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자세” (Attitude In Prayer)
“기도의 자세”
(Attitude In Prayer)
4-27-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5~7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설교 요약]
<마. 6장>을 시작하면서, 주님은 천국시민이 이제 구체적으로 ‘경건의 삶’을 실천하는 3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첫째가 지난 시간 살펴본 올바른 <구제>입니다. 그리고 오늘 두번째로 올바른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주님은 ‘구제’와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도 ‘외식’하는 자의 위선 곧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에서 기도하는 태도’를 강하게 경계하셨습니다(v.5a).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v.5b).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올바른 ‘기도의 자세’일까요?” 그것은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아버지’라는 호칭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구약의 어떤 신실한 성도들도 감히 부를 수 없었던 ‘아버지’라는 호칭을 주님은 부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도의 장소는 <골방>이라는 것”입니다: ‘골방’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인데, 주님은 ‘외식의 유혹을 피하고자’ 그리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만 오롯한 만남을 가지도록’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셋째, “기도의 시간은 <항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될 것” (눅. 18:1)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쉼 없는 간구에 신실하게 응답하실 뿐 아니라, 이런 쉬지 않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숨을 쉬듯이 순간 순간마다, 각자의 골방에서,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더 깊은 사랑과 경외함으로 복된 기도 가운데 나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지난번 시간에 주님의 산상수훈이 <마. 6장>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국면에 이르렀음을 나누었습니다. 지금까지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마. 5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시민’의 ‘영적 특성’이 무엇이며, 이들 삶의 <영적 원리>를 삼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하는 것을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6장>을 시작하면서는 이제 이런 율법의 <영적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천국시민’이 이제 어떻게 그 원리를 <삶 속에 실천>할 것인가가 <6장>의 ‘중심주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건한 신앙생활’의 3가지 핵심 실천사항인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중에서 ‘구제’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첫번째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두번째 경건한 삶의 실천방법인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기도만큼 심오하고 우리의 교만을 꺾고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으로 인도하는 것도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기도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나누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에 대한 본질적이고 합당한 자세는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한걸음 더 온전히 깨닫아 나가는 시간되기를 기대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말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주께서 <6장>을 시작하시면서 앞서 말씀드린 3가지 경건한 삶, 곧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의 올바른 실천방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일정한 패턴’ (음률)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여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지난번 시간에 ‘올바른 구제’를 가르쳐 주시면서 <1절>에서 “사람에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v.1)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주의하라”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을 이어지는 <18절>까지 후렴처럼 계속하십니다. 때로 주님은 “은밀하게 하라”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결국 ‘같은 맥락’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외식하는 자’와 같이 남에게 보이고자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라는 ‘천국시민’ (크리스챤/성도)의 핵심적인 경건한 삶의 실천방법을 주님은 가르쳐 주시면서, 먼저 강하게 ‘외식’ (남에게 보여주려는 태도)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식을 경계하는 것이 참된 경건을 실천하는 첫 걸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되는 것은 ‘외식’에 대한 경계는 경건한 삶의 시작이지, 목표 (종착력)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목표는 더 높고, 더 깊은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이제 ‘구제’에 이어 ‘기도’에 대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는데, 제가 방금 언급한데로 주님은 이렇게 경계하십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v.5)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자 하는 자들이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구제’하는 자들이 범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잘못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외식하는 자’와 같이 ‘남에게 보이려고 구제하지 말아야 하듯이, 또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1절>에서 도전하시듯 이런 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한다)” (v.1)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스스로 칭찬과 박수를 받고 이미 자기 영광을 누리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상(과 칭찬)은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이런 ‘외식의 경계’를 통해 참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과연 “무엇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올바른 ‘기도의 자세’일까요?” 그것은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요, 아니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차이점을 이해하십니까? 먼저 오늘 본문말씀에서 주님이 강조하시는 중요한 이슈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방인들처럼 기도를 길게 하고 끊임없이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에 언제나 관심 가지시고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구약시대에 신실하게 온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기도를 행했던 <기도의 용사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든다면, ‘야곱’의 경우엔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가로챈 후 20년간 외삼촌 라반의 집에 피해 있다가, 나중에 형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얍복강’을 건너기 마지막 마지막 전날 밤,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했다는 신비로운 말씀이 <창세기 3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밝히고 있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가 밤새도록 씨름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하고, 목숨을 건 기도’라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야곱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밤, 과연 그가 하나님께 어떤 간절한 목숨을 건 기도를 행했는지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다 알 수 없지만, (한가지 성경이 밝히는 점은 ‘이 씨름 가운데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그 뼈가 위골 되었다는 것)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혹은 ‘하나님의 황태자’라는 놀라운 축복된 이름을 그날 밤 바꾸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구약에는 언제나 무릎 꿇어 기도를 드렸던 선지자 ‘사무엘’이 있었는데, 그는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서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겠노라)” (삼상. 12:23) 라고 선언했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기도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를 누린 다니엘’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유대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고, 볼모로 대부분의 백성들과 함께 끌려 가게 되었는데, 그는 결코 희망을 잃거나 자포 자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청년시절부터 ‘뜻을 정하여 바벨론 왕궁의 왕이 주는 기름지고 값진 음식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결한 음식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런 순결한 믿음과 하나님의 지혜에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중심에는 ‘뜻을 정하고 날마다 정해진 시간마다’ 어떤 손해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루 세번씩 하나님께 드린 무릎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단. 6장).
이렇게 구약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으로 기도의 귀중한 모본을 보인 여러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오늘 본문을 포함한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한가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은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v. 6)라고. 이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곧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our Heavenly Father)라고 부르셨을 뿐, 우리에게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혹시 성도 여러분 종에 저의 이 말을 들으며 속으로 ‘그게 뭐 그리 대단합니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요?!’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요, 심히 놀랍고 기쁨과 찬양과 경배를 영원토록 드려야 할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던 구약의 신실한 기도의 조상들, 곧 야곱과 사무엘과 다니엘도 분명히 하나님을 향해 ‘전능하신 하나님’ ‘왕이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선하신 하나님’이 되심을 고백하고, 그렇게 온 맘 다해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민족은 비록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택하신 복된 민족이었지만, 결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과 영광이 너무도 크고 존귀하시기에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정확하게 부르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단지 하나님 이름의 <모음자>만 따와서 이것을 적당히 <자음>과 합성해서 때로는 ‘아도나이’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죄 많은 우리 인간이 감히 부르기에는 그분은 너무도 거룩하시고,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너무도 성결한 두려운 존재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도와 우리 신약시대의 성도의 근본적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우리 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거룩하게 대하지 않아도 되고, 그분께 영광과 존귀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그 하나님은 이제 경외함과 신적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그 선하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을 더욱 더 경배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영적 확신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성도와 우리 신약성도의 핵심적 차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신분이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변화요 기쁨의 원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 크리스챤들 중에서 이런 우리 신분에 대한 인식을 깨닫지 못하는 성도가 많고, 이것이 가져오는 기도의 능력과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깨닫고 확신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의 기도는 벽을 보고 하는 그런 막막한 기도도 아니요, 3분만 기도하면 할말이 없는 그런 형식적인 관계의 기도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곧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 6:9)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녀의 권세와 특권을 가진 기도’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하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모든 기도의 첫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의 장소는 <골방>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말씀하심을 ‘우리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으로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의 기초 (foundation)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써 우리가 행해야 할 기도의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v. 6)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각자 하나님 아버지께 <골방>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골방>은 무엇입니까? ‘골방’은 단순히 ‘사방이 꽉 막혀 있고, 어두컴컴한 밀실’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골방은 ‘주위에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런 곳이라면, 그 어느 곳도 골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골방은 우리 주 예수님에게는 팔레스타인 빈들이나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던 감람산이 주님의 골방이었고, 평생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수없이 경험한 로렌스 형제의 경우는 그가 수도원사제들의 낡은 구두를 수선하던 작업실이나 식사 준비하며 바쁘게 움직였던 주방이 그의 골방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여기 모인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 있어서는 평소 여러분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부방이나 강의실 혹은 회사의 휴게실이나 식사하고 설거지하는 싱크대와 산책하는 그곳이 골방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골방은 어떤 특정한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대화와 간구 그리고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골방이기에 우리가 조금만 관심과 열심을 가지고 찾으면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제가 질문하기 원하는 것은 “왜 주님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v. 6)고 말입니다. 저는 그 <첫째 이유>는, 이렇게 골방에 들어가 기도함으로써 ‘외식’ (=위선)하는 자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식으로, 내가 얼마나 기도를 경건하게 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열정적이고 아름답고 유창하게 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골방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유>는, 이 골방은 ‘우리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집중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서 설명 드렸듯이, <골방>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주위 사람의 시선과 평가 그리고 소음이나 분주함과 같이 우리가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러 주위의 산만한 요소에서 자유로와져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장소>인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를 그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들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의 동기와 마음의 중심을 헤아려 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과장’할 필요도, ‘숨길’ 필요도 전혀 없고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실하고도 겸손하게, 또한 간절히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로지 하나님과만 만나는 골방’에서 말입니다. 여러분의 골방은 어디입니까?
셋째, “기도의 시간은 <항상>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주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될 것” (they should always pray and not give up) (눅. 18:1)을 비유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도시에 한 과부가 원수에 대한 자기의 원한을 풀고자 그 곳에 있는 한 재판관에게 날마다 찾아가서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었지만, 그녀가 이렇게 날마다 자기를 찾아와서 호소하며 귀찮게 하는 것이 괴로와서 할 수 없이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주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7)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전은 ‘항상 기도하고, 결코 낙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두번 기도해 놓고는 뭔가 자기 뜻대로 잘 안되는 것 같으면, 지레 풀이 죽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안들어 주시는가 보네?!’라고 낙심하고,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소원과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항상,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올바른 기도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분명히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낙심치 않고 항상 기도하는 목적’은 ‘나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우리 성도들은 이 끈질긴 기도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깨닫아 가는 것이요, 이 기도를 통해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이 기도를 통해 깨닫은 하나님의 뜻에 나를 교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오늘 본문 <7절>말씀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v.7)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8절>말씀에서 “~ 그러므로 그들 (이방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v.8)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것을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가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원하시고, 마음의 중심으로 그 마음의 소원을 아뢰기를 기뻐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의 입술을 열어 내 소원을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고, 마음의 상처를 고백할 뿐 아니라, 감사로 찬양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와 더 온전히 만나기를 원하시고, 이 기도의 시간을 통해 더 깊은 사랑과 인격의 관계를 맺어 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구함을 통해 ‘무엇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지를 깨닫고, 그 뜻에 우리를 수정하고 순종해 나가기를 원하시는 선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라고.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자신의 크고 비밀한 계획을 숨기지 않고 밝히길 기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럼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느정도 기도하는 것이 좋을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제가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로렌스 형제>는 17세기경의 프랑스 사람으로써,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지 목하고 48세의 나이에 깔멩 수도원의 평신도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가 수도원에서 했던 일의 대부분은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 후 설거지를 하거나, 수도사들의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이었지만, 그 어떤 수도자보다도 더 풍성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하심의 축복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로렌스 형제의 ‘기도가 언제나 삶이 된 영적 자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했던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의 진정한 능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지금도 많은 영감과 도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v. 6)고.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어느 특정한 시간이 아니라, 여러분이 숨을 쉬듯 순간 순간마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여러분이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면 그 어디나 여러분의 골방’이 되어,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더 깊은 사랑과 신뢰와 경외함으로 축복된 기도 가운데 나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