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하지 말찌라” (Do Not Swear An Oath)
“맹세하지 말찌라”
(Do Not Swear An Oath)
3-30-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33~37
33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Again,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break your oath, but fulfill to the Lord the vows your have made.’)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But I tell you, do not swear an oath at all: either by heaven, for it is God’s throne;)
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or by the earth, for it is His footstool;)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 (All you need to say is simply ‘Yes’ or ‘No’; anything beyond this comes from the evil one.”)
[설교 요약]
주님은 오늘 맹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주님께서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러 이 땅에 왔다’는 뜻이 무엇이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형제에 대해 노하는 자마다 살인’했으며,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음을 주님은 그 율법의 정신을 통해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v. 33-34a)라고 도전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맹세하지 말찌니”라고 명하시는 것은 먼저 그 당시 유대사회의 부정직성과 헛된 맹세가 얼마나 횡행함을 도전하시고, 깨우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교 선생이라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잘못된 율법이해와 영적 무지로 인해 그릇되게 백성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들은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마. 23:16)라고 어리석게 백성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주님은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 23:17)라고 그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주님의 맹세에 대한 가르침일까요?” 그것은
첫째, “정직한 인격”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맹세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과 우리 인간 속에 여전히 숨쉬는 창조자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이해한다면 (v. 34~36), 그 어떤 이름으로도 거짓맹세 하지 않는 하나님 자녀의 <정직성> (integrity)을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정직의 능력”입니다: 크리스찬의 정직성은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v. 37)고 말할 수 있는 <간결함> (simplicity)과, ‘참된 것을 말하며 서로를 지켜’주는 <책임감> (responsibility), 그리고 ‘사랑으로 참고 인내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사려깊음> (sensibility)이라는 능력이 있습니다.
셋째, “어떻게 정직한 자가 될 것인가?”입니다: 주님의 맹세애 대한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을 좇아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천국시민이 되어 나의 능력과 뜻에 의지하지 않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는 (시. 51:10) 하나님 아버지께 구함으로써 날마다 온전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마. 5:48).
신실하신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성실하심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빛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특권과 영광을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주님은 오늘 맹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주님은 율법의 정신을 가르쳐 주시며,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였다’고 도전하시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의 겉모습 뿐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드러난 행위보다는 우리의 마음과 동기를 더욱 살피시고, 은밀하게 버리지 못하는 죄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이어서 ‘맹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v. 34)라고 말입니다. 오늘 주님의 이와 같은 ‘맹세’에 관련한 가르침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함께 깨닫아 나가며, 올바른 천국시민의 성품으로 더욱 자라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말 그대로 ‘맹세’ 곧 ‘심각한 서약’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v. 33-34a)라고.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이해해야 하는 사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맹세’하는 것이 상당히 흔하게 행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의 맹세는 제가 방금 말씀드렸듯이 말 그대로 심각한 의미의 ‘맹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행하는 맹세’가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보면 <민수기> ‘30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민. 30:2)라고 말입니다. 한번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함으로 맹세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성경에서 경솔하고 어리석은 맹세로 인하여 참으로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 대표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입다의 딸이 번제물>로 죽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사였던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전투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주께서 과연 암몬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먼저) 영접하는 그를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삿. 11:30-31)라고 어리석은 맹세를 함으로, 그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영접한 자신의 무남독녀 외딸을 결국 번제로 드린 불행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원한다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두렵고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유대인들은 습관적으로 ‘맹세’를 서로 간에 행했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그만큼 이 당시 유대사회가 서로를 불신하고, 믿지 못하는 사회였음을 이 흔한 맹세로써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v. 34~36)라고 예수님은 이렇게 유대인들의 맹세에 대해 도전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도전의 배후에는 이들이 행했던 맹세는 주로 ‘하늘’ ‘땅’ ‘예루살렘’ 혹은 ‘자신의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식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만약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았을 때 미치게 될 재앙 (저주)이 클 것인지를 잘 알았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과 ‘자기자신’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덜 부담스럽게 맹세한다는 것이겠죠? 적당히 거짓말하고, 남을 속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책임 못질 맹세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거짓된 맹세’를 남발하고, ‘헛된 맹세’를 생활화한 것이 이 당시 유대인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선생이라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마. 23:16)라고 어리석은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그들의 모순과 영적 어리석음을 깨우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 23:17)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결국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라)” (마. 23:21)고 밝히시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진리 아닙니까? 그것이 성전이든, 하늘이든 땅이든 예루살렘이든 자기 자신이든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맹세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유대백성들을 향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v. 34)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계속해서 주께서 밝히시는 ‘맹세’에 속한 율법의 정신은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살펴볼 때 무엇보다도 이런 ‘맹세’에 대한 대표적인 명령은 <십계명>의 ‘제3계명’으로서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라고. 이러한 ‘제3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하는 헛된 맹세’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명령의 더 깊은 본질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의 정직성과 통합성’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영광과 존귀를 올려 드리는 성도의 삶은 단순히 거짓 맹세하지 않고, 속이지 않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분을 믿는 자녀 자신의 한결 같은 삶의 진실성과 안과 밖이 통하는 성실한 삶 가운데 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께서 오늘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도전의 말씀은 단순히 ‘맹세’를 하라 말라는 것에 있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우리 성도들은 인생과 신앙의 중요한 순간에 맹세 혹은 서약으로 우리의 중심을 고백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로 신앙고백할 때 ‘이 침례의식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을 침례를 통해 서약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가 결혼할 때도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한 충성과 순결을 죽는 날까지 지킬 것’을 하나님 앞에서 <결혼서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신앙과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오늘날도 여전히 맹세로 우리의 믿음과 진실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고 있으며, 이런 중심의 고백을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 드리거니와 여기서 주께서 도전하시는 것은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팽배한 ‘맹세의 허구성’을 고발하고 도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볼 때, 인류역사상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유대민족만큼 하나님의 율법 (말씀/명령)으로 강력히 다스려지고 지배되는 사회가 없었지만, 그 내면에서는 비뚫어진 영성과 잘못된 율법에 대한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그분의 영광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말씀을 살펴보면,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 하시나이다” (시. 5:4~6)라고. 또한 ‘잠언’에는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잠. 12:22)라고 밝히고,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서 3:18)라고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의 행함과 진실함을 도전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선하신 하나님은 혀끝으로만 하는 형식적인 사랑에 속아 넘어가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진실되게 사랑을 행하고,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정직하고 성실한 인격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 삶을 통해 참으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오늘 이 ‘맹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고 2,000여년이 지난 지금, 어쩌면 우리의 사회는 유대인 사회보다도 더욱 영적으로 혼탁하고 거짓을 사랑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한다면 제가 지나친 것일까요?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해 나가면서, 주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v. 34)라고 하시고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v. 37)고 말씀하시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주님의 맹세에 대한 가르침일까요?” 그것은
첫째, “정직한 인격”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맹세하지 말라’는 것 자체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당시 책임감 없고 헛된 맹세의 남발을 주님은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성이나 자신의 머리를 두고 맹세했지만, 이것 역시 그 이름으로 우리가 책임질 수도 없는 것이고, 그 모든 곳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스며 있기에 함부로 그것을 근거로 맹세해서도 안된다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v. 34~36)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께서 도전하시는 핵심은 맹세 자체가 아니라, 맹세나 약속과 아무리 사소한 말이라 할찌라도, 그렇게 말하는 우리 자신의 <정직한 인격>을 걸고 하는 것임을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 성도의 ‘정직성’ (integrity) (혹은 성실성)은 우리를 구원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성품인 진실하심에서 기초하는 것이기에 우리 인격에 있어서 두말할 나위도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 7:10)고 다윗은 선포했고, 정직한 자와 함께 하시는 주의 은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공기와 물’처럼 흔하지만, 없으면 크리스챤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정직의 중요성을 놓치거나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정직의 능력”입니다: 먼저 정직성은 <간결함>을 특성으로 합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라고 말씀하시고,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 (v. 37)라고 듣는 자들에게 도전하십니다. 물론 세상은 언제나 ‘흑백논리’로 정해지지 않고, 보다 복잡다단한 상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도 많음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사이의 관계성과 신뢰성은 ‘복잡함’이 아니라 ‘단순함’과 ‘간결함’ 속에서 더 깊이 확인되고 증명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관계가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것은 적지 않은 경우에 뭔가를 감추거나 부풀리거나 줄이고자 하는 거짓과 부정직이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직에서 비롯된 단순함이 진정한 신뢰의 관계를 이룹니다.
한편, 정직성은 <책임감>을 가집니다. 정직한 것은 좋은데, 그 정직으로 상대를 상처주고 넘어지게 한다면 도리어 침묵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리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엡. 4:24-25)고 격려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정직하고 참된 말을 하는 동기는 서로를 세우고 섬기고자 함입니다. 서로를 향한 섬김과 지켜주는 책임감이 정직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직성은 <사려깊음>을 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고 선언합니다. 아무리 천사와 같은 진실한 말이나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말이라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함께 <치유상담>에 관련한 어느 강사의 말 가운데 <가장 조심해야 하는 말은 ‘바른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맞는 말을 하더라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의 말은 그 누구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그 말에 상처받고, 그로 인해 서로의 관계가 깨어지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 25:11)는 잠언의 말씀과 같이 정직한 성도의 삶의 태도는 결국 합당한 말고 행동을 통해 지혜롭게 지체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길 때, 상처받고 죽어가는 이웃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에서 비롯된 사려 깊음과 지혜로서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정직한 삶 가운데 가족과 이웃을 함께 세워 나가고 섬기고 있습니까?
셋째, “어떻게 정직한 자가 될 것인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를 기뻐하시고, 그와 함께 하심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 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 11:7)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정직하고 진실한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질문이 정직을 향한 가장 힘있는 첫걸음이 아닐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여러분과 저를 살리신 그 은혜를 깨닫음으로 더 이상 내 자신의 능력과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성실하고 정직하신 온전한 인격으로 변화되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며,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여러분을 그 선하고 진실하신 형상으로 빗어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고자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예수 믿었으니 나는 구원받았고 의롭다’가 아니라, 날마다 주의 영, 성령의 은혜로 나를 주의 은혜에 머물수 있도록, 그리고 정직하고 순결한 주의 인격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자신의 죄악 가운데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라고 겸손하고도 간절히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 날마다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허세부리지 않고, 있는 것을 없다고 속이지도 않고, 진실함과 성실함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과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손해 볼찌라도, 잠시 곤한 상황이 오더라도 정직을 붙들고 나아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에게 이렇게 도전하시고 격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라고.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엄청난 도전의 말씀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실수하고 넘어지는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 하심처럼 온전할 수 있을까요? 우리 말에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선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거룩하심을 따라 행할 수 있는 첫걸음은 ‘정직’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주님은 오늘 도전하심을 저는 믿습니다.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정직’은 나의 노력과 의지 이전에 전적인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함께 하심을 신뢰하는 가운데 실천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백성을 향해 모세가 선언했듯이,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신. 31:6)는 것입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날마다 그분의 정직과 성실하심을 그리고 온전하심과 거룩을 따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해 나감으로 빛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특권과 영광을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