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3, 2025

“음욕을 품는 자마다” (Anyone Who Lust)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5:27~28
Service Type:

“음욕을 품는 자마다”

(Anyone Who Has Lust)

3-23-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27~28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Do not commit adultery.’)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looks at a woman lustfully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 (v. 22)는 말씀에 이어, 또 한번 진정한 율법의 정신은 무엇인지를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오늘말씀에서 주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v. 28)고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하나님은 십계명의 제 7계명으로서 “간음하지 말지니라” (출. 20:14)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실제로 ‘여자와 육체를 관계’를 가지는 것만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이미 간음하였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일까요? 그것은

         첫째, “선한 율법이 도리어 ‘범죄’의 도구가 됨”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 임이니라” (롬. 7:8)라고 엄청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하지만, 문제는 우리 마음이 부패했기에 (렘. 17:9)에 먼저 마음에서부터 이미 계명을 어기고 범죄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간음’은 관계를 파괴시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해 <간음하였다>고 책망하십니다 (렘. 3:8). ‘영적 간음’인 우상숭배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파괴한 것처럼, 마음의 음욕에서 비롯되는 ‘간음’은 ‘부부의 하나된 관계’를 파괴합니다.

         셋째, “율법의 정신으로 ‘간음’을 이해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간음’에 관한 명령은 단지 십계명의 ‘제 7계명’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 (출. 20:14)는 말씀 뿐 아니라, ‘제 10계명’의 “이웃의 아내(를) ~ 탐내지 말라” (출. 20:17) 그리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는 말씀과도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율법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성 속에서 그 핵심 되는 정신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 22:37-39). 간음의 출발인 음욕은 ‘사랑’의 정신을 어긴 것입니다.

겉사람 뿐 아니라 속사람까지 새롭게 하시는 주의 영,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 속 은밀한 음욕의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복된 부부의 연합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v. 28)라고. 우리는 지난 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 (v. 22)는 말씀에 이어, 또 한번 구체적인 율법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율법의 정신은 무엇이며, 이 명령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주님은 영적으로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율법에서 명하는 ‘간음하지 말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함께 묵상하고, 깨닫고 또한 우리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인지를 살펴 나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세와 선지자 글의 올바른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율법의 계명>을 예를 들어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지난 시간 ‘10계명중 제 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주님은 밝혀 주셨습니다. 이 율법의 명령은 단순히 ‘형제를 실제로 죽이지 않는 것’만이 ‘살인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속에서 시작된 형제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 자체가 살인이요, 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율법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v. 21-22)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잘 확정한 것이 사도 요한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요일. 3:15)라고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6계명은 단순히 ‘부정적’ (수동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긍정적’ (적극적)으로 ‘하라’는 것이 그 말씀의 핵심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밖으로 드러난 ‘행위’ 이전에 먼저 ‘마음’에서부터 형제를 용납하고 사랑함으로, ‘미움과 살인의 죄악’을 몰아내고 율법을 완성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명하심이요, 그분의 뜻이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우리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리라” (v. 28)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원래의 성품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중한 것임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첫 인간 부부를 창조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 1:26)고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그분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다’는 것은 비록 우리 인간의 성품과 기질이 첫 인간 부부의 타락이후 많이 훼손되고 손실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름다운 성품과 그분을 추구하는 영성이 존재함을 우리 성도들은 늘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또한 직시해야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우리 인간 본성에 있어서 가장 크게 훼손되고 죄를 범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일 것입니다. 이 점을 ‘예레미야’선지자는 이렇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 17:9)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타락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대표적인 악한 감정이 ‘미워함’과 ‘음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께서 지난시간 도전하신 “형제에 대해 노하는 자마다”라는 말씀과 오늘 말씀에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라는 말씀을 통해 타락(변질)된 우리 마음의 이 두가지 대표적인 ‘미움과 음욕’의 죄악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에서 ‘제6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그리고 ‘제7계명’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또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v.27-28)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이 이미 간음한 것이 될까요?” 무엇보다도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명하신 “간음치 말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성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 뿐 아니라, 정신적인 음란행위도 이미 간음이다>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좀더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어떤 부부가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음란물’사이트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고, 나중엔 심한 음란물 중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남편은 어떤 상태라고 말해야 할까요? 바리새인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 남편은 어떤 특정여인과 실제로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기에, 또 어쩌면 그들에게서 중요한 것은 남의 눈에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간음하지 않은 것’입니까?

현재 우리 교회는 저희 부부를 제외하고는 성도 여러분 모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싱글 미혼이지만, 이렇게 남편이 되었든, 아내가 되었든 다른 이성과의 육체적 관계 뿐 아니라, 이런 음란물 중독에 빠지게 될 때 정신적 음욕에 빠지는 것도 그 못지 않게 부부간에 서로의 몸과 마음의 순결을 파괴시키는 것임을 여러분도 충분히 판단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금 주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의 명령은 단순한 ‘육체적 간음’을 금지하는 것 이상으로 더 깊고 넓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매사에 까다로운 시어머니처럼 우리를 감시하고, 죄의식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통제하심’이 아니요, 도리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그분의 선하신 성품을 회복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영적으로 가르쳐 주심을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우리 인간이 가진 대부분의 감정 자체는 결코 나쁘고 죄악된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는 ‘아름다운 여인’이나 ‘멋있는 남자’를 보았을 때 느끼게 되는 자연적인 욕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몸의 기능을 가졌다면,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성적 욕구’자체가 결코 나쁜 것도 죄악된 것도 아닌 것입니다. 특별히 육체적인 기능이 활발한 청년시기에는 이런 감정이 솟구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아름답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분별해야 할 것은 이런 ‘성적 욕구가 생겨나는 것’과 이런 ‘욕망에 나를 방치함으로 음욕에 빠지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사실입니다. 제가 가끔씩 예를 드는 것으로써, <새가 내 머리에 잠깐 앉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지만, 내 머리에 둥지를 튼다면 그것은 내 책임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의 의미는 우리 모두는 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어떤 대상에 대해서 육체적 욕망과 정욕에 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스스로 발견했다면 그 ‘욕구와 충동’을 계속 혼자 속으로 음미하고 음란한 생각에 잠겨 있어서는 안되고 얼른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일까요?” 그것은

         첫째, “선한 율법이 도리어 ‘범죄’의 도구가 됨”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인간>과의 묘한 관계를 <로마서>에서 이렇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 임이니라” (롬. 7:5,8)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의롭고 선한 것이지만, 문제는 우리 속에 있는 ‘죄’ 곧 ‘각양 탐심’이 선한 율법의 계명을 이용하여 우리를 속이고 죄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구체적인 한 예로써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7)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마치 다양한 성적 문제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미국이나 유럽 여러 선진국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성교육>을 시키고 있는데, 문제는 그 성교육 자체가 아이들을 더욱 성적 자극과 타락에 노출시키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명하였지만, 타락한 우리의 본능은 ‘네 맞아요! 간음은 나쁜 거예요. 간음하지 않겠습니다”가 아니라, 비록 겉으로는 깨끗하고 경건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속에는 ‘간음’이라는 죄를 버리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면서 온갖 음욕이 꿈틀거리는 마음의 간음을 저지르고 있음을 심지어 우리 크리스챤들 조차도 때에 따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v. 28)는 말씀속에서 이와 같은 ‘내면에서 이미 시작된 간음’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간음’은 관계를 파괴시킴”을 의미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마음속의 음욕’을 ‘육체적 간음’과 동일시한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성경의 좋은 예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영적 간음’ 곧 ‘우상숭배’에 빠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대해 강하게 책망하시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렘. 3:8)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런 우상숭배의 대상인 ‘세상의 신들’은 그 본질이 결국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공중권세 잡은 자 ‘사단 마귀’입니다. 그리고 이 거짓 영인 사단 마귀는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영적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할찌라도 이런 거짓 신인 사단 마귀에게 우상숭배를 행할 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증스러운 간음 곧 ‘영적 간음’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마치 충실한 남편을 버리고 외간 남자와 간음을 저지르는 바람난 아내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처럼 비록 눈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라 할찌라도, 마음 속에서 행해지는 ‘음욕의 마음’은 우상숭배처럼 ‘영적 간음’과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아름다운 결혼을 꿈꾸고 준비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할 때 <결혼서약>을 상호간에 맺게 되는데, 이 서약의 핵심은 ‘살아가는 평생을 통해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서로를 향한 충실함과 순결을 지키겠다는 맹세’가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육체적으로 만이 아니라, 정신적이요 영적인 순결을 부부 상호간에 지키겠다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마음에서 행해지는 ‘음욕’의 문제는 그 자체가 배우자와의 순결을 지키지 못할 뿐 아니라, 그 관계를 이미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깨트려가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영적 간음’으로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한다면, ‘음욕’은 이미 그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나 스스로가 깨트리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의 정신으로 ‘간음’을 이해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음욕’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고 난 다음,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런 매우 엄중한 말씀으로 도전하십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v. 29)라고. 주님은 현실적으로 ‘만약 너의 오른 쪽 눈이 범죄하였다면, 그 한쪽 눈을 빼 내버리는 것이 낫다’고 도전하십니다. 왜냐면, 두 눈을 다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쪽 애꾸눈을 하고서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현명한 판단이요, 바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왜 이런 강력한 언어로써 그를 믿는 우리 제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웃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이미 십계명의 제 7계명에서 금지한 ‘간음의 죄’를 마음으로 저질렀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는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사실 구약에서 기록된 율법의 내용은 매우 많지만, 그 내용이 농축된 핵심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새겨 주신 <10계명>임을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십계명의 제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주님의 올바른 율법의 정신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데, 이 ‘간음’이라는 것은 또한 제 10계명에서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 탐내지 말라” (출. 20:17)는 계명에 위배되며, 더 나아가 앞서도 지적했듯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 최고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서로 상호보완적이고 깊은 관계성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이 한 뿌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임을 저는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사랑’임을 믿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결국 구약의 수없이 많은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물론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포함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외적으로 ‘어떤 행위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매우 지엽적이고, 이런 행위에 집착했을 때 율법의 정신은 전혀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간음’의 문제는 결국 우리 내면의 음욕에서 출발하고, 하나님과 나 자신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음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관계를 파괴시키는 죄악임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여자를 보고 육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제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여자를 보고’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는 않습니까? 우리 각자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잠시 육체의 정욕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주께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주님께 왔을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라고 도전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실수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서는 안된다고 도전 하십니다. ‘음욕을 품고 즐기고 탐익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십니다. 왜냐하면, ‘간음은 이미 우리의 마음 속 음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요, ‘음욕은 사랑을 파괴하는 악한 죄의 강력한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 우리의 겉모습 뿐 아니라, 속사람까지도 새롭게 하시는 주의 영,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 속 은밀한 음욕에서부터 자유함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결혼을 아름답게 준비하고, 머지 않아 부부의 축복된 열매를 누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