에 나와 있습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의 수많은 연합군이 합세하여 유다왕 여호사밧을 치고자 나아왔을 때, 그는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자신은 예루살렘 성전 뜰 앞에 나아가 회중 가운데 서서 이렇게 간절히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대하. 20:12)라고 말입니다. 이런 왕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시고, 왕과 유다 백성들에게 은혜 베푸셔서 암몬과 모압 연합군이 서로 싸움이 붙어서 피차 죽이고 지리멸렬하여 패배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주의 권능으로서 말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v. 8)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하여 전심으로 하나님 한분만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영광과 승리를 베푸심으로 그의 크신 은혜를 누리고, 영의 눈을 열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는 심오한 영적 경험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주님의 팔복 가운데 오늘 말씀 ‘마음이 청결한 자’가 왜 복된지에 대한 역설을 보게 됩니다. 제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리게 되는 복’이 역설적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방금 살펴 보았듯이 ‘여호사밧’ 왕이 절대절명의 위기상황 가운데서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분의 얼굴보기를 갈망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백성들을 만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결롸적으로, 여호사밧을 비롯한 이스라엘민족의 대위기는 이 위기와 고난이 계기가 되어, 도리어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그분을 간절히 추구하는 전환점을 맞이가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넘치게 누리는 역설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역설이 의인 욥이 겪었던 그 수많은 고난의 시간을 지난 후 비로소 이렇게 고백한 이유일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라고.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가 현재 당하는 알 수 없는 인생의 아픔과 고난은 우리 각자를 정금과 같이 연단함으로 장차 깨끗한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복된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하심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깨끗합니까? 먼저, 정직하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두마음 품지 않고, 더 나아가 인생의 고난과 아픔 가운데 좌절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깨끗한 심령으로 살아 가십니까?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청결한 마음 가운데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맛보고, 그분의 거룩하신 얼굴을 보게 되는 이런 축복된 인생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