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새롭도다” (Being Renewed Day By Day)
“날로 새롭도다”
(Being Renewed Day By Day)
8-10-25
본문말씀: 고린도후서 (2 Corinthian)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 하노니 겉사람은 후패 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설교 요약]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 하노니 겉사람은 후패 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v. 16)고 선언한 의미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사도가 <고린도후서> 편지를 쓸 당시의 나이는 대략 55~60세로 학자들은 추정하는데, 그의 노쇠하고 병들어가는 겉사람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겉사람은 점점 늙고 죽음을 향해 갈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와질 수 있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 “왜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질 수 있는 것일까요?”그것은
- <우리 성도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겉사람’만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도 젊을 때는 건강하고 힘이 솟아 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깐’입니다.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르듯’이 우리의 육신의 젊음도 결코 오래가지 않지만 (사. 40:6,7),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속사람’ (영혼)이 살아 있음으로 새로와질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 속사람이 살아 있다면 축복된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날마다 새로와지는 삶’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영적 새로움은 ‘새 언약의 일꾼’(고후. 3:6)으로써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딛. 2:14) 사명자’로 살아갈 때 풍성히 경험하게 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주장하는 역설은 ‘날마다 새로와지는 속사람의 삶’은 ‘세상의 풍요와 권력과 육신의 건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풍성하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잠시 받는 환난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와 누릴 영광과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날마다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육체는 점점 더 노쇠해 갈지라도, ‘새 언약의 일꾼’의 축복된 사명을 깨닫아 열심을 다해 감당함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날로 속사람이 새로와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교회는 대부분 청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 젊은 청년들도 힘들게 공부하고 일하며 스트레스 받다 보면 체력이 하루 하루 예전만 못하다고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쓸 때의 나이가 대략 55~60세 정도로 성경학자들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요즘으로 보더라도 결코 젊었다고 할 수 없는 나이인데, 그 당시로 본다면 고령의 나이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성도 여러분도 충분히 짐작하시듯이, 더군다나 바울은 복음전도의 과정 중에 수없이 겪은 핍박과 고난으로 인하여 육체적으로 상당히 쇠약하고 힘든 상처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적 나이 그리고 영적 나이는 도리어 무척이나 젊고 강건함을 바울 자신은 오늘 본문에서 놀랍게 선언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 하노니 겉사람은 후패 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v. 16)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의 영적 나이는 과연 몇 살이나 되는지? 아니 날마다 새로와지고 강건해지고 있는지 각자 점검해 보는 시간 되시길 기대합니다.
먼저 사도가 <고린도후서>를 쓰게 된 동기 (배경)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AD 50년경 2차 전도여행 하던 중 고린도 지역에 가서 1년반가량 머무르며 개척한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이로써 고린도 교회는 신실한 신앙공동체로 무럭 무럭 자라났지만, 바울이 떠난 이후에 성도들의 탐욕과 성적 타락 그리고 교회의 분열로 인해 사도는 영적 부모의 애통한 심정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타락과 분열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곧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권세와 승리’로써 사도는 깨우치고자 했습니다. 그 이후 바울이 그들을 한차례 방문하여 지도하고 책망한 바 있고, 또 오늘날에는 남이 있지 않지만 <디도>를 통해 ‘심각한 책망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결과 다행히 대다수 성도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제 신실하게 그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디도를 통해 들게 됩니다 (고후. 7:6~9). 이로써 사도는 이제 기쁨과 확신 가운데 <고린도후서>편지를 보내면서, 고린도 성도들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고 더욱 깊이 맺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와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해 가기 원하는 사도의 심정이 다른 어떤 서신서보다도 <고린도후서>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이 편지에서 어려운 ‘교리적 논증’보다는 특별히 사도 바울 자신의 삶을 상세하게 성도들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옹호’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에 대한 많은 거짓 선생들의 모함 (고후. 11:5)과 이 사도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여 받은 사실에 기인하기 때문이요 (고후. 5:18, 13:3), 이를 통해 주께서 얼마나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심으로 그 사도직을 수행케 하시고자 하시는지를 그가 철저히 경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후. 11~13장).
그리하여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린도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 뿐 아니라 신실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의 일꾼> (ministers of a new covenant)이 된 것에 대한 확신과 자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새 언약의 일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앞장, <3장>을 시작하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새 언약’ (new covenant)는 ‘옛 언약’ (old covenant)과 대조되는 언약임을 밝히는데, ‘옛 언약’은 우리가 아는데로 모세가 애굽의 종살이하던 자기 민족,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로 갔고, 광야에 있던 시내산에 모세가 홀로 올라가 영광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것이 <두 돌판에 하나님께서 새겨주신 ‘십계명’>을 대표되는 구약의 ‘옛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십계명을 주시며, 염소의 피로서 이스라엘민족과 언약, 곧 ‘옛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옛 언약인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이것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우리를 인도할 ‘몽학 선생’ (가정교사)의 역할을 할 뿐이며, 참 빛 되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와 같다고 신약의 여러 저자들은 ‘옛 언약’의 역할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위한 전주곡과 같고, 신랑을 위한 신랑의 친구들의 역할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약속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전날 밤, 유월절 성만찬을 제자들과 행하시며, 유월절 포도주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음으로 하나님과 새롭게 언약을 맺게 되는 것’임을 영적으로 밝힘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피’로 구원함을 받은 우리 모든 성도들은 바로 ‘새 언약의 일꾼들’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과거 <돌로 쓴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다면,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판에 영으로 새겨 주심으로 생명을 살리는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일꾼의 직분>은 얼마나 더욱 영광스러울 것인가 하고 <3장>에서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3장을 마감하며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고 새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포함된 <4장>에서 ‘왜 우리 성도들이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불굴의 삶을 살수 있는지?’ 그 열쇠라고 사도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저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고백하고 주장하는 몇 가지 점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6절>에서 사도는 ‘겉 사람’ (the outward man)과 ‘속 사람’ (the inward man)이라는 ‘한사람 안에 있는 두 사람의 개념’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 하노니 겉사람은 후패 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v. 16)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겉 사람’입니까? ‘겉 사람’은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모든 자연인’을 총칭합니다. 우리가 크리스챤이든 불신자든 관계없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자연적으로 늙고 병들고 죽듯이 말입니다. 크리스챤이라고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썩어 없어질 장막’과 같은 ‘육신이라는 장막’을 입고 살다가 시간이 되면 이 땅을 떠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의술이 발달하여 백세시대라고 다들 흥분해 있지만, 오늘날도 120세를 넘기는 노인은 지극히 소수요, 더욱이 고대의 성경기록 말고는 200살을 살았다는 사람을 듣지 못했습니다. 설령 조금 더 오래 산다고 한들 도토리 키재기요, 고통과 아픔 많은 이세상에서 무엇이 그리 소망이 있을찌 궁금합니다.
그런가 하면, 무엇이 ‘속 사람’일까요? ‘속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이 살게 된 사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 난 (born again) 성도’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영이 살게 되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점을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생명의 떡’ (the bread of life)으로 이렇게 영적으로 잘 설명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4:48~54)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앞서도 살펴봤듯이, 주께서 유월절 성만찬을 제자들과 행하시면서 성만찬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어 먹게 하시며 하신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자신의 십자가 위에서 흘리는 피, 곧 ‘새 언약의 피’를 통해 그분을 믿는 우리가 주님의 생명을 통해 ‘살아 있는 영혼’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는 ‘살아있는 영’ 곧 ‘생령’이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모든 인간은 육체를 입고 사는 ‘겉 사람’이 있지만, 오직 크리스챤만이 ‘겉 사람’과 함께 ‘살아 있는 영’을 소유한 ‘속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며,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점임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중요한 질문은 “왜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지는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속사람이 날로 새로와지는 이유’는 첫째 <우리 성도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v. 16)라고 고백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겉사람’만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도 젊을 때는 건강하고 힘이 넘치고 자고 일어나면 새 힘이 솟아 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깐’입니다.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르듯’이 우리의 육신의 젊음도 결코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제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볼 때 ‘잠깐’이라는 단어만큼 적합한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잠깐’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육신적인 젊음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 크리스챤들의 소망이 이 육체의 강건함에 있다면 이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생명으로 구원받은 성도들, 곧 ‘속 사람’이 살아 있는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육신이 늙고 병들고 심지어 죽는다’는 것이 결코 존재의 ‘쇠퇴나 멸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우리 인간 존재가 얼마나 유한한지를 이렇게 토로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사. 40:6-7)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런 허무한 존재를 밝히는 것에 그치시지 않고, 이렇게 참된 능력과 힘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그의 자녀에게 넘치게 임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 40:30-31)고 말입니다. 이처럼 육체의 나이가 들수록 도리어 새로와지고 강건해 지는 믿기지 않는 역설의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의 삶’이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신분임을 성도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두번째로,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신분적인 변화를 받았다는 뜻이요, 그런 자격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가 이런 새 언약의 일꾼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질문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음을 확신한다면, 여러분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았다’는 뜻이요, 간단하게 말하면, ‘사명 (mission)을 깨닫았다’는 뜻입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서도 이 사명 (소명)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의 부르심의 영광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를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2:14)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디도서 3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 가운데 육체가 나이가 들고 병들면 정신과 영적 능력도 따라서 노쇠하는 이유는 ‘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를 구원하셨는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신의 친 백성 삼음’이요,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워 주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여러분의 삶은 힘이 없고, 소망이 없고, 육체의 나이가 먹는 만큼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빨리 영적으로 노쇠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즘 말로 ‘영적 가속노화’라는 불행한 크리스챤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크리스챤의 진정한 비극은 주님을 위해 잠시 받는 환난 너머에 있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격 없는 우리들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아 주신 주님의 은혜를 단지 부담스러워하고, 무거운 짐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께서 허락하신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음을 감사하고 감격하며 열심으로 그 선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마지막 세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많은 성도들이 ‘새 언약의 일꾼’으로써 살아가지 못하는 중심이유는 ‘고난’ (suffering)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요,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올해 들어 찬찬히 살펴본 우리 주님의 산상수훈이나, 지난 주 ‘수고를 그치고’라는 제목의 ‘요한계시록’ 말씀에 대한 설교말씀도 ‘주의 제자된 우리 성도들이 겪을 고난’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음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왜 고난이 이토록 우리 성도들에게 크나 큰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는 이 고난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요, ‘이 고난을 통하여 주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이 포함된 <4장>을 시작하면서 ‘새 언약의 일꾼’된 직분을 받음으로 누리게 되는 최고의 특권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고 말입니다. 그럼으로 이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가졌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육체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심히 큰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사도는 주장합니다. 이것이 왜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할 수 있는지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가르치기 때문’ (롬. 8:18)이요, ‘현재의 고난은 아침마다 새로운 소망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 (애. 3:22-23)이요, ‘현재의 고난은 우리의 속 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변화시키기 때문’ (v.16)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v. 17-18)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들과 우리를 앞서간 신실한 성도들이 혹독한 고난과 환난을 이기고, 선한 싸움을 승리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눈에 보이는 환난 너머에 있는 영원한 영광, 잠간 보이는 핍박 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신학자는 <이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은 ‘인간이 죄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 하는 가장 큰 목적이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비록 여러분의 육체는 하루 하루 노쇠해 갈찌라도, 영은 날로 새로워가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 남’으로,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 언약의 일꾼’의 직분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를 깨닫음으로, 그리고 성령 안에서 ‘주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점점 더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감’으로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까? 이처럼 성령안에서 날마다 영으로 새로와짐으로, 주님과 함께 승리하시는 새 언약의 충성된 일꾼 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