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5, 2024

“마게도냐 환상” (A Vision of Macedonia)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6:8-10
Service Type:

“마게도냐 환상”

(A Vision Of Macedonia)

5-5-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6:8~10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 갔는데 (So they passed by Mysia and went down to Troas.)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During the night Paul had a vision of a man of Macedonia standing and begging him. “Come over to Macedonia and help us.”)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 인정함이러라 (After Paul had seen the vision, we got ready at once to leave for Macedonia, concluding that God had called us to preach the gospel to them.)

[설교 요약]

            이제 사도 바울과 일행은 <안디옥교회>에서 주의 은혜 가운데 파송을 받고 <2차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먼저 바울은 <더베와 루스더라>지역을 방문하여 디모데를 데리고 떠났고, <예루살렘회의> (15장)에서 의결한 ‘구원은 할례를 포함한 어떤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가르침을 여러 교회에 전했으며, 그들은 믿음 위에 굳게 서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이들이 계속해서 아시아 땅으로 가고자 할 때 성령께서 두번씩이나 그들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v.6-7).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v.9)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인 환상의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우리 크리스챤은 모두 증인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크리스챤들이 오해하는 말씀의 하나가 ‘마게도냐인 환상’을 통한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증인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증인된 자가 ‘충성되게 쓰임 받도록 인도하심’입니다.

둘째, “성령의 지시를 깨닫는가?”하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v. 6-7) 여기서 성령이 어떻게 막으셨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과 일행이 이런 상황의 원인이 성령께서 뜻하신 것임을 깨닫았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일은 <우리의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선교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마게도냐 환상을 통한 도전입니다.

바라기는 주님께 삶의 주도권을 내어 드림으로 주의 영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와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사도 바울과 일행은 <안디옥교회>에서 주의 은혜 가운데 파송을 받고 <2차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사도행전 16장>에서부터 <18장>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2차 선교여행>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제 실라를 택하여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또 한번의 성령행전의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신실한 자들과 함께 복음의 능력을 경험을 경험하고, 핍박도 아울러 받습니다. 특별히 이 과정 속에서 주께서 얼마나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지를 보게 됩니다. 바로 주의 영 성령님의 강권적인 개입과 계시하심을 통해 몇번씩이나 사도의 계획을 막으시고, 방향을 틀어 그분께서 친히 인도하심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 진실로 '선교는 인간의 계획과 노력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그의 영 성령을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이런 성령의 도우심과 우리 각자와 교회를 이끄시는 그분의 뜻과 이끄심을 깨닫고, 그의 능력으로 '주님을 힘있게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도행전 16장>은 <2차 선교여행>의 첫번째 방문지역으로 <더베>와 <루스더라>에 바울 일행이 당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울의 첫째가는 영적 아들로 꼽히는 디모데를 데리고, 선교팀에 합류합니다. 그런데 디모데를 처음 만난 것은 1차 선교여행 중에 ‘이고니온’과 ‘더베’지역을 방문했을 때였을 것으로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추정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요, 아버지는 헬라인 (v.1)이었고,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였음을 <1-2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그를 선교 팀원으로 함께 데려가고자 했을 때, 먼저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음을 봅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v.3)라고.

그렇다면, 바울은 왜 청년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일까요?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앞장 <15장>에서 사도 바울뿐 아니라, 예루살렘 지도자들까지도 '구원은 할례를 포함한 그 어떤 율법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주어짐'을 <예루살렘교회 회의>를 통해 의결했는데, 왜 디모데의 경우는 할례를 행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는 열쇠은 '디모데'가 유대인이라는데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데로,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데 요즘 식으로 말하면 <다문화 가정>에서 디모데는 출생한 케이스인데, 특별히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아빠에 관계없이 '엄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이 되기 때문에 디모데는 유대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려서 할례를 받지 못했는데, 그가 유대인 인줄 아는 다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이유로 바울은 그에게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한국인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설이나 추석 명절'을 쇠는 것이 구원의 조건과는 관계없는 단지 민족 전통을 지키는 차원이듯이, 유대인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도 이 할례가 구원받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의 그들의 전통을 지키는 차원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가 유대인의 경우 할례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은 유대민족의 시각으로 접근하여, 그들에게서 구원얻는 자를 더 얻고자 함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와 같이 선언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 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0)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코자 하는 강렬한 동기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후에 바울 일행은 여러 성으로 다녀가며 지난번 '예루살렘교회 회의'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의결한 가르침 곧 '교회의 규례'들을 그들에게 알렸는데, 그 내용은 이와 같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되리라" (. 15:28-29)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에게 전했을 때,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여 갔던 것 (v.5)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이들이 아시아 땅으로 가고자 할 때 발생했습니다. <6-7절>에 보면, 성령님, 곧 ‘예수의 영’이 두번씩이나 그들이 아시아에 가서 복음 전하고자 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마게도냐 환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마게도냐 사람이 환상 가운데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v.9)고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아시아로 가고자 했던 자신의 복음전파 계획이 가로막히고, 마게도냐인의 환상이 ‘하나님이 저들을 도우라는 뜻임을 이해하고, 지체하지 않고 즉시로 마게도냐로 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욕심과 사심없이 선교사역을 행했고, 언제나 성령의 지시함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과 함께 좀더 깊이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무엇이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인 환상의 의미일까?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 크리스챤은 모두 증인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아시아지역에서 시작된 복음역사가 어떻게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v.9)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임을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지적하는데, 그는 “<사도행전 16장>사건을 통해 인류문명의 축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사도 바울의 복음을 향한 열정 뿐 아니라,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 순종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본 후에 곧바로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영적으로 분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 인정함 이러라” (v.10)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먼저 생각해 볼 점은, 오늘 본문에서 밤에 “바울에게 보여진 환상이 왜 주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주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고자 간절히 원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확인해 보는 것처럼, 주께서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기도하던 주님의 제자들에게 불의 혀같이 임하시는 성령의 충만하신 임재하심과 그 이후 때를 따라 임하시는 성령충만하신 사건을 통해 주님의 제자들은 권능과 가사와 말씀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담대하게 증거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앞으로 이어질 선교여행에 대한 구체적인 결과들이 어떠할지는 사실 전혀 알지 못했지만, 자신들이 주님의 증인임에 대해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주의 약속이자 명령인 ‘증인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음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이환상은 주님의 ‘어떤 민족을 도와주라’는 명령이기 이전에, 주님의 증인으로 2차 선교여행을 떠나는 사도 바울과 제자들을 도우시는 주의 은혜의 환상임을 저는 믿습니다. 부족한 정보와 한계상황 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이들에게 ‘마게도냐 환상’은 칠흑같이 어두운 상황 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비춰 주시는 주님의 신실하신 도우심의 손길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해외에 나가 30년가량을 선교사로 헌신하시는 어느 한 선교사님께서 사도 바울이 밤에 본 환상, 곧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의 의미에 대해 성도들에게 도전했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오늘날 많은 선교사를 원하는 청년 크리스챤들이 먼저 <마게도냐의 환상>을 기다립니다’라고 지적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사용코자 원하시는 모든 자들에게는 반드시 오늘 본문과 같은 환상을 보여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님의 포인트는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9절>의 환상은 ‘선교사로의 부르심’을 위한 환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교지로 이끄심’을 위한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내가 과연 선교사로 보내심을 받은 자인지 아닌지?’ 주께서 또 한번의 ‘마게도냐 환상’을 보내주시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모두 보내심을 받은 그분의 증인, 곧 ‘선교자들’임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증인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둘째, “성령의 지시를 깨닫는가?”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제 사도 바울 일행이 더베와 루스드라 지역에 있던 디모데를 데리고 함께 2차선교 여행을 떠나, 아시아지역으로 가고자 했을 때, 주의 성령이 2번씩이나 이들을 막으셨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6-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v. 6-7) 여기서 성령이 어떻게 이들을 막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수 없지만, 몇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폭풍설, 홍수 발생설, 지진발생설,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병 확산설 등이 그것입니다.

<6-7절>에서 보듯이, 과연 어떻게 성령께서 사도 바울과 일행들의 아시아에서의 복음 증거전도를 막으셨는지는 단지 추측을 할 따름 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장애물이었냐는 것 보다도, 그 장애물이 '단순한 자연재해'나 '우연히 상황이 꼬여서'나 '재수 없어서'가 아니라, '성령의 뜻'임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가지게 되는 대표적인 착각의 하나는 <하나님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에게만, 그리고 성경에 언급된 상황에만 특별히 계시하시고, 만나 주신다>고 여긴다는 점 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치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계시하심이 풍성하게 드러나지만, 성경만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깨닫을 수 있는 곳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않 만나주신다고 스스로 여긴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다양한 믿음의 샘플로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결국 우리도 우리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이 믿음을 적용함으로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말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이슈는 '우리는 성령의 말씀하심과 뜻을 깨닫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챤들은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을 '오순절 성령파' 사람들이 말하는 어떤 신비적인 성령의 체험으로 이해하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그런 신비적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의 뜻을 깨닫을 수 있는가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5)라고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됨을 선언했고,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2)라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주신 은혜의 선물을 깨닫게 됨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 그리고 동역자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그들이 살아가는 구체적 상황에서 성령의 음성을 듣고 분별할 수 있었고, 그 뜻과 은혜를 깨닫았을 때 즉각 순종함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도행전 강해 말씀을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저 개인적으로 가지게 되는 몇 가지 감회가 있습니다. 첫째) 저의 삶이 주의 증인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확인하고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솔직히 제가 이런 '증인'의 삶을 살지 못한 중심 이유는 '전도/선교'를 일처럼 의무처럼 무겁게 여긴데서 비롯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셋째) 이 증인의 삶은 오직 주의 은혜 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 의지와 노력으로 스스로 잘 감당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평가입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7:22) 말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 7:23)는 주님의 준엄한 심판을 우리는 두렵고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모든 주의 제자의 사명이라면, 이 사명이 무거운 짐이 되지 않고, 감사와 감격 가운데 풍성한 열매로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고, 성령의 깨우쳐 주심과 이끄심에 순종과 충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한다면, '내 인생의 진정한 결정권자는 내 자신이 아니요, 그리스도시요,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시다'는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화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며 인자하심을 신뢰하며, 겸손히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담대하고 충성된 주의 증인이 되는 열쇠임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세상적인 것과 주님의 것으로 갈라져 '두 마음' 품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주님께 내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드리는 복된 삶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주도권을 넘겨 드린 만큼, 여러분의 삶은 그만큼 가벼워지고 그만큼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누려 나가게 되고, 주께서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마게도냐 환상'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 뜻에 순종할 지를 할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와 함께 날마다 동행하며 충만한 성령충만을 통해 생명역사에 쓰임 받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