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배우기” (Learning About Faith)
“믿음 배우기”
(Learning About Faith)
10-27-24
본문말씀: 히브리서 (Hebrew) 11:1~2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confidence in what we hope for and assurance about what we do not see.)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This is what the ancients were commended for.)
[설교 요약]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어떻게 믿음의 성장을 통해 약속하신 자녀의 특권을 누릴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기자는 ‘믿음장’ (the Faith Chapter)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v. 1-2)라고 ‘믿음’을 정의합니다.
이 말씀에서 ‘믿음은 본질적으로 현재 내가 보는 것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그 너머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붙잡는 것’임을 규정합니다. 이처럼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본질의 세계를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함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v.3)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어떻게 계속해서 믿음을 통하여 성장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말씀을 먹음으로써”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라고 ‘믿음은 말씀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남’을 바울은 잘 설명했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은 생명의 말씀을 먹음으로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에 힘씀으로써”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9:28)라고 질문했을 때,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기도로써 진정한 영적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셋째, “복음을 나눔으로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신자들에게 ‘복음증거’는 지상명령이자, 성령의 권능으로 승리하는 출발점입니다.
넷째, “성도의 교제를 누림으로써”입니다: 최초의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행. 2:46~47) 공동체였습니다. 주의 사랑안에서 함께 성도의 교제를 누려 나갈 때, 믿음은 더욱 자라게 됩니다.
바라기는 날마다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기도로써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그 뜻에 순종하며, 복음을 자랑하며 주께서 맺어 주신 믿음의 가족과 사랑으로 함께 자라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좀 색다른 제목으로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 제목을 <믿음 배우기>라고 잡았는데요, 그 이유는 우리 크리스챤만큼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없지만, 우리 크리스챤만큼 믿음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도 없지 않는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제가 말씀드리는 믿음은 불교도나 모슬렘 혹은 힌두교도들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 크리스챤의 참된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믿음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깨닫음도 있겠지만, 그것만큼이나 우리 성도들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믿음의 성장’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 갖기를 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기자는 ‘믿음장’ (the Faith Chapter)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을 시작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v. 1-2)라고 ‘믿음’을 정의함으로 믿음장을 시작합니다. 지금 기자는 믿음의 본질을 영적으로 설명하면서 ‘믿음은 본질적으로 현재 내가 보는 것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붙잡는 것임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주석가 ‘매튜헨리’는 오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과 소망은 병행하며 우리의 믿음의 목표와 소망의 목표는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사실은 확신을 갖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 또한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것들의 실체를 마음의 눈으로 보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는 자들에게 영혼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주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석가 ‘매튜헨리는 믿음을 정의합니다.
그럼으로 믿음으로 살았던 수많은 우리를 앞서갔던 선진들이 이 믿음을 통해 확실한 증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곧장 이렇게 ‘믿음’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선언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v.3)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만물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깨닫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연 믿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그 출발에서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세상만물이 지은 바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을 수 있게 하는 영적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매튜헨리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혼의 눈>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런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 ‘챨스 웨슬리’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Faith is a gift of God)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그렇게 주장한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근거의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에베소서 2장 8-10절>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어떻게 우리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의 영적 비밀 (원리)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라고 말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은혜’와 함께 작동하며, 우리 성도에게 그 은혜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우리 인간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진술에서 그 근거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선언하는데, 그리고 나서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하나님은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조차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내 믿음이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구원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구원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인격, 곧 ‘지.정.의’라는 모든 우리의 인격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작동되지만, 그러나 이런 우리의 지적 능력을 총동원한 믿음조차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바른 판단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고 선언한 이유요, 또한 챨스 웨슬리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정의한 이유도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이것까지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수 있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라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복된 믿음을 어떻게 잘 사용하여 우리의 삶을 주의 약속하신 풍성한 삶으로 누려 나갈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의 핵심 질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영적 출생’이기에, 이제 이런 영적으로 막 태어난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말입니다.
이제 저는 이렇게 주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난 자녀들이 어떻게 잘 성장하길 하나님 아버지는 원하시는지를 성경을 근거로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이 말은 곧 “어떻게 성도들이 계속해서 믿음을 통하여 성장할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말씀을 먹음으로써”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어떤 토양 (자양분)을 먹고 자라날 수 있는지를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그 무엇보다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먹고 자라지 않으면서, 스스로 믿음이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착각이요 굉장히 위험한 영적 상태임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칫 여러분은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나 확신 혹은 어떤 교회 지도자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전통이 여러분의 믿음의 기초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머리가 좋고 실천력이 뛰어나며, 그가 속한 교회의 지도자가 인격적으로 신뢰할만하고, 그 교회가 좋은 전통을 가졌다 손 치더라도 우리 각자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민족들에게 명령하신 “쉐마 이스라엘” (‘들으라 이스라엘’)고 시작하는 <신명기 6장>말씀은 성경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그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심을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온 힘과 목숨을 다해 사랑할까요? 바로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을 사랑함으로써’라고, ‘그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함으로써’라고 우리는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말로 만이 아니라, 이렇게 그분의 말씀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삶 전체를 걸고 살아가는 그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모든 풍성한 은혜의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3)라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말씀을 진실로 사랑함으로 날마다 먹고 자라는 그의 자녀들에게 임할 축복과 은혜를 이처럼 놀랍게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청년 여러분 중에는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강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일하며, 더욱이 스트레스와 긴장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운동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없다, 피곤하다, 귀찮다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 운동을 시작조차 않는데, 전문가들은 운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운동을 찾아서, 한번 할 때 땀이 날 정도의 강도로, 그리고 그 운동이 처음에는 귀찮거나 힘들더라도 습관이 될 때까지 견뎌 나가다 보면 비로소 운동의 생활화를 실천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어쩌면,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 묵상을 생활화하는 것도 운동의 생활화와 매우 흡사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몇 주에 걸쳐서 제가 청년 여러분에게 도전했지만, 여러분이 공부를 위한 인터넷사용을 빼더라도, 그냥 재미로 보는 유투브나 SNS와 같은 인터넷 사용시간의 ‘십분의 일’만큼만이라도 투자하여 말씀을 보자고 했습니다. 하루의 단 몇 분이라도, 귀찮다고 느껴지고 시간 없다는 별별 핑계가 들더라도 이것이 습관이 될 때까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견뎌 나가며 성경읽기를 생활해 나갈 때, 여러분은 이렇게 날마다 일고 묵상한 그 생명의 말씀이 자신의 남은 평생을 지켜주며 놀랍게 은혜의 삶으로 인도함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둘째, “기도에 힘씀으로써”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변화산에 오르셔서 그분의 옷이 광채를 발하는 모습으로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 나누는 실로 신비롭고 영광된 경험을 하고 내려왔을 때, 어떤 귀신 들린 아이를 가진 아버지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그 아들의 귀신을 내쫓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 9:18)라고 고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아들의 귀신 쫓아 주기를 구했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의 제자들은 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일까요? 그 뒤의 <25절>에 보면, 저자 ‘마가’는 이 귀신을 묘사하면서 “그 더러운 귀신” (the foul spirit)이라고 표현했고, 주님은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라고 선언하시는데 이 귀신은 다른 귀신들보다 더 강하고 악한 귀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의 제자들이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음 (약했음)’을 주님은 밝혀 주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주의 제자들이 능히 아들을 고치지 못한다고 했을 때,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막. 9:19)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귀신을 쫓아내기에는 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뒷 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주께서 그 아이를 낫게 한 이후에, 제자들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주께 와서 조용히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 9:28)라고. 그때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고 강하게 되는 그 뿌리에는 ‘기도’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능력이 나올 수 없다고 분명히 주님은 우리들에게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에 힘쓸 것을 도전하십니다. 믿음은 말씀의 자양분을 먹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장성하게 자라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을 나눔으로써”입니다: 우리는 몇 주전에 ‘사도행전’말씀을 ‘1년하고도1달’여 만에 은혜롭게 잘 마무리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가장 큰 위로와 힘을 얻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과 나누는 것은 나 자신과 교회 공동체가 영적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바로메타>임’을 저는 깨닫았습니다. 다시 말해, 만약 나의 문제와 세상 근심과 걱정에 가로막혀 우리에게 주신 주의 복음을 가두어 놓고, 구원과 치유의 능력이 필요로 하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내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부흥은 누릴 수 없음을 저는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시작은 주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는 말씀에서 시작되고, 그 마지막은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행. 28:30-31)고 끝이 남니다. 믿음은 머리로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혼자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이웃과 함께 나눌 때 점점 더 자라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영 성령으로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믿음으로, 악한 영 사단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강건한 믿음으로 우리 개인과 믿음의 공동체로 자라게 해 주실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고 가둬두면 썩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자신이 읽고 깨닫은 복음의 진리를 그 복음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나눠주지 않는다면, 믿음은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복음을 자랑함으로 구원과 진리와 회복과 평화가 필요한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눠줍시다.
넷째, “성도의 교제를 누림으로써”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가 함께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교제하는 것은 놀라운 개인과 공동체의 부흥을 가져오는 지름길임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합심으로 기도했을 때, 불의 혀같이 임하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시작된 최초의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47)라고 말입니다.
기독교회 2천년 역사에서 보면, 교회가 변질되고 타락되어 갈 때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고 꺼져가는 진리의 불씨를 다시 일으킨 여러 종교개혁가들과 영적 리더들의 주위에는 신실한 성도들이 하나로 견고하게 뭉쳐 공동체를 이루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쯔벨글리, 존 칼빈, 영국의 존 웨슬리 그리고 미국의 요나단 에드워드와 같은 선각자들은 진리의 횃불을 들고 거짓되고 죄악된 세상과 싸워 나갔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혼자 외로운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비록 소수일찌라도 그들과 함께 연합하여 복음 안에서 굳세게 서서 싸웠던 신실한 성도들이 있었기에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발하고, 핍박의 광풍이 불어올 때 꺼지지 않고 오히려 불길처럼 복음의 횃불을 불태웠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영적인 아기로 출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은 무엇보다도 ‘엄마의 젖’인 ‘신령한 젖’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을 먹고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도로써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해 나가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며, 주께서 맺어주신 귀한 믿음의 식구들과 더 풍성한 공동체의 나눔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우리의 믿음은 날마다 자라게 될 것이며, 주님의 약속하신 풍성한 삶과 생명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 개인과 우리 믿음의 공동체 위에 넘치게 임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런 우리 모두가 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