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소망” (A Steadfast Hope)
“든든한 소망”
(A Steadfast Hope)
12-7-25
본문말씀: 히브리서 (Hebrew) 6:17~18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요약]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성도의 인내하는 믿음’에 대해 말씀 나누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잘 알지만, 날마다 그 믿음의 소망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음도 잘 압니다.
왜냐하면, 인내하는 믿음의 삶은 ‘불 같은 환난을 통과’해야 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세상의 핍박과 혹독한 연단 가운데 선한 싸움을 끝까지 다 싸우기 위해선 ‘믿음을 통한 생명의 소망’을 든든히 붙잡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전체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우월성>인데, 오늘 본문의 6장에서 기자는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소망을 든든히 붙들자’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르심의 소망은 확실한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확실한 것은 그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 영접하는 자는 구원받아 선한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v.7), 구원받지 못하는 자는 가시와 엉겅퀴를 맺는 것입니다 (v.8).
둘째, “약속한 것을 맹세로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성도의 ‘구원의 소망’이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뿐 아니라, 맹세하심으로 보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창. 15,22장). 그럼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동일하게 약속하시고 또한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v.17)라고 말입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로 만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통해 그 약속을 성취시키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성소 휘장 안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되셔서 성도를 위해 날마다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때로 넘어지고 실족하는 연약한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을 든든히 붙들고, 달려 갈 길을 다 가는 복된 성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성도의 인내하는 믿음’에 대해 묵상하며 은혜 나누길 원합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 대부분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 하루 삶의 현장 가운데서 그 믿음의 소망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음도 또한 우리는 잘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이란 늘상 무사태평하고, 순풍에 돛단 것 같은 삶이 아니라, 그 보배로운 주님을 향한 믿음을 붙들고자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때로 혹독한 고난과 불 같은 연단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주와 누릴 영광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주의 영 성령께서 도우시는 그 권능의 힘과 폭포수 같은 위로를 순간마다 누려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소망을 든든히 붙잡고 마침내 승리할 것입니다. 이런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히브리서>의 전채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대제사장보다, 모세보다, 하늘의 그 어떤 천사들보다도 뛰어나신 분이시요, 그분만이 우리 모든 성도의 대제사장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음을 굳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여짐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안식과 생명을 누려 나갈 것을 성도들에게 격려 (촉구)>한 것이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속한 <히브리서 6장>을 살펴볼 때, 전반부 <1~8절>은 ‘배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그리고 <9~20절>의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의 확실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처럼 후반부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먼저 성도들에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성도 상호간에 서로를 향한 사랑의 섬김을 하나님은 분명히 기억하신다 (v. 9~10)>라고 밝히면서, 그럼으로 <각 사람이 변함없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으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인내함으로 약속하신 기업 (유업)을 끝까지 기다리라 (v. 11~12)>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저자는 <13~20절> 끝절까지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의 조상, 곧 아브라함을 통하여 어떻게 신실하게 베풀어진 것인지를 본보기로 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셨고 (창.12장), 그것을 맹세하심으로 반드시 그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창. 15,22장). 이제 그렇다면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부르심의 소망은 확실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먼저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제가 <히브리서 6장>에 대해 잠깐 소개하며, <1~8절>까지가 ‘배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배교입니까?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영접했다고 생각했는데, 불행하게도 나중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불행하고 소망 없는 삶이 더 있을까요? 그것이 교리에 대한 문제든, 아니면 삶의 고난이나 유혹이나 시험과 같은 그 무엇이 되었건 상관없이 <6장>에서 언급하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 (히. 6:4~5) 곧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교하는 자들’의 삶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소망 없는 어리석은 삶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난 후에 타락한 자들’은 과연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 자들인가? 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지금도 논란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교파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이것을 더 자세히 나누기 원합니다만, 오늘은 이것을 자세히 다룰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한가지 분명하게 성도 여러분과 이해하기 원하는 것은 ‘하나의 성경구절의 난해한 문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하는 것보다도, 보다 보편적이고 중차대한 것은 <’복음’에 대한 우리 각자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우리 모든 인간 한사람 한사람이 결국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는 결국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복음의 진리를 깨닫음으로 그 복음을 믿는 것이 구원 얻는 길>인 것입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히브리서기자는 <6장>에서 복음을 영접한 자와 거부한 자의 삶을 이렇게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복음의 구원을 누리는 자’로써,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히. 6:7)라고 묘사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땅이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인간이 필요로 하는 풍성한 채소를 맺듯이, 구원받은 자는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번째로 ‘복음을 거부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자’는 가시와 엉겅퀴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만일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 6:8)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찌라도, 결국 복음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는 못쓸 ‘가시와 엉겅퀴’가 아니라 반드시 영적 열매를 충만하게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이어지는 <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만 여러분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히. 6:9/우리말성경)라고.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저자는 히브리교회 성도들에게 배교자들과 전혀 다른 구원의 증거와 열매가 있음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배교하는 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영적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구원의 부르심 받은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째, “약속한 것을 맹세로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기자는 먼저 ‘지금까지 성도 각자가 살아온 삶의 열매를 돌아보라’고 요구합니다. 바로 ‘겸손하고 순전한 사랑으로써 지금까지 서로를 섬긴 것’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v. 10). 그럼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생의 소망을 인하여 열심을 품고 게으르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약속의 유업을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받자 라고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v. 12). 그렇다면, 여기서 “끝까지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유업을 상속받은 사람”이 누굴까요? 이 사람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기자는 소개합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13~1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 핵심은 곧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맹세하심으로 보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3~15절>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 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히. 6:13~15)고 말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어떻게 보증하셨는지?’를 영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맹세로 보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을 때, 바로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v. 13) 그럼으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인데,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시는 대표적인 <2가지 말씀>이 있는데, 한가지는 “하나님의 마지막 테스트” (The final test of God)이라고 불리는 <창세기 22장>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되어 낳은 이삭을 하나님의 명하심에 순종하여 모리아산에 올라가 번제단 위에 나무를 벌려놓고 이삭을 손을 들어 바치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 두번씩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창. 22:12)고 하시고, <16,17절>에서 이렇게 맹세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 22:16,17)고 말입니다.
또 한가지 말씀은 그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말씀으로써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식’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느날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그를 장막 밖으로 이끌어 내셔서 밤하늘을 수놓은 셀 수없이 많은 뭇별을 바라보게 하시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창. 15:4)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창. 15:7)고 말씀했는데, 그때 그는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소유를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창. 15:8)고 당돌하게 질문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그 약속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라고 당돌하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이신 반응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 흔히 ‘전통적으로 행해져 오던 <서약(=맹세)의식>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삼년된 암소와 삼년된 암염소와 삼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창. 15:9)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대사회에서는 소와 염소와 양과 비둘기 같은 짐승들을 잡아 그것을 반으로 쪼개고, 그 사이를 맹세한 사람이 지나가게 함으로써 ‘만약 그 맹세를 지키지 않을 시는, 맹세한 자도 이런 짐승과 같이 죽게 되는 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 이런 ‘서약의식’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짐승 사이를 누가 지나간다고요? 하나님 자신이 그 짐승사이를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7절> 말씀입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 15:17) 여기서 ‘타는 횃불’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이행치 않을 시는 자신이 이 짐승처럼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엄청난 맹세로 보증하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로 어마어마한 서약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미약한 우리 인간 한명에게 조차도 이런 엄청난 자기 자신을 건 신실한 맹세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심으로 자신의 부르심의 약속은 반드시 행하여 질 것임을 맹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자신을 두고 하신 맹세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그런 싱거운 맹세가 아니라, 그 아들의 보배로운 생명을 희생케 하심으로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확실한 마지막 3번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셋째, “그리스도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기자는 우리 성도가 누리게 되는 믿음의 소망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 것인가를 <6장>을 마감하며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 그리스도께서 ~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 6:19~20) 여기서 기자는 우리 성도의 소망은 마치 항구에 정박한 배가 어떤 파도나 풍랑에도 부두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 정박용 말뚝에 튼튼하게 연결되어 고정시킨 닻과 같다고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소망은 이처럼 영혼의 닻과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그 어떤 세상의 환난과 핍박, 그리고 사단 마귀의 공격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속 제물이 되어 그 보배로운 피를 남김없이 흘려 죽으실 뿐 아니라, 이제 성소의 휘장을 열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 날마다 그의 영 성령을 통해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히. 4장>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떄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라고.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서 약속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 (존재)를 두고 맹세하심으로 그 약속을 인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모든 그의 영적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약속을 주실 뿐 아니라, 맹세로 든든한 소망의 밧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풍파와 환난에서도 소망의 밧줄을 놓치 않고, 믿음의 인내를 더 공고히 해 나가도록 말입니다. 그 궁극적인 소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성도가 함께 깨어나는 것이요, 우리 성도가 영원한 생명의 옷을 입고 주와 함께 왕노릇하며, 더 이상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헤어짐도, 죽음도 없는 기쁨과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여러분이 겪는 고난과 아픔은 무엇입니까? 이제 올해 2025년도 한달을 채 남겨두지 않은 길목에서 ‘우리의 믿음은 든든한지?’ ‘우리는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흔들리지 않고 걸어왔는지?’ 돌아보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때로 내가 현재 겪는 상황의 어려움으로 깊이 낙심하고 실망할찌라도, 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모든 죄와 절망과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간구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자격없는 우리를 부르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실 뿐 아니라, 맹세하심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 나가시고, 장차 주와 함께 누릴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더욱 인내하며 주님 만나는 날까지 달려가는 축복된 하나님의 자녀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