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7, 2025

“온유의 사람 이삭” (Isaac The Meek)

Preacher:
Series:
Passage: 창세기 (Genesis) 26:20~22
Service Type:

“온유의 사람 이삭”

(Isaac The Meek)

9-7-25

본문말씀: 창세기 (Genesis) 26:20~22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설교 요약]

오늘은 창세기 인물 두번째 시간으로 ‘이삭’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잘 아시는데로 이삭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100세되어 얻은 ‘약속의 아들’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이 ‘웃음’ ‘그가 웃으리라’는 의미인데, 90세가 되어 처음으로 자식을 본 사라의 기쁨이 얼마나 기뻤는지 “하나님께서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나로 웃으리로다” (창. 21:6)라고 이삭을 낳은 기쁨을 노래합니다.

사실 이삭은 대체로 여러 신앙의 인물들에서 보는 드라마틱한 인생의 굴곡은 찾아보기 힘들고, 평탄한 신앙을 지켜온 인물정도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을 찬찬히 살펴 볼 때 이삭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삭을 통해 우리가 본받을 점일까요? 그것은

첫째, “분별력 있는 순종”입니다: 흔히 ‘아브라함의 마지막시험’이라 불리는 <창세기 22장>은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좇아 백세 되어 낳은 이삭을 드리는 놀라운 순종’으로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삭의 나이는 10대후반 ~ 20대 초중반의 청년의 나이로써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신뢰함으로 자발적이고 분별력 있는 순종을 드렸기에 이 ‘순종의 제사’는 가능했던 것입니다.

둘째, “온유한 영성”입니다: 오늘말씀에서 보듯이 이삭은 시기함으로 자신의 우물을 메꾸는 그랄 목자들과 다투지 않고 온유하게 양보하며, 아버지 아브라함때 팠던 우물을 다시 팜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창.26:20~22). 이 우물파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이삭의 모습은 단순한 ‘물’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가운데 온유하면서도 강인한 영성을 보게 됩니다.

셋째, “대를 잇는 믿음”입니다: 또한 이삭에게서 본받을 점은 ‘대를 잇는 신앙의 본’입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그가 아내 리브가를 처음 맞이했을 때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창. 24:63)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늘 사색하고 묵상하는 사람임을 암시합니다. 이삭은 부모의 좋은 신앙의 환경에서 자랄 뿐 아니라, 그 신앙의 유산을 되새기고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가운데 그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또한 후손에게 전수하는 복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라기는 이삭과 같이 온유함과 내면의 강인함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철저히 그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약속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은 창세기 인물 두번째 시간으로 ‘이삭’의 삶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솔직히 제가 오늘말씀의 주인공 ‘이삭’에 대해 좀더 집중해서 말씀을 살펴보기 전 까지는 ‘이삭’에 대해서는 딱히 말씀 나눌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어 얻은 ‘약속의 아들’이요, ‘조용하고 순종적인 아들’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삶과 믿음을 살펴보면 볼수록, 저의 이삭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고, 이삭이라는 믿음의 선조에 대해 내가 너무도 무지했구나!’라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이삭에 대한 새로운 이해 뿐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조용하면서 강력한 섭리와 은혜를 깨닫고 그 믿음의 본을 좇아 가는 우리가 되길 기대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잘 아시는데로 이삭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100세되어 얻은 ‘약속의 아들’입니다. 지난시간, 자세히 살펴본데로,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숭배하며 소망없이 살아가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 12:1~2)라고 명령하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셔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다는 의미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심이요, 그와 동시에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겠다는 의미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을 주시지 않고 25년이라는 긴 시간을 인내로 기다리게 하신 후, 마침내 그가 100세가 되었을 때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 짐으로 마침내 기다리던 약속의 아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롬. 4:19~20). 그 약속을 마침내 얻게 되었을 때 그의 아내 사라는 그녀의 나이 90세에 아들을 보며 기쁨과 감격에 벅차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마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창. 21:6~7)라고 말입니다. 그 약속의 아들을 얻었을 때 그 두부부의 기쁨을 상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찌되었건, 분명한 것 한가지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엄청난 복과 은혜를 이 백세되어 낳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통해 이제 넘치게 부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창세기에 기록된 이삭에 대한 내용의 말씀은 <창세기 21장>에서 시작하여 <창세기 28장>까지 이어집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다시피 이삭은 모든 믿는 자가 인정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아버지와 ‘하나님과 겨루어 씨름하는 자’라는 강력한 성격의 야곱이라는 아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그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인물처럼 우리 성도들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살펴보면 볼수록 그의 삶과 믿음의 진가가 점점 더 드러나는 매력적이요,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삭을 통해 우리가 본받을 점일까요? 저는 그것은 무엇보다

첫째, “분별력 있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삭’바침 사건) 우리 사회에 많은 해악을 끼치는 사이비종교에서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는 신도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맹목적 순종’입니다. 그러나 이런 ‘맹목’적 순종이 아니라, 이삭의 삶의 모습을 통해 제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참된 믿음의 순종’입니다. 저는 이런 순종을 ‘영적 분별력을 통한 순종’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본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삶 곧 ‘빛된 자녀의 삶’을 살 것을 그들에게 격려하고 나서, “그런 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엡. 5:15~16)고 도전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요, 분별력 있게 행하는 삶이요, 결론적으로 ‘성령충만한 삶’이라고 사도 바울은 도전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분별력을 가지고 믿음의 순종’을 행한 대표적인 인물의 한사람이 바로 이삭임을 믿습니다.

이런 이삭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씀이 <창.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소위 ‘아브라함의 마지막 시험 (final test)’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대부분은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마지막으로 시험하셨고, 이 시험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통과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확증받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이것이 그 사건의 중심 메시지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더 있을까요? 이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확정 짓는 사건에는 ‘이삭의 분별력 있는 순종’이 함께 있었다고 믿습니다. 이 점을 살펴봄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먼저 아브라함이 백세 되어 낳은 아들 이삭을 드리는 사건은 언제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이 대략적으로 120세 전후의 나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추측합니다.

이 말은 그가 100세되어 낳은 이삭의 나이가 못되어도 10대후반에서 20대 중반의 건강한 청년의 나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학자들의 추정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의 하나가 <창. 22장6절> 말씀인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6)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희생제물을 잡아 번제로 드릴 때 필요한 나무를 취하여 아들 이삭에게 지우게 하여 높은 산,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말은 ‘희생제물을 잡아 모두 불태워 제사할 만큼의 무거운 량의 뗄감 나무’를 지고 해발 750m의 높은 모리아산을 갈 정도로 이삭은 신체적으로 성숙된 나이가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의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때의 이삭은 어린 미소년의 나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점은 이삭이 120세 정도의 고령의 아버지 아브라함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강하고 힘이 셌을 것이고,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늙은 아버지의 명에 저항하고 거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늙은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 뗄감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난 다음, 그 장작 더미 위에 올라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신 예수님처럼, 이삭도 아버지의 인격과 믿음을 신뢰함으로 자발적으로 ‘희생제물’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을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신학자들이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삭은 이렇게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좇아 희생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평소 믿음을 말로 만이 아니라 삶으로 부여 준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실한 믿음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버지가 명하는 것이 ‘정신이 나갔거나, 노망이 든 잘못된 말’이 아니라, 정신차린 말이요, 매우 엄청난 믿음에서 나온 말임을 그는 분별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명하심에 순종하여 드리는 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순종만이 아니라 아들 이삭의 순종, 곧 ‘맹목적 순종이 아닌 분별력 있는 순종’이 하나가 되어 드려진 놀라운 ‘순종의 제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삭의 조용한 성품 가운데 숨어 있는 이와 같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하나되는 그의 영적 분별력을 통한 놀라운 순종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영적 거인의 믿음’이라고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평가일 것입니다.

둘째, “온유한 영성”입니다: 우리가 올 봄에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시작하며 주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말씀 가운데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라고. 그때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며, 성경에서 말씀하는 ‘온유’는 본질적으로 ‘단순히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가 아니고, ‘거친 야생마를 길들인 상태의 온유’임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우리 말에 보면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강한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외유내강>의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한 사람’이요,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이삭’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온유의 사람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이와 같은 이삭의 ‘온유’한 성품은 하나의 타고난 기질적인 특성이라기 보다는, 그의 영성에서 비롯된 영적 특성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이 포함된 <창세기 26장>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 해에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어 이삭이 블레셋 땅에 가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 땅에 머물라’고 명하셨고, 그가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해에 농사하여 백배의 수확을 거두고, 양떼와 소떼가 심히 많아지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블레셋 땅, 그랄 지방의 목자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그가 파 놓은 우물을 몇 차례에 걸쳐 묻어버리는 옳지 못한 행위’를 저질렀는데, 그는 그때마다 이들을 상대로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대항하지 않고 묵묵히 그 곳을 양보하고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물을 팠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몇 차례에 걸쳐서 다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 우물물을 다시 팠을 때 드디어 그랄 목자들이 방해하는 행위를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창. 26:22)고 말입니다. 이처럼 그가 ‘넓다’ ‘광대하다’는 뜻의 ‘르호봇’이라는 이름의 우물을 파고나서, 하나님께서 또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함께 하셔서 복을 주시고 그의 자손을 번성케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26:23~25).

그런가 하면, 2주전에 이 내용에 대해 잠깐 성도 여러분과 나눈 적이 있는데, 그것은 이 일이 있고나서 이 지역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과 그의 친구와 군대장관 비골이 그를 찾아와서 맹세하고 계약을 맺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창. 26:28)는 것입니다. 이들이 두려워함으로 이삭과 더불어 맹세함으로 서로간에 평화의 계약을 맺고자 원했던 이유는 자기지역에 찾아온 떠내기와 같은 나그네 ‘이삭’ 한 명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한가지는 ‘이삭이 어떻게 우물물을 팠는가?’하는 점입니다. 이점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창. 26:18)라고. 성도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 하시겠지만, 건조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중동지역에서 ‘우물’이라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과 동물과 모든 농작물들에 있어서 말 그대로 ‘생물수’인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이삭이 판 우물들은 이미 그 아버지 아브라함때에 팠던 우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삭이 힘들여서 새로운 우물물을 파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손쉽게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는 식의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더 깊은 영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로이드 존스’목사는 <영적 침체> (Spiritual Depression)이라는 주제의 시리즈 설교에서 ‘주제’되는 말씀의 하나로 오늘 본문이 포함된 이 <창. 26장>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 중심되는 메세지는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때의 우물물을 다시 팠다’는 것은 ‘마시는 물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 그 이상으로써 ‘영적 부흥’의 핵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삭은 ‘믿음의 조상’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의 순종과 인내와 인격적 열매 맺음을 본받아 그랄에서 그곳 목자들과 다투지 않고 도리어 온유함으로 영적 능력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수많은 열매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방의 땅, 그랄에서 살아갈 때에 ‘그 지역사람을 두려워하고 눈치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눈에 보이는 우물만이 아니라 영적인 우물을 팠다’는 것입니다. 앞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삭이 몇 번씩이나 그랄 목자들의 우물물을 메워버리는 악한 행동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맞대응을 하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그들에게 그곳을 기꺼이 양보하고 또 다른 우물물을 팔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동일하게 자기와 함께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그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동행하심을 그가 날마다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온유한 삶의 이유요 비결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실한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합니까? 경험하지 못한다면 왜 그렇습니까?

셋째, “대를 잇는 믿음”입니다: 제가 이삭의 삶을 묵상하며 마지막 나누기 원하는 그의 본받을 신앙의 모습은 ‘대를 잇는 믿음’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 중에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어려서부터 자라났지만 그 신앙의 유산을 이어가지 못하고, 성장하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중심이 흔들리며 방황하는 시간을 보낸 형제 자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난 수많은 청년들이 그 부모의 믿음을 이어받지 못하고, 세상 가운데서 집 나간 탕자처럼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영적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점을 생각할 때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를 잇는 신앙의 삶은 더욱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주며, 강력하게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가정에서 자라난 우리 청년들이 성장하면서 왜 갈등하고 방황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지?’는 우리 ‘아포슬교회’와 같이 청년사역을 담당하는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저에게 있어서도 큰 질문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이유가 단지 청년들 자신의 문제로 돌릴 수 없음을 저는 잘 압니다. 부모님과 자라난 교회의 어른들이 과연 믿음의 본을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보여 주었는지 하는 질문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믿은 부모와 신앙의 선배가 바른 본을 보이지 못하고,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아갈 때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청소년들은 안타깝게도 그런 부정적인 모습에 훨씬 더 강력하게 영향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그들이 자라난 환경, 특히 또래집단 친구들의 영향력과 성적, 물질적, 세상 문화와 철학과 학문들의 유혹과 같은 세상의 여러 유혹들이 하나님을 믿는 순전한 믿음을 흔들고 청년들을 세상 가운데 방황케 하는 안타까운 영혼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우리 교회 청년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격려하기 원하는 것은 ‘이삭이 평생을 통하여 보여준 대를 잇는 믿음’의 견실한 모습입니다. 이 점을 살펴봄에 있어서 사실 이삭의 삶의 모습이 과연 어떠했는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성경구절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평생을 통한 믿음과 삶의 모습을 짐작하게 되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창세기 24장>에 나와 있는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처음 맞이할 때의 모습’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어머니 사라의 죽음으로 인해 큰 마음의 상심감 가운데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충성되고 나이 많은 종 ‘엘리에셀’이 멀리 아버지의 고향에 가서 그의 아내 리브가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함께 데려왔을 때의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의 종과 리브가가 먼 중동의 메마른 길을 낙타를 타고 지나와 마침내 집 가까이 다가왔을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창. 24:63)라고 말입니다. 긴 문장은 아니지만,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였다’는 표현속에 그가 상당히 사색적이고 찬찬히 자신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을 묵상하는 젊은이 임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신앙의 부모 밑에서 신앙적인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수동적인 사실 뿐 아니라, 자라나면서 자기자신과 그의 가정과 그의 신실한 두 부모의 믿음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해지는 들녘에’ 나가서, 혹은 ‘조용한 숲길’을 걸으며 묵상하는 가운데 자기 스스로 능동적으로 깨닫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통해 ‘아름다운 대를 잇는 믿음’을 이룰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각자가 만약 우리 자신의 지난 날의 믿음의 격동기와 영적 홍역을 앓으며 통과했던 시간을 돌아본다면, 아버지 아브라함과 어머니 사라의 귀한 신앙의 유산을 놓치지 않고 대를 이어 물려받은 이삭의 믿음이 얼마나 복되고 대단한 것인지 놀랍기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을 이어받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상태입니까? 우리가 아는데로, 이삭은 부모의 좋은 믿음의 영향력 아래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는 그 부모의 신앙을 자신의 단독적이요 주체적인 신앙으로 바꾸어 꽃 피울수 있는 온유하고 분별력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단순히 형식적이 아니라, 그 내면적으로 영적인 성숙과 하나님의 동행을 누리며 외유내강의 겸손하면서도 강인한 믿음의 삶을 이삭은 복되게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런 이삭과 같이 참된 온유와 영적 분별력을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며, 한편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양보함을 통한 선조들이 누렸던 영적 부흥을 경험하며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넉넉히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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