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 2025

“세상의 빛과 소금” (The Lord & Salt of The World)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5:13~15
Service Type:

“세상의 빛과 소금”

(The Light & Salt of The World)

3-2-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13~15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팔복을 함께 살펴보았고, 계속해서 <마태복음 5장>의 주님의 <산상수훈>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살펴본 ‘팔복’ (the Beatitudes)의 주제가 “천국시민의 인격적이요 영적 특성”이라면, 이어지는 오늘말씀은 ‘이런 팔복의 성품을 소유한 천국시민이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와 영향력’이 그 주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천국 시민된 성도들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소금이라”부르시는 것입니다.

먼저 <빛>은 “어둠을 밝히는 광채”인데, 성경에서는 ‘진리’ ‘생명’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빛’ (요일. 1:5)이시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의 빛’ (요. 1:4,5)라고 밝힙니다.

또한 <소금>은 “짠맛을 내는 물질”로서, 음식의 맛을 낼 뿐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주께서 오늘 도전하시듯이 어떻게 우리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수 있을까요?그것은

첫째, “소금의 짠맛을 유지함”으로서 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v.13) 소금의 짠맛으로 부패를 방지하듯, 우리 성도들도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과 사회의 썩어져 가는 죄악을 주의 생명과 말씀으로 막는 것입니다.

둘째, “빛을 드러냄으로써”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v. 14) 고 선언하시는데, 이것이 ‘이사야’서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사. 60:1)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땅바닥에 두지 않고, 높은 등잔대에 두어 비추듯’ (v. 15),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굳세게 일어나 비출 때 어둠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함으로써”입니다: 주님은 이어지는 <16절>에서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v. 16)고 말씀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빛과 소금의 삶을 감당해야 하는 근본목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함’입니다.

바라기는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그리고 죄악의 썩어짐을 방지하는 소금으로 쓰임 받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주님의 팔복을 함께 묵상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어지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오늘 설교제목과 같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소금(이라)”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기도할 때, 그리고 서로를 축복할 때 서로를 향해 수없이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해 달라고 구했음을 여러분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소금(이라)”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달음으로 우리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남은 삶이 진실로 세상의 빛과 소금되는 복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 하시는 시간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아 주님의 <팔복>의 말씀으로 그동안 함께 은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팔복’의 말씀은 한마디로 ‘천국시민’된 성도가 지녀야 할 <인격과 특성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말씀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팔복의 성품을 소유한 천국백성된 성도들이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와 그 영향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주님은 분명히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그 영향력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빛’이라는 단어와, ‘소금’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빛>은 성경에서 ‘진리’와 ‘생명’을 의미하며,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빛’이심을 성경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고 말입니다. 그럼으로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 구원받는 성도들을 ‘빛의 자녀’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셔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기에 그분의 자녀된 우리도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 믿는 자들을 ‘세상의 빛’이라 혹은 ‘빛의 자녀’라고 강조해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이 그만큼 어둡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요한복음이 시작하는 <요. 1장>에서 보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저자 요한은 소개하면서 그분의 본질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4,5)고.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신 빛’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빛의 본질’은 그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빛’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조에)>이 ‘빛’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빛 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은 그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달>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고, 아니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그 빛으로 인해 실제로 작지만 <빛을 발하는 존재> 즉 <영적 발광체>임을 저는 믿습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되신 생명으로 인해 발광체가 되기 떄문인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놀라운 우리 성도의 특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 어두움이었지만,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하여 이제는 어두운 세상을 비취는 빛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성도들에게 권하듯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께서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우리를 도전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v. 14-15) 라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주목하는 것은 ‘너희는 빛을 비춰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우리가 이미 빛을 비추고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내가 만약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그 빛되신 생명을 소유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빛을 발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은 빛으로 드러나고, 비췰 수 밖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주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한편, ‘소금’은 무엇을 뜻할까요? 고대사회에서 볼 때 ‘소금’의 중요성은 지금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소금은 아주 귀한 상품이었는데, 역사문헌에 보면, ‘소금’이 오늘날의 ‘화폐’의 대용으로 쓰여지기도 하고, 한편 ‘노동임금’을 소금으로 지불하기도 했던 사례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인의 글귀에 보면, “태양과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라는 표현도 쓰여질 만큼 소금은 고대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유용한 물품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소금’이 행하는 기능 (역할)일까요? 그 대표적인 기능은 첫째, <맛을 내는 기능> 입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완전식품’의 하나인 계란은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의 하나이지만, 만약 여러분이 그 계란을 삶든지, 찌든지 혹은 후라이를 하든 요리를 해서 아무런 소금도 첨가하지 않고 먹는다면, 아마도 그 계란 요리는 가장 맛없고 먹기 힘든 음식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결정적인 조미료인 것입니다. 바로 소금이 가진 ‘짠 맛의 성분’때문일 것입니다.

둘째, ‘소금은 부패를 방치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내는 기능과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은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인 것입니다. 한국의 경북 ‘안동’지방은 ‘정통민속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하회마을’로도 유명하지만, 또한 ‘안동 간 고등어’로도 유명합니다. 안동은 지정학적으로 바다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이다 보니, 자연히 신선한 생선을 먹기가 쉽지 않은터라 생선을 굵은 소금으로 간을 해서 보관하는 저장법, ‘염장법’이 잘 계발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안동지방에서는 냉장고가 없던 수백 년 전부터 이렇게 생선들의 부패를 방지하면서, 최대한 오랫동안 맛있고 신선하게 먹을 수 있도록 생선의 간을 해서 보관했는데 그 대표적으로 유명한 생선이 <안동 간고등어>인 것입니다. 소금은 이처럼 음식과 다양한 유기물질의 썩어짐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오늘 말씀을 한걸음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원하는데, 과연 무엇이 오늘 말씀을 통해 주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는 빛과 소금이다’라고 부르시는 의미인지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수 있을까요?그것은

첫째, “소금의 짠맛을 유지함”으로서 입니다: 제가 앞서 ‘소금의 기능’에 대해 함께 나누었듯이, 소금의 생명(중요성)은 짠맛을 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v. 13)라고.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하시고 나서 ‘그러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밟히게 된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 3:15,16)고. 이렇게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이 정확히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신앙의 삶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이렇게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신앙생활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금이 짠맛의 기능을 상실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우리 크리스챤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소금처럼 맛을 냄으로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크리스챤의 소금으로써의 구체적인 기능이 앞서 살펴봤던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인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이 얼마나 인간의 죄의 탐욕과 욕망으로 썩어 부패하고 냄새 나는지는 성도 여러분들이 날마다 온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세상에서 오직 우리 크리스챤 만이 유일한 ‘부패를 막는 소금이요, 희망’이라고 도전하시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가득찬 부패를 우리 크리스챤들은 방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 크리스챤의 소금으로써의 2번째 기능은 <순수성을 지키는 기능>일 것입니다. 소금은 ‘순수한 태양과 깨끗한 바다로부터 만들어졌기에, 고대 로마에서는 이 소금을 종교적으로 ‘순수함과 불변함’의 상징으로 신성시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썩고 부패함에서 방지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영적 순결함’으로 지켜주는 소금과 같은 역할은 시대와 민족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하다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할찌라도, 우리 성도가 썩어가는 세상을 지키고 순결하게 보존할 것인지? 아니면 도리어 세상이 성도들을 부패한 존재로 변질시킬 것인지? 하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오늘도 온 세상에서는 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것을 여러분은 의식하십니까?

둘째, “빛을 드러냄으로써”입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빛 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은 이미 ‘빛을 발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바로 내 속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생명의 빛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가 의식조차 못할찌라도 빛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빛을 발하라>고 명령하는 것일까요?’ 예를 든다면, 구약의 <이사야서>에서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1)고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해 ‘빛을 발하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제가 앞서도 설명 드렸듯이 <이미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발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웅크리고 앉아 있거나, 들어 누워있는 자리에서 이제 두 발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발로 힘차게 일어날 때 여러분과 제 속에 감추어졌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드러나서 찬란하게 비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잘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v. 15)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등잔대 위에 올려 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사방을 환해 비춰서 모든 집안 사람들이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성도 안에 생명의 빛이 있음을 인정하시고, 이제는 그 빛을 드러내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성도들은 자신안에 있는 이 빛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것일까요?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요? 여기에 주님의 분명한 메시지가 있음을 저는 봅니다. 바로 오늘 본문 앞 절에 있는 주님의 마지막 <여덟번째 팔복>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v. 10)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혹독한 핍박과 고난이 복된 천국시민의 증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음을 주님은 암시하시고 있습니다. 어쩌면, 초대교회의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조차도 이런 힘겨운 고난과 핍박이 찾아올 때, 우리가 그런 것처럼 피하고 싶고 몸을 움크리고 숨고 싶고 아니면 절망에 빠져 아예 자리에 드러눕고 싶은 충동도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약속과 도전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너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영 성령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우리 속에 있는 그분의 빛을 드러낼 때 주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싸우시고, 우리는 주님의 약속하심과 같이 ‘세상을 이기고, 어둠을 물리치는 빛의 자녀’로써 승리할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함으로써”입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소금(이라)”고 선언하시고 나서, 이어지는 <16절>에서 이렇게 그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그 결론이 무엇일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v. 16)고 말입니다. 왜 우리는 빛을 발하고, 소금과 같은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 결론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함’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목표만을 추구하며 육신의 계획을 좇아 살아가고 있다면, 죄송하지만 여러분의 삶은 결코 주께서 약속하신 기쁨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지만, 여전히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삶의 무의미로 방황하고 계신다면, 주님의 <16절>말씀이 여러분의 방황과 공허한 삶을 끝낼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성도의 참된 기쁨과 만족 그리고 풍성한 열매의 삶을 역설적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곧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때 결과로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깨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왜 여러분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순간 바로 주께서 여러분을 천국으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남겨두셨는지?’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주님 만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주께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뜻인 것입니다. 바로 ‘일어나 빛을 발하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이를 통해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만족과 기쁨, 그리고 승리와 풍성한 열매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은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에 빛을 발하고 썩어져 가는 세상을 방지하는 소금으로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오히려 세상의 막강한 돈과 권력 그리고 유혹에 잠식당하여 머리카락 잘린 삼손처럼 힘없이 세상의 논리와 가치에 비참하게 끌려 다니고 있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소금(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전하시고 격려하십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v. 16)고.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을 사단과 죄의 어두움의 권세에서 불러 주시고 장차 그 아들의 나라에서 그 아들과 함께 왕 노릇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그 크고 놀라운 영광된 미래를 소망하며, 지금 이 땅에서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그리고 세상을 죄와 사망의 썩어짐에서 건져내는 소금으로 쓰임 받으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