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6, 2025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5:43~44
Service Type: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4-6-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설교 요약]

          주님은 오늘 ‘원수를 사랑하라’고 도전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이 엄청난 주님의 ‘사랑의 도전’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는 주께서 <5장>에서 <팔복>의 말씀을 시작으로 ‘산상수훈’의 말씀을 시작하시고, 율법의 진정한 뜻을 ‘형제에 대해 노하거나’,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고’ 그리고 ‘맹세하는’ 행위의 모순을 통해 올바르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제의 내용은 이미 오늘 본문 앞 절 <40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v. 40~42)라고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천국시민의 인격적 완성”을 뜻합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도전하시고 나서,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v. 45)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시민이 되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을 좇아 ‘원수를 사랑’함으로 인격적 완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둘째, “나의 상처가 치유됨”을 뜻합니다: 주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도전은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놀라운 실제적인 유익을 누리게 됨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명령을 좇아 기도로 순종해 나갈 때,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고통으로 갇힌 심령을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사. 61:1). 이 원수에 대한 용서와 사랑만이 우리를 상하고 갇힌 상처로부터 주의 능력으로 치유 받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아감’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원수 되었던 우리를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여 주심으로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요. 3:16).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닮은 자녀로 성장하기 원한다면 (v. 48), 하나님의 사랑, ‘원수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날마다 본받아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도전의 핵심일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 가운데 기도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원수를 사랑함으로, 지난 날의 상처와 고통이 치유함을 받고 자유자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주님은 오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이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주님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힘쓰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도 엄청난 도전의 말씀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압니다. 이제 <5장>을 마무리해 가는 가운데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 시민’의 정체성을 우리 성도들에게 밝혀주시며, 천국시민의 정체성 (인격)을 사랑의 실천 가운데 증명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말씀 가운데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v. 44)는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아 나가며, 천국시민의 진정한 인격의 크라이막스가 되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녀의 권세와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님은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며 먼저 크리스챤의 참된 8가지 복, 곧 ‘팔복’을 선언하시고 나서, ‘율법’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살인이며, 무엇이 간음인지?’를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좇아 가르쳐 주셨습니다.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요,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맹세하지 말찌니라’는 말씀을 통해 주님은 ‘우리 인간의 부정직성’을 도전하셨습니다. 유대백성들이 틈만 나면 거짓말과 헛된 맹세를 통해 그들의 ‘정직성’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인격을 크게 손상시켰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정직한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인격의 삶을 살아가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v. 43-44)라고 말입니다. 제가 성도 여러분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제의 오늘 말씀을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잠시 살펴볼 말씀은 바로 오늘 본문 앞 절의 <38~42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난주 “맹세하지 말라”는 주제의 말씀인 <33~37절>에 이어서 연결되는 말씀인데, 주님은 이렇게 <38-39절>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v. 38-39)라고.

여기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구약 율법의 말씀에 대해 매우 냉정하고 무서운 징계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오늘날의 크리스챤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율법의 정신은 그 반대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것은 누군가가 ‘실수로 한 행동에 대해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하게 갚아주라’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피해를 당한 당사자나 가족이 흥분한 나머지 극단적으로 가해자를 공격하고 가혹하게 처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가 ‘이를 손상했다면 이에 해당하는 벌’만, 그리고 ‘눈을 손상했다면 눈에 해당하는 벌’만 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칫 흥분된 감정으로 피해자가 극단적으로 보복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형벌을 정의롭게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38~42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두번째 사실은 ‘주님은 이 말씀에서 오늘 본문의 주제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이미 시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디에서 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v. 39~42)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먼저 ‘나에게 손해를 가하고, 상처를 주고, 힘들고 귀찮게 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v. 43-44)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구약성경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인가 하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는 말씀은 있어도, 그 어디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이렇게 유대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르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출애굽 시키신 이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며 그곳 주민을 전쟁 가운데 멸절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에 근거를 두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를 포함한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후 유대인들은 주위 이방민족을 마치 원수처럼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이해할 것은 ‘하나님에게 이스라엘민족에게 가나안 정복을 통해 그곳 주민을 멸절케 하신 것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셔서, 가나안 족속을 희생시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가나안 주민들의 죄악이 극도에 다다름으로 마치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할 때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열강 바벨론과 앗시리아 그리고 여러 나라들을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치신 것과 동일한 이유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그렇다고 ‘힘없고 약한 옆집 아이를 이유도 없이 가서 괴롭히고 때리는 버릇없는 자기 아이를 못 본채 방관하는 그런 무책임하고도 이기적인 부모’와 같은 존재가 결코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오늘 본문에 이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 (v. 45)라고. 그럼으로 주님께서 오늘 말씀에서 도전하시는 골자는 ‘원수를 미워하라’가 아니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천국시민의 인격적 완성”을 뜻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대민족은 잘못된 율법의 해석과 가르침으로 인해 하나님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절반의 명령으로 축소시켜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 유대인들끼리 만이 ‘이웃’이고, 이웃 이방민족은 ‘원수’라고 하면서 율법의 말씀에도 없는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엉뚱하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잘 알듯이 유대인들은 주위 이방민족들을 ‘할례 받지 못한 민족’이라고 깔보고 개처럼 업신여기고 미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편협되고, 유대인만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오늘 본문의 이어지는 <45절>말씀에서 분명히 밝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v. 45)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따사로운 햇빛을 비추시고, 은혜로운 단비를 자기 백성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그 자비하심으로 동일하게 따스한 빛을 비추시고 생명의 비를 뿌리시는 긍휼이 무궁하신 선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께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우리에게 밝히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중심에는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도전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선하시고, 우리는 내 마음데로 살아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이렇게 계속해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 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v. 46-47)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너희들이 세리들과 이방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죄인들도 자기를 좋아하는 자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말로 만이 아니라, 사랑함으로 아니 ‘원수를 사랑함’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시민의 진정한 인격과 특성을 드러내고 증명할 것이 아니냐?!’>고 주님은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결코 ‘원수에 대한 사랑’이 쉽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도전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과 세상사람들은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원수에 대한 사랑’이요,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과 딸’만이 가능하다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도전하고 격려하심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 천국시민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이 복된 천국시민의 인격을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까?

둘째, “나의 상처가 치유됨”을 뜻합니다: 주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혁명적이고도 엄청난 도전의 말씀을 주시는 이면에는 우리 각자가 이런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누리게 될 놀라운 은혜가 주어짐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분명한 은혜의 하나는 우리 자신의 <상처의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누가 원수인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원수’의 개념은 사람마다 상당히 주관적으로 정의되고,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말 그대로 ‘내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상처를 입혔거나, 혹은 물질적 손해를 끼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를 성가시게 하고, 괴롭히고, 별 이유도 없이 나를 미워하고 힘들게 했던 그 누군가’가 나에게는 ‘원수 같은 존재’로 인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제 3자가 봤을 때, ‘객관적인 가해의 정도’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느끼고 겪은 고통과 상처가 크다면, 나에게 있어서는 ‘원수와 같은 존재’임에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온 환경 가운데 그 누구도 원하진 않았지만, 원수 같은 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가슴 아픈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존재가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일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지금도 마주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어떤 상황에 있든 상관없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주님의 도전을 따라서 ‘어떻게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v. 44)라고 말입니다. 저는 주님의 “너희를 핍박하는 자, 곧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명령 속에 ‘원수를 사랑하는 첫걸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시겠지만, ‘원수에 대한 사랑’은 결코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먼저 기도로 그 사랑하기 힘든 존재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그 상대를 품어주고 용납할 수 있는 첫걸음은 주의 영, 성령께서 내 마음을 만져 주셔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되게 해 주실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먼저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용서하기 힘든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해야 할까요? 물론,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시민의 온전한 인격으로 완성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이런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갖게 되는 매우 실제적인 유익은 우리 자신의 ‘상처의 치유’일 것입니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할까요?’ 그 분명한 대답의 하나는 ‘만약 여러분이 어떤 이유가 되었건 아직까지 여러분을 힘들게 한 그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할 때, 여러분은 여전히 그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고통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안식일 회당에서 <이사야서>에 기록된 오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읽으심으로 공생애의 시작을 선포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1)라고. 주님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기쁘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시고자 오셨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를 놓임 받게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 의미는 첫째,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여러분과 저를 그 강력한 힘으로 가두고 구속하던 ‘죄와 사망’의 힘에서 자유케 되고,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을 된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을 통해 참된 치유와 회복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거듭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의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며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 성도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고, 주님의 장성한 성품으로 온전히 회복’되는 핵심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포함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함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여전히 그 누군가를 용납하지 못할 때 여러분의 마음의 상처는 결코 온전히 치유되지 않음을, 그리고 여러분이 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할 때 여러분은 끝까지 아픈 상처와 기억을 떠나 보내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가슴에 안고 고통받으며, 증오의 감옥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주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아픈 기억과 상처를 이제는 떠나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원수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와 유익을 누리는 존재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꼭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원수를 향한 용서와 사랑 안에 포함된 진정한 자기 사랑이요, 치유의 능력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아감’을 뜻합니다: 만약에 성경의 수많은 말씀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낸 대표적인 말씀을 들라고 한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요한복음 3장16절>을 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라고.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세상에 속했던 여러분과 저를 살리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만큼 그분을 잘 드러내는 말씀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분과 원수 되었던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잘 영적으로 묘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8,10)라고. 이처럼 하나님의 그 측량치 못할 사랑, 곧 그분의 놀라운 사랑은 한마디로 ‘원수를 사랑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바 된 우리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 그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많이 훼손하게 되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팔복을 통해 회복하고 추구하게 되는데, 그 크라이막스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원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사랑’일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었음을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그리하여 그분의 선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닮아 가길 소망한다면, 이제 여러분과 제가 추구하고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내여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일 것입니다. 바로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다고요? 우리는 하나님아 아니니, 불가능하다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팔복’의 말씀을 통해 산상수훈을 시작하시고, 이제 천국시민의 진정한 인격을 마무리해 가시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우리를 도전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5장>을 끝내며 “그럼으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v. 48)라고 선언하시는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온전하신 형상을 닮은 그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심 인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이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성취되는 것임을 주님은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주님은 이 온전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보여준 우리 신앙의 선진 한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분은 손양원목사님이십니다. 손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놀라운 사랑을 실천하셨는데,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여러해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셨고, 6.25사변이 벌어졌을때 공산군에 의해 순교하셨습니다. 그런데, 손목사님은 순교하시게 몇 해전에 전라남도 여수에서 '애양원'교회라는 나병환자를 돌보고 섬기는 교회에서 시무하셨는데, 어떤 공산당원이었던 청년에 의해 사랑하던 두 아들이 순교하는 힘든 순간을 경험하게 되셨습니다. 이렇게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손목사님은 이렇게 참석한 성도들과 함께 감사의 제목을 나누셨습니다.

  •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순교 당함이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미국 유학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드립니다
  •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아들로 입양합니다. 그리고 그를 회개시켜 천국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십니까? 이런 하나님 사랑을 통해 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이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은혜를 누리십니까? 오늘 주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v. 44)고 축복된 사랑의 권면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향한 사랑의 실천’은 우리 성도의 최종적인 축복의 통로이자, 천국시민의 참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의지와 결심 이전에 주의 영,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진리를 통해 기도로 간구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곧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나를 상처 주고 힘들게 했던 그 영혼을 용납하고 품어줌으로,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고, 아픈 기억의 억눌림으로부터 자유케 되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날마다 닮아가는 이런 축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