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 (Do Not Judge)
“비판하지 말라”
(Do Not Judge)
6-29-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7:1~2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Do not judge, or you too will be judged.)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 이니라 (For in the same way you judge others, you will be judged, and with the measure you use, it will be measured to you.)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산상수훈 마지막 <7장>에 이르렀습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간결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산상수훈 말씀을 통해 후반부 말씀을 함께 배워 나가기 원합니다.
먼저 <6장>의 주제가 <천국시민이 율법의 말씀을 바로 깨닫아 삶 속에 실천함으로써 어떻게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누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라면, <7장>의 주제는 <천국 시민된 성도가 어떻게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누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v. 1)라고 주님은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 “황금률을 기억하라”는 것: ‘황금률’ (golden rule)은 ‘내가 받기 원치 않는 것을 상대방에게도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입니다. <1절>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v.1)와, <12절>의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v.12)는 말씀이 그 근거가 됩니다. 이런 원칙은 우리 모든 인간의 관계의 으뜸가는 원리입니다.
- “바리새인의 모순을 피하라”는 것: 주님은 우리 안에 바리새인의 모순 곧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착각’을 지적하시며,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v.3)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속의 위선과 모순을 주님은 고발하십니다.
- “하나님의 심판을 명심하라”는 것: 또한 주님은 우리 자신 또한 결국엔 가 행한 비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v. 2)고. 이 점을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0)라고 도전합니다.
바리기는 서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사랑과 부드러운 충고로써 친구와 이웃을 살리고 함께 아름답게 세워져 가는 주님의 몸된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마지막 <7장>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주님의 간결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산상수훈 말씀을 통해 함께 풍성한 은혜 받고, 또 각자 도전 받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산상수훈의 말씀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점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고 또 누려 나가고 있는지?’ 겸손히 되돌아보게 됩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7장 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우리 주님의 생명의 가르침을 마무리해가며, 더욱 깊게 깨닫아 나가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한절, 한절의 의미전달도 중요하겠지만,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말씀의 핵심을 놓치지 않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치 않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모쪼록 함께 온 마음을 모으고 잠잠히 진리에 귀 기울이는 마음으로 주의 영, 성령의 도우심으로 산상수훈의 후반부 결론의 말씀을 깊은 은혜와 깨닫음 가운데 배워 나가길 기대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제 ‘산상수훈’의 마지막 국면에 이르러 ‘천국시민’된 그의 제자들에게 <7장>의 말씀을 통해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 <7장>의 핵심주제는 ‘인간관계’입니다. 이것을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6장>의 주제가 <천국시민이 율법의 말씀을 바로 깨닫아 삶 속에 실천함으로써 어떻게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누려 나갈 것인가?> 곧 ‘하나님사랑’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라면, <7장>의 주제는 <천국시민된 성도가 어떻게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누려 나갈 것인가?> 곧 ‘이웃사랑’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7장>의 오늘 본문말씀을 주님은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v. 1-2)라고 말입니다. 저는 먼저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 2가지 점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 첫째는, 주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첫 시작하는 <팔복>의 말씀 가운데 <긍휼> (mercy)에 대해 가르쳐 주셨는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긍휼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지으실 뿐 아니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긍휼하심과 자비가 무궁하신 우리의 아버지시기에, 그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을 닮아 우리도 긍휼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눅. 6:36). 한편, 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긍휼 (일만 달란트 빚)을 받은 존재임을 생각할 때 형제의 ‘작은 실수와 허물’ (백데나리온)은 용서하고 품어 줌이 지극히 마땅하다 주님은 일깨워 주시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마. 18:23-35).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영적으로 객관화 시켜 볼 수만 있다면, 형제 자매의 작은 허물에 대해서 분노하고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고, 도리어 나 또한 하나님 앞에서 수없이 실수하는 존재임을 겸손히 깨닫음으로 서로 용납하고 긍휼을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주님의 ‘비판하지 말라’는 오늘 말씀에서 연상하게 되는 것은 <바리새인의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주님은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는 <5장>에서부터 오늘 본문을 포함한 <7장>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바리새인의 외식>을 지적하시고 경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5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성도가 그분의 의로우심을 좇아 의롭게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라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불의를 본받아서는 안된다고 도전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6장에서도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6:2),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6:5) 그리고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6:16)라고 가장 영적이고 경건한 신앙생활 가운데 스며들어 있는 하나님의 눈보다도 사람의 눈에 더 신경을 쓰고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는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님은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황금률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기독교의 ‘황금률’ (golden rule)이라고 부르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마태복음 7장>의 오늘 본문 <1절>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v.1)는 말씀과 <12절>의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v.12)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황금률’의 핵심은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기 원한다면, 당신이 먼저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본다면, 너무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일수도 있는데, 이것이 현실 속에서는 잘 실천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관계의 비극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내가 상대를 대할 때는 내 판단과 내 마음데로 말하고 평가하고 나선, 상대가 꼭 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되돌려 줄때에는 기분 나빠하고 불쾌해 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누구도 남으로부터 지적 받고, 비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비판하지 말라”라는 도전의 말씀은 단순히 ‘너가 비판을 받는 것이 기분 나쁘다면, 너도 비판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의 본질(핵심)이 아닙니다. 만약 ‘단순히 비판받지 않기 위해선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님의 논리라면, 주님은 지금 논리적 모순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큼 상황에 따라 확실하게 어떤 대상을 비판과 정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입니까? 지금까지 말했듯이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비판하지 않는 것’이 목표라면 주님은 지금 자기주장에 논리가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한가지 사실은 주님은 그 당시 막강한 ‘세상 권세와 종교적 영향력’을 미쳤던 대표적인 유대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을 분명하게 비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반해, 주님은 그 당시 소외되고 힘없고 무시당했던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품어 주시고, 편견 없이 그들을 언제나 맞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가르침은 ‘아무런 자기 의견을 내지 말고, 무비판적이 되어라’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소속된 가정이나 신앙공동체, 그리고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다양한 사회조직 가운데 끊임없는 가르침과 올바른 훈육과 지도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또한 주님처럼 ‘가진 자’와 ‘힘있는 자’ 앞에서는 눈치 보거나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하고, 반대로 힘없고 연약하고 미성숙한 사람들 앞에서는 ‘건전하고 신중한 비판’은 할찌라도, ‘비난’하지는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팀 켈러’목사의 말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센스티브하게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부드러움과 겸손함으로 그의 마음이 열릴 수 있도록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그 형제 자매를 위한다고 던졌던 충고 한마디에 의도치 않게 상대를 자극시키고 상처를 주고, 그 비판이 부메랑이 되어 여러분에게 되돌아오는 악순환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바리새인의 모순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바리새인의 진정한 문제점은 ‘진정한 자기자신에 대한 깨닫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1~6절>말씀에서 주님이 정확히 지적하시는 ‘바리새인을 위시한 외식하는 자들’의 모순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v.3,4) 자기 눈 속에는 집을 바치는 거대한 대들보가 들어가 있는데, 도리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끌을 흠잡아 나무라는 비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자기모순이냐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주님께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대표적인 그룹의 하나인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단순히 지적하고 경계하시고자 하시는 것보다도, 이제 ‘천국시민’인 우리 성도들 안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자기 착각’과 ‘자기 모순’을 주님은 일깨워 주시고,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인간은 남의 허물과 실수는 날카롭게 찾아내고 지적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잘못과 모순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도했던 혹은 의도하지 않았던 관계없이, 우리 대부분은 이중잣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잣대’를,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서는 ‘매우 관용적이고 너그러운 잣대’를 사용하는 2종류의 서로 다른 잣대를 나는 각각 적용하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나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형제에 대해선 혹독하지는 않습니까? 만약 이런 우리 자신을 발견했다면, 우리는 정직히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의 모순이 자리자고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과감히 벗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통해 나 자신 또한 결국엔 나의 비판한 그 비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v. 2)고 말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말씀을 해석하는 주석서를 살펴보다가 어느 성경학자가 이렇게 질문하는 글이 저에게 강한 도전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는 똑 같은 방법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두려운 질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수와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정확히 우리의 행한데로 갚으신다면 여러분과 제가 받을 응분의 결과가 어떠할지 여러분은 그 끔찍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마무리하며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비판하지 말 것’을 권면하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행위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다 드러날 것임을 선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0)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행하는 그 비판으로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 헤아림을 받음을 기억한다면 우리 각자는 ‘혹 내가 형제를 무시하거나 잘못된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판단한 것은 아닌지, 또는 내 가치관과 내 지식과 내 기준으로 상대를 부당하게 평가하고 비판한 것은 아닌지’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주께서 ‘비판하지 말 것’을 도전하시며 <6절>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며 오늘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v.6)고 말입니다. 명설교자, ‘팀 켈러’목사는 여기서 ‘거룩한 것’은 <영생이요, 하나님께 속한 진리>라고 지적하면서, 그럼으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과 그분에 속한 영생과 구원의 진리’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업신여기고 복음을 짓밟는 자들에게는 무작정 복음을 던져서는 안됨을 주님은 경계하신다>고 해석합니다. 마치 개나 돼지가 값진 보석을 식별하지 못함으로 그 보석을 던진 자에게 도리어 달려들어 공격하듯이,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복음을 업신여기는 자에게는 복음은 열려 있지 않다고 주님은 준엄하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부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고 비판해서는 안되고, 도리어 기회가 주어질 때 마다 주의 성령께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보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들에게 힘써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거룩한 것을 발로 짓밟고 지속적으로 복음을 욕되게 하고자 하는 악한 자들에게는 무분별하게 다가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을 준비가 안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들고 나간 자들의 분별력임을 주님은 깨우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하며, 자매를 시기하고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오늘 주님의 도전의 말씀이 ‘단지 아무 비판도, 평가도, 의견도 내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교회지체와 친구를 위해 충고와 또는 그 영혼을 위해 듣기 싫은 말을 해야만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서 조차도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언제나 부드러운 말’과 ‘그 상대를 존중’하는 따뜻한 마음과 영적 예민함과 품어주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잠언서기자는 “친구의 책망은 아파도 진심에서 나오지만, 원수의 입맞춤은 거짓에서 나온다” (잠. 27:6)는 말이 있습니다. 바리기는 서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사랑과 부드러운 충고로써 친구와 이웃을 살리고 함께 아름답게 세워져 가는 주님의 몸된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