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17, 2025

“상처의 치유” (Wound Healing)

Preacher:
Series:
Passage: 예레미야 (Jeremiah) 30:17
Service Type:

“상처의 치유”

(Wound Healing)

8-17-25

본문말씀: 예레미야 (Jeremiah) 30:17

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를 회복시키고 네 상처를 고치리니 이는 네가 버림받은 자요 돌봐 주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일컬음이니라 (‘But I will restore you to health and heal your wounds,’ declares the Lord, ‘because you are called an outcast, Zion for whom no one cares.’)

[설교 요약]

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마음의 상처’에 대해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백성들을 향한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이 회복은 곧 그들과 ‘깨어졌던 <사랑의 관계>의 회복’이요, ‘그 상처를 치유하심을 통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인 것입니다. “내가 너를 회복시키고 네 상처를 고치리니 이는 네가 버림받은 자요 돌봐 주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이해했다면, 과연 우리의 상처와 고통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에는

첫째, “<어린 시절>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의학과 상담치료’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은 ‘어린시절에 경험한 부정적인 경험’이 상처가 된다고 말합니다. 아직 자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어린 시기에 경험한 육체적 혹은 정신적 폭력으로 인한 아픈 경험은 성인이 된 이유에도 없어지지 않고 깊은 상처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잘못된 습관과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가 있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들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벧전. 4:3)라고 베드로는 성도에게 정결한 삶을 도전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중독적인 습관들, ‘컴퓨터게임, 술, 담배, 음란물, 성행위 혹은 약물복용’등을 빠지게 될 때 그 잘못된 습관들은 우리 자신의 삶을 파괴하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는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세번째, “<인간의 죄>로 인한 상처”가 있습니다: ‘현상적으로 모든 상처가 우리의 죄 때문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는 상처를 포함한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죄는 미워하되, 죄 지은 자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닮아갈 때, 과거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시고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고난 받으신 ‘상처 입은 치유자’ (The Wound Healer)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고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복된 삶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제가 이해하기로 우리 모두는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단지 그 상처를 드러내고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드러내지 않고 자신 안에만 깊이 품어두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 상처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알 수 없는 긴장으로 불안과 마음의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성도 여러분이 결코 원하지는 않았지만 작자의 삶 가운데 없어지지 않고 깊은 고통으로 남아 있는 마음의 상처는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를 이어지는 회복의 삶으로 풍성히 경험하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포함한 ‘예레미야서’의 주제는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빠져 있던 죄악된 유다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흔히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만큼 동족 유다백성의 죄와 허물을 안고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과 예언의 말씀을 대언한 것이 이 ‘예레미야서’인데, 이 책은 크게 ‘유다의 타락에 대한 심판의 경고’, ‘바벨론에 의한 멸망 예언’ 그리고 ‘새 언약에 대한 약속’ 이렇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주목하고자 ‘예레미야서’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먼저 ‘유다의 심판을 경고’하신 다음, 오늘 <예레미야 30장17절> 본문말씀에서 <유다민족의 귀환과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기 원합니다. 그것은 그의 자녀 ‘이스라엘의 상처를 고쳐 주시고, 버림받은 바 된 불쌍함을 돌보아 주시겠다’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약속하시고, 또한 반드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 택한 자녀의 죄를 못 본 척 넘어가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비록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자녀를 <징계>하시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하심과 은혜로서 그들을 <용서>하셔서 품어 주심으로 그 자녀들과 사랑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의 과정속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것이 ‘회복하심’인데, 이 회복은 첫째로 <하나님과 자녀들과의 깨어졌던 관계의 회복>이요, 둘째는 ‘우리 인간의 삶 가운데 죄와 함께 여러가지 이유로 마음의 상처와 아픔 (고통)을 치유하고 돌봐 주심’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다시 찾아가는 회복>인 것입니다. 이처럼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구체적인 삶 속에 뿌리 박고 있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그분의 권능의 광선으로 치료하시고 영육간에 강건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선하신 하나님의 그의 자녀된 우리 성도를 향한 기쁘신 뜻임을 믿습니다.

이것을 이해했다면,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상처와 고통에는 과연 어떤 것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것에는 먼저 <어린 시절>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스스로를 충분히 방어하고 보호할 수 없는 어린시절에 겪은 ‘폭력적인 경험’으로 인한 상처입니다. 여기서 ‘폭력적 경험’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폭력’만이 아니라, 협박이나 욕설과 같은 ‘정신적인 폭력’까지도 포함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어릴 적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게 된 상처는 이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연히 없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린시절 불행하고 힘들었던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잊어버린지 오래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어릴 적 경험한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본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의식 그 밑바닥의 무의식적 상태로 보이지 않는 ‘상처의 뿌리’가 되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 인간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어릴 적 경험’과 연계된 부정적 경험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근대 의학의 발달에 기인합니다. 특별히 ‘정신분석학’의 발달로 ‘상담치료’의 분야에서는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일반 정신과 의사나 상담치료자들 그리고 기독교 상담가들에게도 폭넓게 이런 어릴 시절에 받은 상처의 치료에 관심 가지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릴 적 경험하게 된 상처의 아픔이 시간이 지난다고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본다면 우리 모두는 지난 날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어릴 적 받은 상처’에서 어떻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상담치료자들은 ‘어린 자신을 찾아 가세요’라고 조언합니다. ‘어릴 적 그 아이’, ‘그 받은 충격과 상처로 인해 여전히 두려워하고, 자라지 못한 그 아이’에게 다가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을 걸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자신의 이름) 누구야, 힘들었지”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상처에 갇혀서 그 아픈 기억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여전히 <내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나’라는 아이>가 이제 과거를 흘려보내고 성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관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을 시대와 상황은 다를지라도, <시편 42편>에서 잘 다루고 있음을 봅니다. 여기서 기자는 놀랍고도 지혜롭게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라고 말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낙심한 자기자신을 향해 말을 걸고, 격려와 새 힘을 주는 이유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상황속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내 자신이 낙심하고 절망하게 된 것’인데, 그 중심엔 어릴 적 그리고 성장하며 받은 상처가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처에서 회복되는 길은 시편기자의 경우와 같이 먼저, <나 자신이 낙심한 자아에게 말을 걸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것>이요, 더 나아가 나 자신이나, 사람이나 환경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봄>으로 치유되고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시편 42편>을 강해설교 하며 ‘로이드 죤스’목사는 이렇게 짧고 간명하게 해석하고 도전한바 있습니다. “자아 (self)의 모든 부정적인 말을 듣기 전에, 자아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합니다”라고 날카롭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고합니다. 왜냐하면, 자아를 다스려 나가는 것이 ‘영적 침체’를 벗어남으로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실천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자아가 말하기 전에 먼저 자아를 향해 말을 걸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 42:5)라고 말입니다.

한편, 두번째로 “<잘못된 습관과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가 큰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습관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은 대부분 그렇듯이 처음엔 사소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습관들에 사로잡히게 될 때 심각한 문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 게임, 술, 담배, 음란물’이나 ‘성행위 혹은 약물’에 중독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제가 이런 중독을 가져오게 되는 잘못된 습관을 상처로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런 중독적인 습관이 대부분 그러하듯, 처음엔 이것이 나의 ‘의지와 선택’으로 한두번 그냥 호기심과 충동에 의해 했다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습관은 더 이상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게 되고, 결국 그 습관은 빠져나가기 힘든 중독증을 일으켜 나를 강제하고 컨트롤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처음엔 사람이 술을 마시고, 그 다음엔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이 있듯이, 그렇게 잘못 형성된 나쁜 습관은 내 삶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컨트롤하며, 내 인생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베드로사도가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성도에게 이렇게 편지를 했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들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벧전. 4:3)라고. 이런 베드로사도의 가르침 가운데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에 중독되어 있는 삶은 영적으로 볼 때 이방인들의 거짓된 가르침과 뜻을 따른 악한 우상숭배를 행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독이나 게으름이나 잘못된 생활습관이 얼마나 자신과 주위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지 더 이상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잘못된 인간관계’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도치는 않았을지라도 서로를 불평하며, 갈등하는 관계가 되었을 때, 이로 인해 서로를 미워하거나 상처주고 상처받는 불행한 관계로까지 악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관계의 악화가 얼마나 우리의 마음에 크나 큰 상처를 주고 마음에 고통을 주는지는 우리 모두가 경험적으로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번째는 <인간의 죄>로 인한 상처가 우리 모든 인간 고통의 출발인 것입니다. 제가 ‘인간의 죄로 인한 상처 그리고 그로인한 고통’에 대해 마지막으로 나누기 전에 먼저 한가지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상처가 죄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이 죄는 우리의 상처와 고통 뿐 아니라 죽음을 포함한 모든 불행의 뿌리와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상처의 치유’라는 주제에 있어서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어릴 적 내가 받은 상처’가 ‘나의 죄’ 때문이라고 결코 ‘스스로를 정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올바른 영적 판단도 원인분석도 아닌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살아가던 자를 보고, “(이것이)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요. 9:2)라고 주님께 질문했을 때,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3)고 주께서 대답하신 것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관 (종교관)은 ‘모든 병은 죄로부터 기인된다’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은 자신도, 그리고 그의 부모의 죄 때문에 맹인이 된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고자 함이라고 분명히 영적으로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불행한 맹인이 나면서부터 볼 수 없었던 것이 결코 자신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주님은 그 평생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그 한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의 영적 맹인과 같이 살아가는 어두운 눈을 그분의 권능으로 뜨게 하셔서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우리가 조금만 더 영적 눈을 떠 멀리 볼 수 있다면, 우리 모든 인간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질병과 죽음은 첫 사람 아담의 죄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또한 그 죄는 없어지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끝없이 유전되어 지금까지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하고, 끝없는 불행한 우리 인간의 삶을 가져오게 한 주범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죄의 그 잔인한 힘과 횡포에 대해 이렇게 적나라하게 고발한 바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9:55,56)고 말입니다.

이제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성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 ‘마음의 상처와 회복’이라는 말씀의 주제와 같이 우리 모두는 더 이상 내 속에 있는 그 상처로 인해 고통받기를 원치 않고, 그 상처가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길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성도 여러분이 여러분 속에 있는 상처가 아물고 고통이 사라지기 원한다면, 저는 최종적으로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함’을 말씀드리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죄냐, 너 죄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어릴 적 경험한 상처’일수록,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나 그 누군가의 잘못과 허물이요, 내 탓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기 원한다면, ‘죄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의미를 우리는 진지하게 곱씹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만이 내 상처가 치유되는 가장 적극적이요 완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깨어졌던 그의 자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셨던 사랑은 첫째, 그들을 용서하심으로 사랑의 관계를 회복 하심이요, 더 나아가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그분의 권능의 손으로 치유하심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회복시키고 네 상처를 고치리니 이는 네가 버림받은 자요 돌봐 주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일컬음이니라 (v. 17)고 말입니다. 제가 그동안 많은 청년들을 섬기며 그들의 마음의 상처로 인해 힘들어하고 고통받는 여러 지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매우 안타까왔던 것은 그들 가운데는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그 상처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의 중심에는 아직까지 자신을 힘들게 한 ‘그 누군가와 그 환경’에 대한 ‘용서와 용납’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자신을 힘들게 하고 상처 주었던 그 사람, 그 상황, 그 잘못과 허물에 대한 용서가 그 형제, 자매의 삶에서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400년 애굽의 종살이하던 그의 자녀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여호수아를 통하여 한가지 의미심장한 의식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각 지파별로 12돌을 취하게 하셔서, ‘요단강’을 갈라 마른 땅이 되게 하셔서 그 돌들을 강 바닥에 두고 다시 강물이 덮이게 하셔서 그 돌들을 흘려보내게 하신 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길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길갈’은 히브리어로 ‘굴러가게 하다’는 뜻입니다. ‘지난 날 애굽의 모든 수치를 굴러가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와 강한 약속’이 이 ‘길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더 이상 과거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수치로 과거에 얽매여 상처와 고통으로 아파해서는 안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자신의 선하심과 권능을 신뢰함으로 과거의 모든 무거운 것과 상처를 이제 영적 길갈에서 흘려 보내길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난 날의 상처와 아픔을 가져오게 한 그 누군가를 끝까지 가슴에 묻어두고 떠나 보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시고자 약속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의심하고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옴을 우리는 깨닫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우리 앞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크고 놀라운 은혜를 소망하며 성령과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를 신뢰하는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초대하신 <마태복음 11장>의 중심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에 모든 인생들에게, 세상에 모든 무거운 짐지고 받은 상처로 힘겨워 하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치유와 안식의 초청을 이렇게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8,29)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과 상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 짐을 내려놓고 그 상처를 맡겨 드릴 때, 주님은 비로소 그 상처를 깨끗이 치유하시고, 우리의 허물을 눈보다 더 희게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신뢰함으로 주님의 손에 여러분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맡길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여전히 수많은 부조리와 죄와 허물로 얼룩진 땅임을 우리는 바라봅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빛된 자녀가 되었지만,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수많은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참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모든 무거운 짐과 상처와 아픔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복된 삶 사시길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은 성도 여러분과 저의 모든 아픔을 친히 담당하실 만큼 많은 질고를 겪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넉넉히 갚아 주실 수 있는 권능과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 선하신 주님 안에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치유하시고 회복하심이 성도 여러분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은혜의 역사가 넘치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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