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의 동기” (Motivation For Fasting)
“금식의 동기”
(Motivation For Fasting)
5-4-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설교 요약]
오늘은 경건생활의 핵심요소인 ‘구제’와 ‘기도’에 이어 마지막 세번째 ‘금식’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금식’의 사전적 의미는 “치료나 종교, 또는 그 밖의 이유로 일정기간동안 음식을 먹지 않음”이라고 정의하는데, 우리가 이해할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금식’은 요즘 유행하는 자신의 건강이나 다이어트를 위한 금식 (=단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오늘 ‘금식’에 대한 말씀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은
- 주님은 ‘금식을 긍정적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
- 그러나 구제와 기도와 마찬가지로 ‘금식도 외식의 강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 따라서 ‘금식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을 점검하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금식을 명령한 유일한 구절이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대속죄일’ (The Day of Atonement)에 행한 금식입니다. 이날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제물로 희생제사를 드렸고, 백성들은 명하심대로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한편 금식을 ‘의무’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고 자신과 민족의 죄를 자복함으로 행했던 사례를 성경에서 수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에는 ‘모세의 40일 금식’ (출.32장), ‘미스바에서 금식의 회개’ (삼상. 7장)등과, ‘예수님과 초대교회들의 금식’이 신약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금식의 성경적 가르침일까요?” 그것은
첫째, “영적 훈련이 아니라, 영적 슬픔의 결과”라는 것: 금식은 본질적으로 ‘훈련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의 죄를 회개하고 슬퍼하는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느. 9:1~4).
둘째, “어떤 날짜와 규칙으로 묶어두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 “하나님이여 나는 ~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눅. 18:11~12)라는 어떤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날짜와 규칙을 정한 금식은 자칫 ‘영적 자랑거리’가 됨을 주의해야 합니다.
셋째, “사람의 시선은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것: 그럼으로 주님은 ‘금식할 때에 남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보이려 하라’ (v.16~18)고 도전하십니다.
모쪼록 사람을 의식한 금식이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께 죄를 자복함으로 죄 용서와 부흥의 은혜를 경험하는 금식 행하는 성도 모두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은 경건생활의 마지막 세번째 ‘금식’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앞 시간에 함께 나누었듯이,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이 있습니다. 그동안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진정한 ‘구제’는 무엇이며, 또한 참된 ‘기도’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에 이어지는 순서로 본다면, ‘주기도문’ (마. 6:9~13)이라 일컬어지는 기도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 오늘 본문의 ‘금식’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구제’와 ‘기도’에 이어서 경건한 삶의 실천의 마지막 주님이 가르침인 ‘금식’에 대해 이번 주에 나누고 나서, 다음주부터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으로 돌아와서 더 구체적으로 함께 그 믿음과 영에 충만한 보고인 그 기도문의 내용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먼저 ‘금식’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잠깐 살펴보겠는데, 사실 ‘금식’은 오늘날 ‘신앙적’인 동기라기 보다는 ‘건강’이나 ‘체중조절’ (=다이어트)등의 육체적 컨디션의 이유로 ‘금식’을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금식’에 대한 사전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면, 금식은 “치료나 종교, 또는 그 밖의 이유로 일정기간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게 금해짐, 혹은 먹지 않음”이라는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정기간 ‘완전히 음식을 끊는 행위”를 금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금식하는 이유가 요즘에 와서는 앞서 설명 드렸듯이, 신체에 관련된 체중관리나 어떤 치료목적에서 행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금식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성경적 개념’에서 볼 때, 금식은 이와 같은 단순히 육체적 건강과 컨디션에 관련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영적이요 신앙적인 관련이 있는 경우를 금식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주께서 금식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v. 16)라고. 이 <16절>에서 언급된 “주님의 말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주님은 ‘금식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부정적으로 ‘금식하지 말라’거나 ‘금식은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도리어 금식하는 것을 전제로 ‘어떻게 금식하는 것이 올바른 금식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할 때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 시간에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예수님 당시에서도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구제, 기도, 금식>이었는데, 이점에 있어서 주님도 그 중요성을 인정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금식이 가져오는 신앙적인 영향력, 곧 경건한 삶의 영향력은 매우 큼을 주님도 분명히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둘째) ‘금식도 구제나 기도와 마찬가지로 외식하는 자들의 유혹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v. 16)라고 말입니다. ‘구제’와 ‘기도’ 뿐 아니라 ‘금식’도 영적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자 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외식하는 자의 강력한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금식의 부정적 면인데, 금식을 통해 이런 외식하는 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게 될 때 하나님께로 부터는 결코 상을 받지 못한다고 주님은 강력하게 도전하십니다. 왜냐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마음의 동기와 중심을 보시기에 사람에게 보이고, 사람에게 영광 받고자 하는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금식하는 동기와 목적을 돌아보고 행하라’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금식하고자 하는 것이냐? 는 근본적인 질문과 도전을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말씀을 진행해 나가면서 계속해서 살펴 볼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 기록된 금식에 관련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하나님께서 금식을 구체적으로 명령한 것은 구약성경에서 <레위기 16:29~34>말씀이 유일합니다. ‘레위기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1년중 하루를 정하여 ‘대속죄일’ (the Day of Atonement)로 선포하시고 그날에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은 <금식을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길이 지킬 규정이다. 일곱째달에 들어 그 달 십 일이 되면 ~ 모두 단식 (금식/)해야 하며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된다. 그 날은 너희의 죄를 벗겨 너희를 정하게 하는 날이므로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모든 잘못을 벗고 정하게 되리라” (레. 16:29~30)라고. 그렇다면, ‘대 속죄일’은 어떤 날일까요? 그 ‘대 속죄 예식’의 핵심은 ‘죄 사하심’입니다. 그날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 속죄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자신과 민족의 죄를 위해 속죄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날 각자 자신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통회하고 자복하며 죄 용서하심의 자비와 은혜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구약의 ‘대속죄일’에 백성들이 금식을 행하며 자신의 죄를 자복했던 것이 금식의 중요한 영적 의미라고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슬퍼하고 자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이러한 금식을 통해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속죄일’에 하나님의 명령으로 주어진 <금식>이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매우 영적으로 충만한 금식을 행했던 사례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신구약 성경을 통해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구약에서 본다면, 모세가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고자 시내산에 올라가서 ‘사십일 사십야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십계명을 받습니다 (출. 32장). 곧 모세는 ‘40일 금식기도’ 가운데 모든 율법의 뼈대가 되는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민족이 범죄함으로 블레셋에게 패배했을 때, 온 이스라엘백성을 ‘미스바로 모으고 여호와 앞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종일토록 백성과 함께 죄를 자복했습니다 (삼상. 7장). 그리고 ‘에스더’는 자기민족 유대백성이 멸절 될 위기가운데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죽음을 뛰어넘는 믿음의 각오를 하며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에. 4:16)라고 자신의 친척이자 민족의 지도자인 ‘모르드개’에게 당부했습니다. 신약성경은 또 어떻습니까? 침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언급하시듯이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금식을 생활화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 9장). 우리 주님도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기도하시는 가운데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음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눅. 4장).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경우, ‘안디옥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파송 (행. 13장)했고,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의 위기때마다 그리고 교회의 중요한 결정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뜻과 이끄심을 간구할 때마다 교회공동체는 금식기도 가운데 인도함을 받았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통은 기독교회역사 가운데 진정한 영적 개혁과 위기의 순간마다 빠지지 않고 신실한 영적 지도자 (선각자)들을 통해 이어져 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나 쯔뱅글리와 칼빈 그리고 영국의 웨슬리 형제와 윗필드에게 있어서도 금식기도는 그들 신앙의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단지 이런 금식이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도전하시는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같이, 그리고 ‘중세시대 카톨릭교회’의 날짜와 시간을 지정하고 관행처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나라의 위기의 순간과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지만,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 가운데서도 ‘금식’이라는 말은 ‘건강이나 체중관리’와 같은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우 생소한 단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기독교에서 대를 이어 믿음의 선진들이 행해왔던 ‘금식기도’의 본이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리게 된 것일까요? 이점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목사는 그 주된 이유의 하나로써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금식의 모습이라든지, 그리고 중세시대 카톨릭교회에서 금식을 날짜로 정해놓고 습관적으로 행했던 의미 없는 종교적인 관행’에 대한 거부감과 반발심의 결과라고 날까롭게 지적합니다. 말하자면, 금식을 강조한 나머지 지나치게 율법화하고 강제화하여 날짜와 시간을 정해놓고 지키고자 강요한 것이 비신앙적 결과를 낳았다는 부정적 견해가 이제는 도리어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아예 금식기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도 함께 버린다’는 서양 속담과 같이 금식의 잘못된 관행 때문에 금식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우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금식은 오늘 주님께서 역설적으로 도전하시듯이 ‘금식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금식을 올바로 행할 때 ‘내 죄와 허물을 겸손히 하나님께 자복하는 가운데 영적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부흥의 은혜를 누리는 통로’가 됨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정리해 나가면서, 그렇다면 “무엇이 금식의 성경적 가르침인지?”를 함께 생각하며 말씀을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그것은 첫째, 본질적으로 “금식은 영적 훈련이 아니라, 영적 슬픔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구약 성경전체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금식의 본질’은 우리 성도의 영적 훈련의 차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우리 개인이나 신앙공동체 혹은 국가적 매우 심각한 위기상태에 직면하여 이것이 ‘나 자신과 공동체의 죄와 허물 때문’임을 깨닫음 (인식함)으로 인해 <깊은 영적 슬픔가운데 하나님께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그분의 죄 용서하심과 새로운 영적 부흥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결과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신앙성숙’이 1차적 출발점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훌륭한 사례의 하나로써 ‘느헤미아와 전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유다백성들’이 행했던 금식의 모습일 것입니다. <느헤미야 9장>에 보면 “그 달 이십 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릎쓰며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느. 9:1~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 왕국이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이후에 지도자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이 모든 민족적 재앙과 위기가 우연도 아니요, 재수없어서도 아니요, 하나님이 무능하거나 나쁜 하나님이어서도 아니요, 오직 자신들의 우상숭배와 죄악 때문임을 철저히 인식하고 함께 금식하며 간절히 하나님의 죄 용서하심과 은혜를 구했던 것을 우리는 기록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현재 나의 상태는 어떠 한지를 돌아볼 때 그리고 우리의 신앙공동체와 국가의 위기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과연 ‘금식은 필요 없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금식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둘째, “금식을 어떤 날짜와 규칙으로 묶어두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한국교회의 목사님이나 지도자들은 금식기도를 어떤 특별한 경우에만 하신 것이 아니고, 늘 생활화하셨습니다. 이것은 남에게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요, 늘 영적으로 깨어 있고자 함이요, 자신을 쳐 주께 복종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영적 정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당시 서구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 기독교가 선교 100년도 안되어서 이토록 급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성도들의 ‘새벽기도’와 더불어 신실한 성도들의 이런 ‘금식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금식기도’가 일부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마치 종교적인 ‘훈장’처럼, 이력서 ‘스펙’처럼 영적 자랑의 도구로 전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소개할 때 ‘40일 기도’를 언제 그리고 몇번 했는지를 가는 곳마다 촘촘히 밝히는 것입니다. 어느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눅. 18:11~12)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자랑하고자 함이 아닙니까?!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금식할 때에 너희는 ~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v. 16~17)고 도전하시는 이유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지속적인 영적 훈련이나 규율의 한 요소로 묶어두고자 할 때, 우리는 원래의도는 그것이 아닐찌라도 어느 순간 ‘금식’에 대해 열심을 내고 많이 행하면 할수록 자기 의와 자기 자랑으로 사람 앞에서 나팔을 불고, 교묘하게 드러내고자 안간힘을 다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측면임을 오늘 주님은 분명히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셋째, “금식의 결론은 사람의 시선은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다른 사람의 시선과 나 자신도 잊어버리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추구하는 것이 온전한 ‘금식’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할 때 ‘헛된 사람의 시선과 평가와 박수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집중’하게 될 것이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임’을 확신하고 더욱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성경에서 ‘금식을 명령한 율법의 말씀’이 <레위기서 16장>에서 유일하게 한번 나오는데, 그것이 <대속죄일>에 행하는 금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속죄일’에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물을 하나님께 가지고가서 피 흘려 드림으로 죄용서의 예식을 드렸던 상징적인 예언은, 결국 구약에서 약속하신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공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존 맥도날드> 목사는 <히브리서 9장>말씀을 인용하며, ‘금식’에 관련된 오늘 본문말씀을 강해설교 하면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1,12)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속죄의 제사를 드릴 필요도, 금식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제사를 드릴 영적 필요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여전히 ‘금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이 저는 우리 주님께서 오늘 금식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결론이라 믿습니다. 그것은 ‘이제 사람의 시선과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잊어버리고 오롯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을 의식하고 그분만을 추구하는 것이 금식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로 불리는 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하고 자신과 민족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의 상황 한가운데 하나님께 절규하고 호소하지만, 결국 이 슬픔과 절망의 기도가 변하여 소망과 감사와 기쁨의 찬양으로 끝이 나게 됨을 봅니다. 그 대표적인 ‘예레미야’의 기도가 <예레미야 애가>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 3:22~23) 라고 말입니다. 금식을 통해 더욱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드리는 진정한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의 죄 용서하심의 은혜를 갈구하는 기도는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 기도의 응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 보다도 더 나를 잘 아시는 선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죄 용서하심과 은혜의 폭포수를 넘치도록 성령의 은혜로 확신하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최근에 깊은 방황과 피할 수 없는 죄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낙심해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관계가 꼬이고 사방이 꽉 막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내 능력과 의지의 한계상황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지금이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할 가장 적절한 시간이 아닐까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새롭게 하심의 은혜를 간구할 최적의 기회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바라기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사람에게 박수 받고 자기의 의로움을 과시하고자 하는 헛된 금식이 아니라, 겸손하고 진실하게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며 금식 가운데 죄 용서하심과 다시 영을 새롭게 하시는 부흥의 은혜를 경험하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