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3, 2025

“감사함으로” (With Thanksgiving)

Preacher:
Series:
Passage: 시편 (Psalms) 100:4~5
Service Type:

“감사함으로”

(With Thanksgiving)

11-23-25

본문말씀: 시편 (Psalms) 100:4~5

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and His courts with praise; give thanks to Him and praise His name.)

5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For the Lord is good and His love endures forever; His faithfulness continues through all generations.)

[설교 요약]

          저는 올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시편100편>의 말씀으로 감사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v.4)라고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100편>은 ‘감사의 시’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v.1)라고 감사의 찬양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절>에서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v.3a)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일까요?’ 그것은

  • 첫째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v.3b)라고 말입니다. 여호와는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 둘째 <우리를 기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v.3c)라고. 여호와는 우리를 창조하실 뿐 아니라, 그의 양들을 눈동자같이 보호하고 지키시는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입니다 (시. 23편).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또한 선한 목자처럼 악한 자들로부터 그의 양들을 지켜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기에, 시인은 이렇게 소리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 찬양하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v. 4)라고.

또 한가지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려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는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라고 놀랍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성도가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기억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제사’를 올려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축복된 삶은 더 없을 것입니다 (‘웨스터민스트소요리문답/1번).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가 그분께 중심의 감사를 올려 드릴 때, 그로 인해 “나를 영화롭게 하였다”고 놀랍게 선언하여 주십니다. 바라기는 이번 추수감사절기 뿐만 아니라, 날마다 믿음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감사의 제사’를 올려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축복된 삶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이번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무슨 말씀으로 성도 여러분과 은혜를 나눌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나는 나 자신부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날마다 순간마다 베풀어 주시는 그 폭포수 같은 은혜와 도우심을 영적으로 깨닫고, 내 입술과 가슴으로 감사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v.4)라고 고백하는 말씀가운데, 우리 각자가 자신을 성찰하며 ‘나는 과연 하나님께 감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이 시간을 개기로 더욱 더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영화롭게 하는 복된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원래 미국에서 크리스마스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명절인 ‘추수감사절’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년전에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온 청교도인들이 하나님께 추수감사의 기쁨을 예배로 드린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렇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에 처음으로 미국으로 출발한 청교도인들은 총 102명이었는데, 이들은 그해 9월 6일에 도착한 곳은 미국 동북부 해안의 <플리머스>라는 도시였습니다. 그들이 긴 항해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신대륙 미국에 도착했지만, 기록에 의하면 그들을 맞은 것은 그해 겨울의 유난히 혹독한 추위와 그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과 사나운 짐승 그리고 식량부족으로 인한 배고픔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혹독한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이 되어 살아남은 자들은 불과 50명에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땅과 소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다시 힘을 얻고 씨를 뿌리고, 한 여름동안 땀을 흘리고 수고함으로 그해 가을에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들 청교도인들은 이 새로운 땅에서 수고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거두어들인 첫 수확의 열매, 곧 풍성한 곡식과 과일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추수감사예배’로 올려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감격의 첫 추수감사예배를 드릴 때 혼자만 드린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던 인디언 원주민을 초청했는데 이들이 오면서 ‘칠면조요리’를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게 된 것이 개기가 되어 오늘날도 추수감사절에 ‘칠면조요리’는 빠질 수 없는 전통음식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요즘은 크리스챤이 아니더라도, ‘정신건강’과 ‘스트레스해소’차원에서도 <정신과 의사>나 <치유 상담가들>에 의해서 ‘감사하십시요’ ‘감사의 일기를 쓰세요’라고 조언하는 말들을 인터넷이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접하게 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자신이 살아가는 상황이나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감사하는 습관이나 태도’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정신의학적으로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에 월등하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힘이 주어진다는 것이 세상의 과학자들 (=의학자들)도 임상실험을 통해 인정하는 놀라운 ‘감사’의 효과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론적인 ‘감사의 자세와 태도’와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분명한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감사의 삶>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또한 우리는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100편>말씀은 시편 전체 구조에서 볼 때, <시편 95~100편>에 이르는 총 6편의 ‘신정시’(神政詩)모음의 마지막 시편입니다. 여기서 ‘신정시’(神政詩/Divine Poetry)는 <절대적인 주권자인 하나님이 우주와 역사를 다스리시는 경륜과 섭리를 노래하는 시>입니다. 그리고 오늘 <시편 100편>은 ‘감사의 시’라는 부제 (=표제어)가 붙은 시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들고 제사와 예배로 나아갈 때, 이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렸던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4절>에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v.4) 라는 묘사를 통해 성경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전’ 곧 ‘하나님의 성전’의 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뜰을 지날 때 불렀던 대표적인 노래가 오늘 이 <시편 100편>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시편 100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여호와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하나님’ 뿐 아니라, 온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임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시편 100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v.1)라고. 단지 이스라엘민족 뿐 아니라, 모든 열방의 민족과 그의 지음 받은 창조물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이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창조주 하나님만이 그 선하신 뜻을 따라 그 권능의 손으로 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분을 기쁘고 즐겁게 부르고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즐거이 부를지어다”라는 <1절>말씀에서 ‘부르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동사 ‘하리우’로써 그 동사의 원형인 ‘루아’는 그 단어의 의미가 단지 ‘부르다/노래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놀라움이나 큰 기쁨으로 인하여 소리쳐 함성을 지른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특히 구약시대에 왕이 어떤 도성을 방문하여 입성하는 가운데, 기다리던 백성들이 왕을 맞이하는 기쁨과 경의로써 크게 함성으로 외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루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다섯절>로 구성된 <시편 100편>의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v.3a)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왜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신지?’를 <3절>에서 두가지로 설명합니다. 그 첫째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v.3b)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성경의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진정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인 둘째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의 양이요, 그분은 우리를 기르시는 목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v.3c)라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의 양들을 눈동자같이 보호하고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고 사랑하는 <시편 23편>의 다윗의 고백은 또한 여러분과 저의 고백인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3) 이처럼 사랑받는 한 마리 어린 양이 되어 그의 강한 팔에 안겨 그 넓은 가슴 속에서 보호 받음으로써 악한 원수들이 모든 교활한 공격을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안정감과 기쁨으로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양인 우리 성도들은 ‘목자 되신 주님의 지켜 주심으로 악한 자가 우리를 건드리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요일. 5:18) 은혜와 특권을 누림으로 언제나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본문 <4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면서’ 감사와 기쁨의 찬송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요, 우리를 기르시는 선하신 목자입니다. 그럼으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v. 4)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남은 시간 <시편 100편>의 이 찬양의 시를 함께 묵상하며 이 속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그 깊고 진한 감사의 의미를 살펴보고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각자가 일년에 한번 ‘추수감사절 예배’때만이 아니라,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을 자원함으로 중심가운데 감사할 수 있는 이런 축복된 삶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럼으로 이런 의미에서 저는 먼저 성도 여러분과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왜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시편 50편>마지막 말씀을 대신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하나님은 매우 분명하게 ‘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자인지?’를 짧고 간명하게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보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이 되고 그분을 존귀하게 하는 복된 삶이 무엇인지를 더 잘 설명한 성경구절을 저는 기억하기 힘듭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아버지를 진실로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드리는 것보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와 겸손함으로 하나님과 동행’ (미. 6:7,8)하는 것이요, 또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시. 51:17)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 그 중심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언제나 진실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통하여> 흘러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시편 100편>에서 시인이 감사함으로 크게 노래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곧 그 믿음은 ‘여호와만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요, 더 나아가 그 하나님은 ‘창조만 하시고 우리를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양들을 악한 짐승들로부터 신실하게 지키시는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입니다. 그럼으로 여러분과 제가 말로 만이 아니라, 날마다 믿음을 통해 그의 말씀의 약속을 따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목자되신 하나님을 따라가고, 순종해 나갈 때 그분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해 나갈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넘치는 감사로 날마다 순간마다 선하신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 드림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설교말씀을 시작하면서 잠깐 언급했듯이, 제 자신은 과연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제사를 올려드리고 있는지 지난 한주간 돌아보았는데, 제가 ‘감사’에 대해 묵상하면서 깨닫고 느낀 점을 성도 여러분과 나누며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먼저 제가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저 자신이 얼마나 감사가 부족한 자인지? 얼마나 감사가 메말라 있는 존재인지를 지난 주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삶 속에 부어 주시는 그 수많은 감사를 저는 처음에는 좀처럼 자연스럽게는 고백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묵상하는 가운데 저는 조금씩 금맥을 캐듯이 감사함 없이 묻혀 있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저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가운데, 그동안 제 자신의 1) 어린시절에 겪은 종교적인 갈등에 대해 늘 불행하고 암울한 시간이라고 만 치부했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볼 때 그 시기에 그런 영적 홍역 같은 아픔의 시간을 겪었기에 지금은 좀더 영적 포용성과 애정을 가지고 저처럼 신앙에 갈등을 겪는 청년들을 확신 가운데 도울 수 있음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크신 경륜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2)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격 없는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으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게 하시고, 장차 주님과 누릴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3)그런가 하면, 30여년전 청년사역의 비젼을 안고 미국에 유학 온 이후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전공도 바뀌고 사역지역도 바뀌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처음 하나님께 구했던 것처럼 부족한 자를 통해 ‘청년들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4)그리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 어느 한가지도 당연한 것은 없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신 은혜와 긍휼하심 때문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음을 생각할 때 또한 감사드립니다. 5) 또한 요즘 하나님께서 저의 눈에 눈물을 더 풍성히 주셔서 저의 덤덤하고 메마른 마음을 감동으로 적셔 주시고, 마음의 상처를 더욱 치유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6) 지난 주말 모처럼 교회가족들과 1박 캐빈의 밤을 통하여 청년들과 더 가까이 대화하고 삶을 나눌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7) 그리고 주님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을 붙들고 ‘죽음 때 비로소 다시 사는 생명’의 진리를 생각하며, 날마다 ‘저의 자아를 죽이고자 힘쓰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8) 아직까지 손과 발이 힘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 되어서 후회 없는 사역 감당토록 소원과 열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9) 그동안 저는 ‘제 인생의 그릇에 담겨 있는 내용’을 바라보며 늘 ‘왜 이것 밖에 없는지?’ 불만스러워했지만, 그것이 아니라 ‘아직도 이것만큼이나 남겨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10) 15년전에 ‘Midtown Church’ 미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열린 마음으로 이곳에서 예배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적극 후원하여 줌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11) 저희 가족들, 손사모의 헌신과 섬김으로 내조하고 동원이와 동률이가 각자 자기의 앞길을 잘 개척해 나가고 늘 청년 후배들을 돕고자 하는 애정의 마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12) 또한 아직 가공하지 않은 금광석과 같은 뛰어난 재능과 스마트한 머리를 가진 우리 교회의 모든 청년들 한사람 한사람이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 목회자인 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저를 품어주고 용납해 왔음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떤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으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구체적인 감사의 제사를 드리십니까? 그리고 그 감사의 내용은 풍성하게 속에서부터 흘러 넘칩니까? 아니면 감사할 것이 별로 없고, 지금까지 살아온 매사가 당연한 것이요, 여러분의 재능과 노력의 결과라고 여기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행하여 주신 그 수없이 많은 은혜의 손길을 깨닫을 수만 있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지금의 우리의 모습에서 당연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설령 여러분이 자신의 스마트한 머리와 타고난 재능이 출중함으로 오늘의 여러분의 삶을 일구어 왔을지라도, 그 머리와 재능을 주신 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재능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라고.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깊고 오묘한 구원의 비밀을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언하셨듯이 진정한 감사의 제사를 올려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진실로 축복된 인생을 우리 모두는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날마다 순간마다 베풀어 주시는 폭포수 같은 은혜를 점점 더 깨닫아 나가고, 풍성히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감사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 감으로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제사를 올려 드림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즐거워하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그분의 아들과 딸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