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13, 2025

“외식하는 자” (The Hypocrites)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6:1~2
Service Type:

“외식하는 자”

(The Hypocrites)

4-13-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1~2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산상수훈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면서. ‘팔복’을 통해 천국시민의 특성을 선언하셨고, 이어서 ‘율법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면서 본격적으로 ‘천국시민’된 성도가 살아가야 할 ‘영적 원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시작되는 <마태복음 6장>은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로 깨닫아 ‘영적 원리’를 삼아 살아가는 ‘천국시민’이 이제 어떻게 ‘영적 삶을 실천’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은 <6장>을 시작하시며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v. 1) 라고 경계하십니다. 다시 말해, ‘사람 앞에서 보이려고 하는 <외식>을 주의하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성도들에게 외식을 경계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외식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의 ‘외식하는 자’는 헬라어 원어로는 <휘포크리터스> (ὑπόκρισις)로서 연극하는 ‘배우’를 뜻합니다. 마치 배우가 가면을 쓰고 연극하지만, 실제의 그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이 ‘외식’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겉과 속이 다른 자’의 거짓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외식의 동기는 ‘자기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외식은 거짓 될 뿐 아니라,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에 죄악된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눅. 16:15)라고 주님은 ‘스스로 의롭다’하는 자의 동기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혐오스러운 죄악임을 밝히셨습니다.

셋째, “외식하는 자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v. 2)고 선언하십니다. 이들이 언제 자기의 상을 받았을까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영광을 추구할 때 받은 것입니다. 썩어지고 허무한 사람의 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된 상은 결코 받지 못한다고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날마다 우리의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죄의 유혹을 십자가에 못박고, 힘들고 연약한 이웃을 겸손과 진실함으로 섬겨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산상수훈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주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시작하시며, <마태복음 5장>을 통해 밝히신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시민 된 특성을 살펴보았습니다. <팔복>을 통해 기본적인 천국시민의 영적 특성은 무엇이고, 그 특성을 가진 자들이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빛과 소금의 삶’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천국시민은 그들 삶의 지침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영적 원리로 삶는 자들임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명령하는 뜻이 무엇이며, 그 영적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깨닫는 것이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본 천국시민의 ‘영적 원리’가 됨을 주의 가르침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 <마태복음 6장>은 이런 천국시민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적 원리를 올바로 삶에 적용함으로 살아가는 실천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적용에 있어서 오늘 말씀을 먼저 ‘위선’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v. 1)라고 말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오늘 본문 <1절>의 주님의 말씀이 매우 중요한 선언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율법의 가르침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천국시민’이 그 영적 원리를 삶에 적용하여 실천하며 살아가고자 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곧 ‘하나님의 상’을 받는 삶인지를 먼저 결론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v. 1)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너희 의를 행한다면, 하나님의 상을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어이질 산상수훈의 결론과도 같은 중대한 선언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평생 열심히 신앙생활, 자기 스스로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날 막상 주님 앞에 섰을 때 주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 (마. 7:23)고 만약 말씀하신다면, 그것 이상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상태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으로 주님은 앞으로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우리 크리스챤이 신앙생활을 실천해 나가는 구체적인 삶의 내용을 가르쳐 주심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이것을 조심하라, 이렇게 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삶을 실천하는 것에는 크게 3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삶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을 우리는 <경건의 삶>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도 이와 같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가장 대표적인 <경건한 삶의 실천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이 <세가지 요소>가 경건의 삶과 연결되는 관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첫째, <‘구제’는 이웃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경건행위>이고, 둘째,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경건행위> 그리고 셋째, <‘금식’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위한 경건행위>라고 정의합니다.

그것이 <6장>을 시작하면서 1절에서부터 18절까지 이어지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본문 1절에서 4절까지가 주님의 ‘구제’에 대한 가르침인데 그 골자는 ‘무엇이 올바른 구제이며, 무엇이 그릇된 구제인가?’에 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올바른 구제]는 ‘은밀한 구제’ 즉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v. 3) 구제라고 말씀하시며, 반대로 [그릇된 구제]는 ‘남에게 떠벌리고 자랑하는 구제’ 다시 말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고) ~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부는)” (v. 1-2) 구제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하는 자’의 모습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경계하시고, 이런 외식하는 자들이 빠지게 될 함정 (모순/위험)을 분명히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성도들에게 외식을 경계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외식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v. 2)고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외식하는 자”라는 뜻의 영어단어는 ‘hypocrite’입니다. 그리고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외식’ (外飾)을 “겉만 보기 좋게 꾸미어 드러냄” (겉치레)라고 하며, ‘동의어’인 ‘위선’ (僞善)을 “겉으로만 착한 체함”이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외식하는 자’ (혹은 위선자)는 ‘겉만 그럴듯하게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자’요, ‘겉으로는 착한 체하지만, 실제는 반대의 삶을 사는 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외식’은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휘포크리터스> (ὑπόκρισις)로서 연극하는 ‘배우’를 뜻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시대때에, 배우들은 연극할 때 ‘대사를 낭송하는 배우’나 혹은 ‘얼굴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연극을 했던 것’입니다. 이들 모두에서 공통점은 그들은 단지 연극하는 것이지, 실제 그들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의 자신이 아닌 ‘멋진 대사를 읊조리고, 얼굴에 가면을 쓰고’ 말 그대로 연극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단어의 사전적 개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외식’은 거짓되다는 것입니다. 진실하지 못하고 ‘없으면서 있는 체하고, 혹은 조그마한 것을 부풀려 과장하고 포장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외식’을 강하게 경계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를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 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엡. 4:24~25)고 말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외식’이 영적으로 위험하고 악한 것은 그것이 ‘거짓’에 기초한다는 점입니다. 진실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된 거듭난 성도에게 있어서는 결코 어울리지도, 함께 할 수도 없는 죄악된 것임을 바울은 도전하는 것입니다. 외식은 그 출발이 ‘거짓’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더 심각한 죄 (문제)가 ‘외식’에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은

둘째, “외식의 동기는 ‘자기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6장>의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v. 1)고 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람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알리고 싶어할까요?’ 그 이유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일 것입니다. 물론 ‘내가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칭찬받고자 하는 열망’은 우리 인간이 성장하고 발전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마치 ‘연료’ (동기)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선을 넘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고 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나를 포장하고 과장하고 숨기고 위장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와 유혹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에겐 기본적으로 이런 4가지를 자랑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모가 잘난 것’과 ‘혈통 좋은 것’과 ‘지위 높은 것’ 그리고 ‘남보다 의롭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남보다 의롭다’는 자랑이 가장 고약하다고 지적했음을 기억합니다. 특별히 우리 크리스챤들에게서 볼 때, 내가 남보다 죄 많이 안 짓고 착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성도들 중에 ‘은근한 이런 의롭다는 자랑’을 하고자 하는 충동과 유혹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런 유혹이 찾아올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랑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마. 7:3)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보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인정받고 찬사 받고자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을 향해 이렇게 도전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눅. 16:15)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 앞에서 높이 평가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스럽고, 하나님의 미워하심 바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을 싫어하시고 자신만 높임 받고자 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동기와 중심>을 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많은 크리스챤들이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시선과 찬사와 평가에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영광> (self-glory)를 추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그 대표적인 예가 ‘사울 왕’입니다. 그는 준수한 외모와 용맹함과 지도력을 겸비함으로 탁월하게 출발했던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지만, 그는 오래가지 않아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눈보다 사람의 눈을 더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의 평가를 더 우선시 했던 그의 어리석음’ 때문이요, ‘그의 자기 영광을 추구했던 죄’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영광과 찬사를 받고자 하는 헛된 욕망과 동기가 사울 왕의 중심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도전하시는 ‘외식하는 자’가 걸려드는 유혹이요, 죄의 뿌리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십니까?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임을 말입니다.

셋째, “외식하는 자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의 삶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매우 분명히 밝히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v. 1) 그리고 ‘사람에게 영광을 얻고자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부는 자’는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v. 2)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런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영광 받고 높임 받기를 추구했기에 이미 사람에게서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썩어지고 사라질 허무한 영광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게 될 썩지 않고 영광스러운 상급은 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님은 준엄히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참된 구제’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결론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v.3~4)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인간처럼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 외모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그 사람의 동기와 중심으로 판단하시고, 우리의 은밀한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곧, <마음의 은밀한 동기와 진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외식은 이처럼 그 결과가 허무한 것입니다. 진실로 선하신 하나님은 헛 맹세하지 않고,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며, 진실하고도 겸손하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는 자에게 준비하신 복된 상급으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안에서 빛된 자녀로 살아가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자랑하고자 함입니까? 우리의 의로움을 뽐내고자 함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우리를 죄의 종된 상태에서 건져 주시고, 사망의 억눌림에서 해방시켜 주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선전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기뻐하고 영광 돌리고자 함이 아닙니까? 그러할진데, 우리의 모든 교만의 죄와 높아지고자 하는 모든 유혹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과 함께 아름다운 열매 맺으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겸손과 진실함으로 사랑으로 섬겨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성숙된 아들과 딸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