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One Who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On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2-23-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10~12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 같이 핍박하였느니라 (Rejoice and be glad, because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in the d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설교 요약]
우리는 주님의 <팔복>에서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v.10)고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팔복>의 말씀을 마무리하시면서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그 ‘결론’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게 되는 자의 삶은 축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무엇이 ‘의’일까요? 이 ‘의’는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로써,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언하듯이, ‘복음 안에 드러난 의’ (롬. 1:17)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롬. 3:22)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이 ‘의’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한편,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순전한 믿음으로 인해 받는 핍박’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를 위한 핍박’과 개인의 ‘철학 혹은 신념’이나 무분별한 ‘순교주의적 행동’으로 인해 당하는 핍박은 분명히 구분 되어야만 합니다.
이제 “무엇이 주님의 <팔복>을 통한 결론일까요?” 그것은
첫째, “참된 성도는 핍박을 통해 증명”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8)라고 하신 선언하십니다. 그럼으로 ‘내가 핍박을 당한다’는 것은 이제 합당한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딤후. 3:12).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복”인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 ~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v.11)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마. 13장)되신 예수님을 위해 어떤 핍박도 피하지 않고 대가를 지불함으로 우리는 주님을 얻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은 고난 속의 기쁨과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오늘 팔복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주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 (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v.11~12)고 도전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의 통로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이 땅에서의 고난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이겨 나가심으로 천국시민의 축복된 팔복의 은혜를 날마다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주님의 <팔복>에서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v.10)고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오늘로써 주님의 ‘팔복’의 마지막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는 ‘팔복’의 말씀에서 그 복을 누리게 되는 사람, 곧 ‘천국시민’의 ‘인격과 내면적 특성’은 지난 시간 ‘일곱번째 복’에 해당하는 말씀까지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첫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에서 시작하여 일곱번째 복, “화평케 하는 자”의 복까지가 천국시민의 ‘인격적이요, 영적 특성’으로 인하여 누리게 되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덟 번째 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마지막 이 여덟 번째 복은 성도의 영적 특성이 아니라, 성도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살아 감으로서 받게 되는 결과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10절>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된 성품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써 도리어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육신의 본성이 ‘핍박과 환난’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본래적으로 고난과 핍박을 꺼려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해서 밝혔듯이 주님의 말씀은 역설적인 진리를 담고 있기에 이 ‘핍박과 고난은 도리어 복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핍박을 통해 우리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더 나아가 하늘의 큰 상급을 장차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큰 그림에서 살펴볼 때 이 결과물까지도 천국시민의 특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핍박을 견디고 인내로 이겨 나가는 것까지도 천국시민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주님의 팔복의 말씀 가운데 그 참된 성도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아 이제는 더 이상 고난과 핍박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주님과 함께 맞서 싸워 승리하여 약속하신 하늘의 상급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제가 성도 여러분과 오늘 말씀을 살펴가면서, 먼저 나누기 원하는 것은 예수님은 이제 <팔복>의 말씀을 마무리하시면서 이 말씀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매우 선명하게 밝히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상당부분 <비유>로 말씀하셔서 그 말씀을 직접 제자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은 결코 정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께서 <천국>에 대해 영적으로 설명하시면서 <씨 뿌리는 비유> 혹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 (마. 13장)을 자세히 주의 제자들에게 그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팔복의 결론부분에 해당하는 <여덟 번째의 복>의 말씀은 결코 난해하거나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그 결론은 <’의’ 곧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게 되는 자의 삶은 축복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하여’ 핍박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받게 될 때, 천국을 소유할 뿐 아니라 장차 큰 하늘의 상급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정도로 말씀을 마무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뜻인가? 를 이어지는 <11절>에서 정확히 밝혀 주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v.11)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주께서 <천국 시민의 팔복>을 모두 설명하시고 나서, 이제 결론적인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v.11)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께서 앞에서 영적으로 밝히신 ‘왜 이런 삶을 살아가는 자가 복된 것인지?’를 결론적으로 확정하고 정리하는 말씀이 <11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이 복된 증거’라고 주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이 주께서 앞서 선언하신 ‘누가 복된 자인가’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이라면, 이제 저는 오늘 말씀에서 주께서 제자들에게 밝히시는 그 가르침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길 원합니다. 먼저 저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v.10) 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을 때, ‘무엇이 <의>이며, 무엇이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뜻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지난번 ‘네번째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v.6)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의’는 우리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 하나님의 의로움을 통해서만이 우리 인간은 죄 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살리고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일까요? 그 핵심적인 말씀의 하나가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밝힌 ‘복음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이 ‘의’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1장>에서 선언한 ‘복음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 곧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롬. 1:16)이 되시는 의로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어지는 <3장>에서 이 ‘의’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롬. 3:22)라고 밝힙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심으로 죄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불러 주심으로 영생의 구원을 허락하시는 ‘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에 대한 추구는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이어지는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 <6장>을 마무리하시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고 성도들에게 도전하시는 핵심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 곧 ‘천국시민’의 의에 대한 추구는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추구하고 영광 가운데 누려야 할 핵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구원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 모든 그분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녀답게 이제 평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을 그들의 필요를 따라 신실하게 구하는 것 그 이상으로 넘치게 공급해 주신다고 주님은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마. 6:33).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무엇이 ‘하나님의 의’입니까? ‘하나님의 의’는 바로 모든 ‘신구약 성경말씀’이요, 특별히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그분의 뜻’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그 선하신 뜻’이 ‘그분의 의로움’이라면, ‘무엇이 의를 위해 핍박를 받는다’는 뜻일까요? 이점에 있어서 성경학자들은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차이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핍박을 받게 된 이유’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과 어떤 ‘대의명분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2천년 교회사를 통해 생각해 본다면, 초대교회 때나, 중세의 종교 암흑기 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에 우리 조선의 순전한 그리스도인들처럼 그 당시 국가나 사회조직에 의해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믿음을 지키고자 엄청난 핍박과 고난 심지어 순교까지 감당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나라의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상황에 반대하는 등의 이유로 탄압을 받거나 투옥되는 것을 영적 (신앙적) 순결을 지키고자 함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혼돈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로이드 존스 목사는 경고합니다. 더 나아가 ‘순교’라는 숭고한 영적 사건을 사모한 나머지 무분별하게 ‘순교를 열망’하는 <극단적 순교주의>로 치닫는 일부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얼마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지혜롭지 못한 것인지를 우리는 잘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주님의 <팔복>을 통한 결론일까요?” 그것은
첫째, “참된 성도는 핍박을 통해 증명”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왜 착하고 신실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되는지를 이렇게 그 근본적 이유를 잘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 하느니라” (요. 15:18-19)라고. 한마디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이유는 먼저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요, 또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이어지는 말씀에서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3)고 말씀하신 뜻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처럼 “성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 속한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세속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불신자들 사이에는 서로의 불일치를 통한 필연적인 충돌이 불가피합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그의 마지막 편지로써,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고 디모데에게 도전하고 격려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신실하고 충성된 주의 제자들이 결코 피하거나 우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핍박과 고난의 삶’이라고 사도는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차히 이 박해를 면하고자 세상과 타협하거나, 핍박으로 인해 낙심 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와 세상의 거짓된 유혹과 고난에 지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주의 영, 성령과 함께 힘써 싸워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뜻일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은 무엇인가?”를 다양하게 비유로써 설명하시는 가운데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받을 사느니라” (마. 13:44)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마치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화는 무엇일까요? 보화는 바로 ‘예수님 자신’을 뜻합니다. 바로 주님이 자신에 대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고 선언하신 것처럼, 천국의 보화는 오직 예수님 자신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주님의 산상수훈의 첫번째 가르침인 ‘팔복’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내가 처음에는 기대하지도 깨닫지도 못했지만, 어느날 ‘나사렛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오실 메시야심을 깨닫게 되었다면 내가 해야 할 가장 지혜롭고도 현명한 일은 나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보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야 한다’는 도전이 바로 오늘 주께서 <11절>에서 하신 말씀과 정확히 일치되는 말씀이라고 저는 이해됩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v.11)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 4:10) 다소 냉소적인 어투로 자신과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동역자들을 표현합니다. 그것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되지 못하고, 자신들의 영적 은사를 자랑하고 스스로 높아져 있었고, 교회 안에 육체적 타락으로 인해 심각한 영적 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고전. 4:11~13)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사도 바울을 포함한 초대교회의 신실한 성도들, 주님의 충성된 제자들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가지불 (paying the cost)의 삶’인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라는 주님의 분명한 도전과 같이 진정한 ‘제자의 길’ (=제자도)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나 자신의 이기심을 부인하고 나의 높아진 마음과 헛된 정욕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음 (죽임)으로써 우리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워 나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대가지불의 삶> 곧 <십자가의 삶>이 바로 ‘나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밭에 감추인 보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는 삶’이요, ‘예수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달게 지는 삶’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보화 되신 예수님을 소유하셨습니까? 그 뿐 아니라, 이제 그분을 위해 욕먹고 핍박 받기를 겁내지 않습니까?
셋째, “주님은 고난 속의 기쁨과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해 나가면서 우리가 한가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는 ‘너희가 의를 위하여, 곧 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할 때는 힘써 참아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할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도전하시고 격려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12절>말씀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v.12)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과 고난을 당할 때,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요, 더 나아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에서의 상이 크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시고 보증하십니다.
한편 우리가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길은 주의 영, 성령을 사모하고 그분의 충만한 통치 아래서 살아가게 될 때 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요, 그로 말미암아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는 삶’인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충만하신 능력과 은혜로써 우리의 감겨진 영의 눈이 열림으로, 미래에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고 깨닫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고난에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순교자 폴리갑 주교와 같이 ‘핍박과 고난이 극심한 순간까지, 그리고 마지막 순교의 순간에 ‘자신이 주님을 끝까지 부인치 않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심까지’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v.10)라고. 그리고 이렇게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도전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v.11-12)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셨습니까? 밭에 감추인 참된 보화 되신 예수님을 발견하셨습니까? 만약 발견하셨다면, 여러분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보화 되신 주님을 사셨습니까? 그분을 여러분 삶의 중심에 여러분의 참된 주인으로 모셔 들이셨습니까? 그리하여 장차 주님과 함께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은혜와 영광의 삶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과 핍박을 이겨 나가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이 땅에서의 고난을 이제 더 이상 두려움과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이겨 나가심으로 천국시민의 이 아름답고 복된 팔복의 은혜를 날마다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