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9, 2025

“너를 열방 위에” (I Appoint You Over Nations)

Preacher:
Passage: 예레미야 (Jeremiah) 1:8~10
Service Type:

“너를 열방 위에”

(I Appoint You Over Nations)

11-9-25

본문말씀: 예레미야 (Jeremiah) 1:8~10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설교 요약]

오늘 하나님은 청년 예레미야를 부르시며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v. 8)고 말씀하시며, 그를 열방위에 세워 하나님나라 건설의 주역이 되게 할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부르심에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렘. 1:6)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 (렘. 1:7)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청년 예레미야에게 <아이라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요,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넣어 줄 것’(v.8-9)이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의 죄가 심히 부패함으로 바벨론을 통한 심판을 목전에 둔 심히 어둡고 죄악된 상황 가운데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목이 곧고 죄악된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미션이 아닐 것입니다.

한편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이 부르심은 동일하게 우리 성도를 향한 부르심’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제 과연 하나님은 여러분도 부르시는 것인지?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성도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시며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럼. 1:5)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성도를 택하셨다’ (엡. 1:4)는 말씀과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한 사람만이 아니라 태초에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 (벧전. 2:9)로 택하셔서 복음의 증거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둘째, “이것이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마. 4:19)는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됨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셋째, “말씀증거는 모든 성도의 특권과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영생의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한 일에 열심하는 (주의) 친 백성이 되(는 것)” (딛. 2:14)입니다. 이처럼 주의 제자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특권과 의무입니다.

바라기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생명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열방 가운데 악한 세력을 무너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복된 역사에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어느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왕성한 활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기는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과연 언제가 최고의 힘과 에너지를 발휘하는 시기일까요? 물론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그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힘과 활력이 넘치는 시기는 모든 사람에게서 일률적으로 어떤 특정 시기를 규정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삶을 되돌아보더라도. 비록 육체적으로는 <10대에서 20대 초중반>까지의 시기가 가장 활력이 넘치는 시기였지만,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는 그 시기가 가장 어둡고 패기가 없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기를 저는 겪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무리 육체적인 강건함을 유지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깊은 슬픔과 낙심에 빠져 있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능력과 활력의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영적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의 강건함은 육체의 나이에 달린 것이 아님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청년 예레미야를 부르시며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v. 8)고 말씀하시며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를 악한 자의 손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또한 “내가 오늘날 너로 열방 위에 세우(겠다)” (v. 10)고 선언하시며, 그를 열방 위에 뛰어난 주의 자녀로 세우실 것을 약속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의 모습과 부정적 상황으로 인해 낙심하고 의기소침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나의 조건과 형편에 관계없이 그분의 크신 능력과 선하신 뜻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저를 말씀으로 세우고, 그의 영 성령으로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 (사. 40:30~31)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덧 입고, 가족과 캠퍼스와 직장과 이웃의 관계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열방 위에 우뚝 세움 바 된 성도 여러분의 복된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구약성경에서 긴 본문의 책, 대선지서의 책중 하나인 예레미야서의 첫 1장에 포함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서 1장>은 이스라엘의 긴 역사에서도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청년 예레미야에게 임하셔서 그를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 곧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 앞 <5절>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임하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럼. 1:5)고 말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르심에 대해 예레미야의 대답은 큰 대조를 보입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렘. 1:6)라고 그는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젊은 예레미야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움추러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이와 같이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자신은 아직 인생의 경험이 부족한 청년으로써 하나님의 메신져로소의 자격이 부족합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몰론,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런 예레미야의 모습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솔직하고 겸손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렘. 1:7)라고. 젊은 예레미야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돌아보며 자신 없어 하며 ‘저는 아이입니다. 말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고 하며 움추려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동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에게 아이라 말하지 말고, 두려움에 움추려 들어서는 안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v. 8)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가 유다백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와 동행하셔셔, 모든 악한 자의 손에서 그를 건져 내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 ‘왜 젊은 예레미야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지?’를 이렇게 더욱 구체적으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v. 9)라고 말입니다. 그러함으로 그를 열방 위에 세워 열국을 뽑고 파괴하기도하고, 심고 건설하기도 하는 열국의 통치자로 세우실 놀라운 비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청년 예레미야가 고백했던 것처럼 그가 말씀을 잘 알지 못하고 지혜와 연륜이 부족함을 너무도 잘 아시기에 자신의 부족한 지식과 연약한 지혜와 경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손으로 자신의 생명의 말씀을 그의 입에 넣어 주심으로 열방을 하나님의 권세의 말씀으로 죄악된 나라를 무너트리고, 그의 기뻐하시는 새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그가 쓰임 받게 할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는 이 말씀은 마치 어린 아기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는 애정이 넘치는 엄마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하나님께서 청년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말씀(복음)증거의 능력>이 주께서 <누가복음>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말할찌를 고민하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과 일치함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왜 무슨 말을 할 것인지를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는지?’를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눅. 12:11~12)라고.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청년 예레미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된 충성된 제자들의 입에 그때 그때 필요한 생명의 말씀을 넣어 주실 것임으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하나님께서 청년 예레미야를 그의 메신저로 부르신 그 당시상황은 어떤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의 개혁의 왕 요시야왕 13년에서부터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 하여 포로로 백성들이 끌려가던 이스라엘의 긴 역사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고난과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유다 왕국이 이런 패망을 맞이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셔서 건져 내셔서 약속의 땅에 살게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고 여러 하나님의 종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방 거짓신들에게 우상숭배하고 목을 곧게 하며 끝끝내 죄악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어지는 <1장>후반절에서 예레미야에게 <끓는 가마(솥)>의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그 끓는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지는 환상’을 통해 장차 바벨론 등의 북방왕국들을 불러일으키셔서 유다 왕국에 죄에 대한 진노를 쏟으실 것을 경고하고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목을 곧게 하여 범죄를 멈추지 않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레미야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다”라고 결코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에게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 또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청년 예레미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은 결코 ‘손 쉬운 미션’은 아니지만, 또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이 오늘 말씀의 핵심적 메세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청년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 여러분과 저를 향한 부르심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청년 예레미야를 부르셨듯이, 과연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시는 것인지?를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부르심’을 묵상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이 과연 여러분을 부르시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중요한 메시지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뿐 아니라, 오늘 말씀을 듣는 성도 여러분도 분명히 부르신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성도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단지 수천년 전에 예레미야라는 한 청년에게만 특별히 임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하신다면, 우리는 오늘 말씀을 하나님께서 기록케 하신 중요한 동기를 놓치고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서>를 시작하면서 1장에 청년 예레미야를 부르신 사건을 기록하신 그 목적에는 장차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그의 자녀들,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그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바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그분의 말씀의 증거자요, 천국복음의 사역자로 부르시고 계신지를 강력하게 일깨우시는 말씀이 오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전에 창세기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삶과 신앙의 모습을 연속으로 한명씩 매주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세기를 통해 자세하게 그 믿음의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기록케 하신 목적은 결코 그들이 잘 나서가 아니요, 단지 그들의 모든 부족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신앙의 조상의 자리로 이끄셨음을 깨닫게 하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오직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근거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나눠보겠습니다. 앞서 <5절>말씀을 나누었듯이 먼저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럼. 1:5)고요. 여기서 분명히 기억할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은 예레미야 한사람만 특별히 그의 어머니의 태에서 생명이 잉태되기 전에 그를 택하고 구별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모든 자녀들도 동일하게 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제가 바로 지난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설교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언제, 어떻게 택하셨는지?’를 살펴본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엡. 1:4)는 것입니다.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할 계획을 세워 두셨다는 것입니다. 청년 예레미야와 구약의 기록된 모세와 엘리야와 이사야와 같은 소수의 말씀의 증거자들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을 택하여 말씀의 증거자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우리의 신분을 영적으로 밝힌 이유일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청년 예레미야 뿐 아니라, 그의 택한 자녀 모두를 자신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영광스러운 역사에 쓰임 받을 <말씀의 증거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둘째, “이것이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약의 사복음서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제자를 삼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그들을 제자로 부르심을 보게 됩니다. “말씀 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 4:19~20)라고. 예수님은 구원자의 권세와 영광으로 베드로와 안드레를 향해 “나를 따르라” (Follow me)고 부르셨고, 이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 여러 곳에서 주님은 부르심으로 이들을 그의 제자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막. 1:16~20/ 요. 1:35~51/ 눅. 5:1~11/ 마. 10:1~4). 먼저 ‘제자’ (disciple)를 성경신학사전에서 찾아보면, “누군가의 학생 (생도/문하생)이 되어 그를 따르고 배우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보자면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의 제자들이나 신약서에 나오는 침례자 요한이나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그리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붙여진 호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그분을 따르는 자’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영적으로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째의미>는 ‘구원’입니다. 여러분은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스토리를 기억하실 겁니다. 어느날 청년 한 명이 예수님께 찾아와 진지하게 묻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7)라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먼저 ‘십계명’을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 청년은 ‘자신이 그것을 어려서 부터 다 지켰습니다’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이때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막. 10:21)라고.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청년의 첫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영생으로 이어지는 구원’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로 부터 배우는 학생’이라는 의미 이전에 본질적으로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된다’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둘째의미>는 ‘헌신과 희생의 삶’, 곧 <대가지불의 삶>을 살아야 함을 뜻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고 주님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을 향해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책 “나를 따르라” (제자도)에서 이처럼 주님의 명하심처럼 ‘날마다 힘든 대가지불을 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을 <값진 은혜의 삶>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지는 않고 말로만 하는 자의 삶’을 <값싼 은혜의 삶>이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본회퍼의 도전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값진 은혜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말씀과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과 용기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택함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에서 끝나지 않고 신약으로 이어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들을 택하여 그의 제자로 부르시는 역사를 통해 더욱 구체화되고 확장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닫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말씀증거는 모든 성도의 특권과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나누었듯이, 만약 성도 여러분이 오늘 본문의 청년 예레미야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자신의 증인으로 삼으심은 단순히 그들 몇몇으로 한정된 부르심이 아니요, 이 부르심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모든 성도, 곧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들을 향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이해하셨다면, 저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증인으로 부르심은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요 의무’라는 점을 밝히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점을 사도 바울은 ‘이전에 이방이었다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그분의 자녀가 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29)고 밝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 성도를 향한 <빛의 자녀>이자 <말씀의 증거자>로의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하심이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우시며, 긍휼이 넘치고 지혜가 무궁무진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설교를 들으신 분들 가운데는 ‘목사님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알겠는데요, 어쨌건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하고, 예레미야나 구약의 선지자들 그리고 신약의 사도들이나 신실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말씀의 증거자로 사는 것 하고는 다른 것이 아닙니까?’하고 질문하고 싶은 우리 청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들이 이것에 대해 질문하신다면, 저는 안타깝지만 사실이라고 말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영적 사실은 모든 구원받은 자들이 그 영광스러운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 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5~6)라고. 그렇다면, 여기서 주께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 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6)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본문을 강해설교 하면서, 로이드존스 목사는 ‘여기서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지고, 말라버려 불에 던지움을 당한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불에 던지우게 된다는 의미보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면서 예수님 안에 거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결국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로써, 그리고 말씀의 증인으로서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구속역사의 영광스런 일꾼으로서 쓰임 받지 못하고 제외된다’는 뜻이라고 주석합니다.

제가 청년 여러분에게 여러 번 강조하지만, 우리 청년 크리스챤들이 진정으로 고민할 것은 ‘어떻게 하여 구원받을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구원받은 자가 그 축복된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고 누려 나가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와 같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합당한 삶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말로 만이 아니라, 내 전 인생을 거는 삶이요, 올인할 수 있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지?’를 이렇게 놀랍게 영적으로 밝힌 삶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2:14) 주께서 그 선하신 피를 쏫으셔서,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값 주고 사셔서 깨끗하게 하시고, 주의 선한 일에 열심으로 쓰임 받는 자신의 백성, 자신의 충성된 제자가 되게 하시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충성된 제자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이요 복음의 사역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지겨운 숙제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열방을 다스리고, 죄악된 세력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정의와 사랑이 강물같이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심히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일에 쓰임 받는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늘 제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생각하고 묵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그의 순교를 얼마 나누지 않고,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고백한 내용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고 말입니다. 이런 개선장군과 같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다 지켰다’는 자랑스러운 고백을 여러분은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저도 인간적으로 조건적으로는 힘든 일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 성령을 통해 친히 저의 입에 말씀을 넣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몸된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나되어 싸워 나간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오늘 청년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은혜의 부르심 임으로 깨닫고, 그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이 열방 가운데 세우심을 입어 죄악된 권세를 무너트리고, 그리스도의 복된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쓰임 받는 축복된 주의 제자들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