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그림자 요셉” (Joseph The Shadow of Jesus)
“예수님의 그림자 요셉”
(Jeseph The Shadow of Jesus)
9-21-25
본문말씀: 창세기 (Genesis) 45:7~8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설교 요약]
오늘은 창세기 인물연구 마지막시간으로 ‘요셉’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신학자들은 요셉을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의 삶 전체가 ‘예수님의 삶’을 예시하고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12아들중 11번째로 태어나서, 아버지 야곱의 각별한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가 요셉을 편애할 뿐 아니라, 그가 꾼 두번의 꿈으로 인하여 형들은 그를 심히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형들이 그를 들에서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아 넘겼고, 요셉은 애굽으로 끌려가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습니다 (창. 37장). 이렇게 시작된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은 20여년이 지나 오늘본문에서 보듯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저는 요셉의 삶을 ‘구원’이라는 단어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그의 인생전체가 가족들과 당시 수많은 세상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요셉은 구원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셉이 형들에게 심한 미움을 받게 된 것은 아버지의 편애와 철없고 무뢰한 그의 언행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동생을 종으로 팔아 넘기는 형들의 행동은 너무도 가혹한 것인데, 이런 고난의 시간을 요셉이 이겨 나갈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디말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첫날부터 억울한 옥살이하던 감옥에서까지 언제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성경은 밝혀주고 있습니다 (창. 39장).
둘째, “고난의 의미를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요셉에게서 배울 점은 그가 ‘고난의 의미를 깨닫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라” (창. 45:7,8a)라는 고백합니다. 요셉은 긴 고난 가운데 인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자기인생에 두신 계획>을 이해함으로 ‘구원의 역사’에 축복 되게 쓰임 받은 것입니다.
셋째, “용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복된 또 한가지 이유는 자신을 그토록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그가 이런 용서를 할 수 있었던 중심에는 앞서 살펴본 대로 자기인생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창. 45:7). 그리고 이 용서를 통해 요셉은 진실로 하나님의 치유하심과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두신 계획하심을 날마다 깨닫아 감으로 예수님 안에서 사랑과 용서의 사람이 되어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은 창세기 인물연구 네번째 마지막시간으로 ‘요셉’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요셉은 어릴 때 형들에 의해 ‘꿈꾸는 자’라고 불렸는데, 이런 이름은 칭찬이 아니라 그를 비꼬고 비웃듯이 냉소적으로 부른 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2주전 ‘이삭’의 삶에 대해 말씀 나누며, 그를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신학자들이 비유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삭이 그렇게 불렸던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지원함으로 십자가를 지셨듯’이 이삭도 자발적인 순종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아버지 아브라함의 순종과 합하여 ‘하나님께 희생제물의 제사’로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요셉에 대한 설교제목으로 ‘예수님의 그림자 요셉’이라고 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림자’라는 요셉에 대한 별명 역시 성경학자들이 요셉의 삶을 압축하여 붙인 이름인데, 이것은 그만큼 요셉의 삶 전체가 ‘예수님의 삶’을 예시하고 상징하는 모습이 크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요셉의 삶 가운데, 우리 각자를 돌아보고 지난날의 상처와 아픔이 나를 주저앉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억울하고 힘들었던 과거가 현재의 불행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인생의 상처와 아픔을 밑거름으로 비옥한 삶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오늘을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젼을 좇아 기쁨과 만족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먼저 요셉의 출생에서 보자면, 그는 야곱의 12아들중 11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린시절 요셉은 그 형제들 중에서도 특별히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늦은 나이에 요셉을 나았기 때문도 있겠지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첫아들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저는 짐작해봅니다. 이처럼 아버지 야곱은 비단으로 짠채색옷을 요셉에게 입히고 귀여워했지만, 이런 아버지의 편애는 그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다른 형들이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는 불씨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37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창. 37:3,4)라고 말입니다.
거기다가 요셉이 형들의 심한 미움을 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는데, 그것은 그가 꾼 두번의 꿈을 형들에게 얘기했을 때였습니다. 그가 첫번째 꾼 꿈의 내용은 ‘그들이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나머지 형들의 단은 그의 단을 둘러서서 절했다’는 것입니다 (창. 37:7). 그 말을 들은 형들은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창. 37:8)하며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꿈에서는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했다’라고 그가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창. 37:9). 이 꿈에 대해서는 심지어 그 아버지까지 “(우리가)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창. 37:10)라고 그를 꾸짖었지만, 아버지는 그의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형들은 심히 그를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요셉의 인생을 바꾼 한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었는데, 아버지 야곱은 그에게 형들과 양떼들이 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고 오라고 그에게 지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길을 떠났고, 이윽고 형들이 머무는 곳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형들이 보고 그를 죽이고자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 37:19)라고 서로 대꾸했습니다. 여기서 형들이 ‘꿈꾸는 자’라고 요셉을 부르는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칭찬이나 긍정적인 말이 아니라, 그를 비꼬고 비아냥거리듯 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아무튼 처음엔 형들이 그를 죽여 구덩이에 파 묻으려 했다가, 나중에 그곳을 지나가던 이스마엘 후손인 상인에게 돈을 받고 팔아 넘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시작되었고, 그는 애굽으로 끌려가 바로 왕을 섬겼던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요셉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에 있어서 그 초점을 ‘구원’에 맞추고자 합니다. 이것은 마치 지난 시간 우리가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삶을 살펴볼 때, 그의 인생을 꿰뚫는 <축복>이라는 주제를 통해 함께 묵상해 보았다면, 오늘 요셉의 경우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 ‘구원’를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라 함은 요셉 자신의 구원도 있겠지만, 그 핵심은 그것보다도 ‘요셉을 통하여서 그의 온 가족들이 구원을 얻고, 또한 그 당시 수많은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구원케 하시고자 하는 일에 그가 쓰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서 요셉의 인생을 여러분과 함께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요셉은 구원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요셉이 어린시절의 성장과정에서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을 때, 나머지 형제들의 상실감과 상처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는 미루어 짐작하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형들에 의해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려가게 된 그 운명의 날이 이르기 이미 오래전에 이 가정의 비극은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버지 야곱의 요셉 한 명을 향한 공평하지 못한 편애가 다른 모든 자녀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고, 그 곪은 상처가 결국 ‘미움과 증오’라는 활화산의 용암이 되어 어느 날 터져 나와 그 비극적인 사건을 만든 것입니다. 형들이 처음엔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가 결국 노예로 그를 팔아 넘긴 사건인 것입니다.
요즘 한국의 인기 육아프로의 하나인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보면 흔히 등장하듯이, 부모의 과보호와 절제되지 못한 애정에서 자란 어린 아이들이 어느 순간 ‘악동’으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나중엔 ‘안하무인’이 되어 통제 불능의 사고뭉치 (골치덩이)의 아이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사실 요셉의 어릴 적 모습이 이와 매우 흡사함을 저는 말씀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볼수록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요셉의 철없음과 이기적인 모습, 그리고 그 심각한 원인을 제공한 아버지 야곱의 잘못된 편애를 우리가 먼저 직시하지 않고, 단지 요셉과 야곱은 별 문제없는데, 그 형들이 그를 괜시리 미워하고 질투했다는 식으로 치부한다면, 우리는 잘못된 접근 (출발)을 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것은 이처럼 부모의 잘못된 사랑으로 상처가 곪아가고, 그 편애로 말미암아 이처럼 철없고 ‘안하무인’의 건방진 아이가 되어 가족과 이웃들에게 상처를 거침없이 주는 요셉의 모습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아 그 자체였는지를 먼저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셉과 같은 철부지 ‘안하무인’의 아이들이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얼마나 많은지를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런 요셉이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예수님의 그림자’로 물려질 만큼의 믿음의 사람, 요셉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믿기지 않는 그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인생에 뜻을 두셔서 그와 동행하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 동행하시는 은혜에 대한 구체적인 두가지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그 첫번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요셉이 형들로부터 결정적인 미움을 받게 된 2번의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형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그처럼 귀여워하던 아버지 야곱조차도 그의 꿈 내용을 듣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지 말라’라고 꾸짖을 정도로 그 당시 요셉의 꿈은 비현실적으로 들렸습니다. 형들의 단들이 자기 단을 향해 절을 하고, 또 별과 달과 열한별이 자기를 향해 절을 하는 황당한 꿈은 요셉 자신조차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꿈을 요셉이 미성숙하게, 철없이 자랑하듯이 떠들어 뎀으로써 힘든 고난의 삶의 불씨가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 꿈이 정확히 수십년 지난 후 현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임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철부지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은혜 베푸심으로 두신 놀라운 계획하심이 있으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 예로써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그리고 주인 아내의 모함으로 여러 해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고난의 시간을 그가 어떻게 보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종으로 처음 팔려갔을 때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3)라고 말입니다. 매사 그가 하는 일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과 형통케 하는 능력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인은 그를 신뢰함으로 가정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그의 손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뿐 만이 아니라, 주인의 아내가 요셉이 준수함으로 자기와 동침하기를 집요하게 요구했지만, 결국 요셉이 그 요구를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자기 남편에게 도리어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고자 했다고 거짓으로 모함하여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요셉도 자포자기하고 환경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울부짖고 야단 법석을 벌일만도 한데, 요셉은 그러질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당시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 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하고 ~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창. 39:20~23)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그의 고난의 정점마다 그와 신실히 함께 하심으로 그를 붙들어 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요셉이 되게 지켜 주신 것입니다.
둘째, “고난의 의미를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성도들이 흔히 하나님을 향해 보이는 가장 대표적인 반응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Life is good, God is good! Life is bad, God is bad!”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인생이 술술 잘 풀리고 만사 형통하면,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지만, 인생이 점점 꼬이고 어려움이 찾아오면 하나님은 나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인생의 어려움이 심해지면, 안타깝게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바닥을 찍고 심지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라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시험에 드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들도 많지는 않지만 있습니다. “Life is bad, but God still good!”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고백의 의미는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 인생에 스산한 가을과 춥고 눈보라 치는 혹독한 고난의 겨울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에게서 배울 점은 단순히 그 고난의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아 나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에 두신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해 나감으로 단지 소극적으로 현실을 참아 나가는 차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신 꿈과 비젼을 통하여 이 고난 가운데 영적 근육과 힘을 다져 나가고, 죄와 절망과 맞서 싸워 승리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의 한사람이 바로 ‘요셉’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통해 두신 뜻을, 즉 그 파란만장한 고난과 역전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았음을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 45:7,8)라고 말입니다. 사실 요셉이 어떻게 이처럼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을 수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와 언제나 동행하심’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신비롭고도 놀라운 것 한가지는 요셉의 삶은 ‘세상적으로 잘 나가고 만사가 잘 풀릴 때 보다도, 사방이 가로막히고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않고 절망적인 순간마다 도리어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던 것입니다.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 왔던 그 첫날부터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셔서 형통하는 자가 되게 하셨고, 주인의 아내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투옥되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그 감옥에서 그와 함께 하셔서 어찌된 영문인지 씩씩하고 명랑하게 생활함으로 감옥 맡은 간수장에게 조차도 신임을 받아 그 감옥전체를 통괄하여 사무를 관장하는 직책을 요셉은 부여 받은 것입니다. 이런 요셉의 모습은 한마디로 그가 자신감과 소망과 의욕으로 충만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상황속에서 소년시절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두번의 꿈의 의미를 점점 더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아버지 밑에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채색 옷 입고 철부지 아들로 교만하게 살아갔다면 결코 꿈도 꿀 수 없는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쓰임 받게 되었음을 그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고난을 헤치고 애굽 총리가 됨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 받게 되었음을 그는 깨닫은 것입니다. 비록 형들에 의해 죽음을 당할 것 같은 공포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가게 되는 절망적 순간은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겠지만, 만약 이런 종으로 팔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투옥되는 고난의 시간이 없었다면 함께 투옥되었던 바로의 술 빗는 관원장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그의 천거로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한 70명의 가족을 구원할 뿐 아니라, 그 당시 수 없이 많은 민족과 백성들을 혹독한 가뭄에서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역사에 쓰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 자신을 이곳 애굽으로 오게 한 존재는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라”(v.7,8)는 것입니다. 요셉이 진실로 깨닫은 것은 이처럼 자신의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그 깊고 넓은 마음과 뜻을 감탄가운데 이렇게 고백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 11:33~35)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은 심히 깊고 넓고 부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떠실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영의 눈을 뜨고 여러분의 인생에 두신 그 놀라운 뜻을 깨닫기만 한다면, 어떤 엄청난 역사가 벌어질지를 저는 심히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고 또한 여러분이 자발적인 순종하는 아름다운 하나됨으로 요셉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리는 복된 삶 사시길 기대합니다.
셋째, “용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요셉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축복된 삶을 살수 있었는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살펴보며, 그것은 <용서할 수 있었기 때문>임을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용서는 그만큼 인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강력한 치유와 회복과 영적 부흥을 가져오는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에 창세기의 요셉의 삶 전체의 스토리에 대해 대부분 아시겠지만, 형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상인에게 팔아 넘겼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입었던 채색옷을 찢어가지고 짐승의 피를 묻혀서 마치 짐승에게 그가 찢겨 죽은 것처럼 속였던 것입니다. 그 이후 20여년이 지나 형들은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혀 관심이 1도 없었을 것이고, 아버지 야곱은 그가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 알고 그를 가슴에 평생 묻고 고통가운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한번의 요셉과 형들과의 운명의 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날은 7년 대흉년기간에 벌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했듯이, 7년의 대풍년을 지나 이제 7년의 대흉년이 세상전체를 엄습하여 애굽과 그 가족들이 살았던 가나안 땅과 온 땅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버지 야곱은 그 아들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앉아서 굶어 죽을거냐? 얘기를 듣자니 애굽에는 많은 곡식이 비축되어 있다고 하니 돈을 가지고 가서 더 늦기 전에 양식을 사와서 식솔들을 먹여야 될 것 아니냐!?’고 다구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형들은 양식을 살 돈을 챙겨 먼 길을 떠나 애굽을 총괄하는 책임자 곧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게 되는 두번째 운명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 자신들이 큰절을 하는 애굽 총리가 20여년 전에 자기들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 넘긴 동생 요셉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이 형들과 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사건이 <창세기 42~4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형들은 비록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는 형들을 금방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에게 보인 행동은 특이합니다. 핵심은 ‘일부러 형들이 가나안에서 온 정탐꾼이라고’ 뒤집어 씌우고, 그리고 ‘동생 베냐민이 자기의 물건을 훔쳤다고’ 모함하여 형들을 곤경에 빠트립니다. 왜일까요? 그 중심엔 요셉의 ‘형들에 대한 지혜로운 용서의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형들이 이런 황당한 누명을 두번씩 쓰게 되는 과정에서 과거 자신들이 동생 요셉을 팔아 넘겼을 때에 그가 얼마나 힘들고 절망했을지를 깨닫게 되는 개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고백합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 42:21)라고 말입니다. 형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과거 저지런 잘못을 인정할 뿐 아니라, 동생 베냐민을 구하는 과정에서 유다를 중심을 자기 생명을 담보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진지한 행동의 결단으로 속죄를 표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이 형들에게 보여준 ‘용서’는 단지 과거의 잘못을 묻어두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잘못을 뉘우치고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게 도와줌으로서 그 상처를 치유하고 형들과의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가 파워풀한 것은 자신을 힘들게 했던 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사자 자신이 진정한 자유와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결정적 개기를 마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없이 아픈 사연은 있겠지만 만약 상대를 끝까지 용서하지 못할 때, 그는 안타깝게도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서 결코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진정한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요셉이 보여주었듯이, 우리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크신 계획하심을 깨닫아 나감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아픔과 고난의 세월이 지나 남들을 섬기고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될 비옥한 삶으로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게 될 때인 것입니다. 나중에 아버지 야곱이 죽게 되었을 때 형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한 일로 말미암아 두려워 떨었는데, 그때 요셉의 말속에서 그가 진정으로 형들을 용서했음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창. 50:19~21)라고 말입니다. 요셉은 진실로 형들을 용서했고, 과거의 그가 받은 모든 상처와 아픔에서 자유한 삶을 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현재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과거에 받은 아픔과 상처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고 힘들어하지는 않습니까? 바라기는 요셉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두신 그 선한 뜻을 말씀과 기도와 성도의 풍성한 교제 가운데 점점 더 깨닫아 나가고, 이를 통해 진정한 용서의 사람이 되시길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아픔에서 해방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자유와 안식을 풍성히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지난 날의 상처와 고난의 세월이 도리어 비옥한 밑거름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