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6, 2025

“화평케 하는 자” (One Who Are The Peacemakers)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5:9
Service Type:

“화평케 하는 자”

(One Who Are The Peacemakers)

2-16-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9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 for they will be called children of God)

[설교 요약]

오늘 주님은 팔복 중 일곱번째 복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천국시민> 으로서의 마지막 ‘복된 성품’이 됩니다.

왜냐하면 다음 시간에 보게 될 ‘여덟번째 복’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v. 10)라는 말씀은 ‘천국시민’의 성품이 아니라 그 성품이 가져올 ‘핍박의 삶’을 뜻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변하여 참된 축복이 된다고 주님은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시민, 곧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성품이 가져오게 될 복을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v.9) 라고 선언합니다. 먼저, ‘화평케 한다’는 사전적 의미는 다’는 의미일까요? 이런 ‘화평하다’는 사전적 의미는 <전쟁, 분쟁,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하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그것을 너머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일까요? 그것은 먼저,

첫째, “하나님과 화평한 자의 복”입니다: ‘사랑’과 ‘화평’은 본질적으로 그 실천순서가 동일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하나님사랑’ ‘나 자신사랑’ 그리고 ‘이웃사랑’의 순서로 발전되어야 함을 주께서 가르쳐 주셨듯이 (마.22:37-39), ‘평화의 실천’도 사도 바울이 선언하듯이,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 받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롬. 5:1-2).

둘째, “나 자신과 화평한 자의 복”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우리 ‘자신과 평화한다’는 것은 ‘스스로 갈등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평화는 ‘평화의 왕’되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 나감으로 점점 더 누려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11:28).

셋째, “이웃과 화평한 자의 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4)라고 선언했습니다. 나의 노력과 열심 이전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여러분은 ‘화평케 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Know Jesus, know peace; No Jesus, no peace”는 문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하고, 또한 나 자신과 평화를 누림으로, 그 평화가 넘쳐나 이웃과 더불어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과 권세를 누리는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은 팔복 중 일곱번째 복입니다. 우리는 몇 주에 걸쳐 주님께서 <팔복>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은 자’ 곧 ‘천국시민’은 과연 어떤 자인가? 다시 말해, ‘천국시민은 어떤 축복된 특성을 가졌는가? 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 이런 ‘복 있는 자’ (=천국시민)의 ‘성품적 특성’을 설명하는 마지막 말씀이 오늘 본문의 <일곱번째 팔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그런데 제가 오늘 <일곱번째 복>을 천국시민의 성품적 특성인 마지막 복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다음 시간에 살펴볼 팔복의 마지막 <여덟번째 복>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v. 10)는 주님의 말씀은 천국시민의 ‘성품적 특성’이 아니라, ‘그의 삶의 태도와 신실한 믿음’ 때문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역설적으로 그가 축복된 자 (=천국을 소유한 자)임을 주께서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천국시민의 마지막 내적 특성인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을 우리 함께 오늘 말씀을 통해 이해해 나감으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 불리어지는 복을 깨닫고 또한 누리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가 살펴보면서 먼저 제가 다시 한번 성도 여러분과 확인하기 원하는 것은 주님의 <팔복>은 어떤 세상의 선량하고 타고 난 성품이 어질어서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성격 좋은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 시민’의 특성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각자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내 안에는 이런 천국시민의 복된 성품 (기질/특성)이 자라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 주님의 <팔복>은 우리 각자가 마음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성품이 아니라, 이 복들은 모두 받든지, 아니면 모두 받을 수 없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만일 <천국시민>이라면 어떤 복은 내게 해당하고, 어떤 복은 나와 무관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팔복의 구조에서 잠시 살펴본데로 이 팔복은 마치 날실과 씨실로 촘촘하게 잘 짜여진 섬유조직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원인과 결과로 점점 더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설명하면서도 그것을 <성령의 열매들>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 (the fruit of the Spirit)라고 ‘단수’로 표현하는 것과 같이 동일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 5:22~23)으로써, 이 모든 9가지 성령의 열매는 각자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성령의 ‘열매들’ (the fruits)이라고 말하지 않고 ‘열매’ (the fruit)라고 단수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우리 천국시민의 최종적인 내적 특성은 ‘화평케 하는’는 자로서 열매 맺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서 시작한 성품이 마지막 절정에 이른 성품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v.9)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먼저 무엇이 ‘화평케 한다’ 곧 ‘평화하게 한다’는 의미일까요? 이런 ‘화평하다’는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전쟁,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하다>라고 정의합니다. 말 그대로 ‘서로 갈등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싸우거나 다투지 않는 평온한 상태의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화평케 한다’는 의미는 그것을 뛰어넘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이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먼저,

         첫째, “하나님과 화평한 자의 복”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오늘 <팔복>의 일곱번째 복인, ‘화평케 하는 자의 복’에 대해 묵상하면서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를 화평케 하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명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동일한 영적 원리를 적용해야 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어느 날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이 가장 큰 율법의 명령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주님은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 22:37~39)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이처럼 율법의 가장 중요한 명령은 ‘사랑의 명령’인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요, 이렇게 내가 나를 참되게 사랑할 때, 결국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순서’인데, ‘화평케 하는 자’도 바로 이 <동일한 사랑의 순서>가 영적으로 적용된다고 저는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평화’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를 <로마서 5장>을 시작하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1-2)라고.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제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를 누리자’라고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이렇게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평화를 격려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이 잘 아는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모든 자는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불러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왜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는지? 그 분만이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과연 무엇이 화평케 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런 ‘화평의 삶’은 제가 앞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부정적으로 보자면 ‘서로 갈등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싸우거나 다투지 않는 삶’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다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이런 ‘화평의 삶’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방금 <로마서 5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평화하게 된 까닭’은 바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와 함께 거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 받고, 그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의롭다고 불러 주시고 기뻐하시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우심’ (롬. 1:17)을 통해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평화의 출발은 ‘평화의 주인’되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10)고 선언하는 이유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듯이, 이 평화도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과 평화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셨습니까? 그리하여 ‘양자의 영’ 곧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 아버지를 기뻐하고 간절히 추구하는 그분과의 평화를 누리십니까?

둘째, “나 자신과 화평한 자의 복”입니다: 저는 얼마전에 집사람과 함께 유튜브에서 잘 알려진 한 소통강사가 ‘home stay in London’이라는 기록영화를 소개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기록영화는 간단히 설명하면, ‘남태평양에서 살아가던 몇몇의 원주민들이 런던에 방문하여 런던의 한 가정집에서 여러 날을 지내면서, 자신들이 소유하지 않은 많은 문명의 이기나 생활습관을 보며 신기해 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이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 기록영화는 끝이 났다는 것’인데, 그들의 마지막 말이 그분에게 깊이 남았다고 합니다. 그 원주민들은 얼굴에 순수하고 꾸밈없는 미소를 만면의 지으며 “여러분도 저희처럼 행복해지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강사는 “저는 지금동안 수십년 동안 수없이 많은 시간을 수많은 분들 앞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를 강의했지만, 그 원주민들처럼 ‘저처럼 행복해지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고 말했을 때, 저 또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이번 설교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해서 제의 가슴을 떠나지 않고 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나는 과연 오늘 말씀을 전하며, 성도들에게 ‘여러분은 저처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고 난 뒤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자신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것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라는 말씀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 15:5)는 귀한 말씀을, 그리고 ‘자신이 가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 16:1~24). 그렇게 주께서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고 도전하시는 말씀이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고 말입니다. 이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외적인 핍박이나 환난이 없는 가운데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큰 환난과 고난이 크면 클수록 더욱 커지는 역설적인 능력의 평화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신 ‘기묘자요, 모사요, 평화의 왕’ (사. 9:6)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도 선언하셨듯이, 세상 가운데 힘든 인생들을 부르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고 평화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 나감으로, 그분 안에서 마음의 쉼을 누려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평화요, 만족과 영혼의 안식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평화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십니까?

셋째, “이웃과 화평한 자의 복”입니다: 저는 ‘성 프란시스코’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제목의 <기도문>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그는 기도했습니다. 사실 12세기경에 살았던 교부, 성 프란시스코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따라 합당하게 자신을 사용하셔서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그로 인해 여러분 자신과도 평화와 안식을 누리고 있다면,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돌아보아야 할 것은 ‘이웃’과 화평한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성도가 이웃과 화평한 삶을 살아야 함에 대한 여러 말씀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보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라고, <야고보서>에서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7,18)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진실은 ‘우리 성도가 이제 이웃을 향해 평화를 실천하게 되는 통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온전하신 인격 (성품)을 ‘천국시민’된 우리 모든 성도가 본받고 닮아가야 할 푯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이웃에게 평화를 실천하는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 그리고 그분의 말씀과 그의 영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이웃과의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짧고 굵게 잘 웅변해 주는 어구가 이것입니다. “Know Jesus, know peace; No Jesus, no peace”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의 마지막 ‘인격과 믿음으로 열매 맺는 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을 더욱 닮아가는 것이요,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 불리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주님은 이 ‘복된 자의 가르침’는 <세상 불신자를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 곧 ‘천국 시민’을 대상으로 주시는 교훈>임을 이해할 때,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자녀로서 화평을 이루며 합당하게 살아가는 성도를 기뻐하고 칭찬하신다>는 뜻이요, 또한 <이웃들 (가족, 친구, 교회지체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 혹은 딸이 맞아요’라고 인정해 준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4-15) 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의 평화가 되셔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크리스챤과 불신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심지어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 우리가 원했던 원치 않았던 때로는 서로 갈라지고 분열되고 원망하는 관계 속에서 평화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갈라진 둘을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선하신 사랑과 온전하신 인격으로 맺어 주시고, 다시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평화를 누리십니까?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누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를 누리십니까? 그리고 영적으로 거듭날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날마다 배워 나감으로 영혼의 참된 안식과 쉼을 누림으로 여러분 자신과 평화를 누리십니까? 이를 통해 이 복된 평화가 성도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 교회공동체 그리고 세상으로 흘러 넘쳐서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곳을 평화로운 곳으로 바꾸어 가십니까?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화평케 하는 자’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모든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 인정함을 받게 되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