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적 유대인” (A Jew Who Is One Inwardly)
“이면적 유대인”
(A Jew Who Is One Inwardly)
3-29-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2:28~29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2주동안 <로마서2장>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어떤 기준으로 임할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는 ‘율법’이 그 기준과 잣대가 됨을 밝힙니다.
그 ‘율법’이란 유대인들에게는 <십계명을 포함한 구약말씀>이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속에 심어 주신 양심>이 율법이 됨을 사도는 영적으로 밝혔습니다 (롬.2:12-15).
이제 사도는 <2장>의 후반부말씀 (v.17~29)을 진술하면서, 구체적으로 ‘유대인의 문제’ 곧 ‘율법을 자랑하지만, 율법을 행하지 않는 모순’을 부각시킵니다. 저는 사도가 결론적으로 2장 마지막에서 결론적으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 (v.28~29)라고 선언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무엇이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의미인지?”를 묵상해봅니다. 그것은
첫째,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아 성령을 통해 사랑으로 율법을 성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인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지만, 그 정신은 망각한 것입니다.
둘째, ‘형식과 본질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유대인이 그토록 자랑하는 ‘할례’를 언급하며, “네가 율법을 행한 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 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v.25)라고 선언합니다. 이미 모세가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신.10:16)고 도전했듯이, ‘본질’ (마음/중심/진심) 없는 ‘형식’ (외적 종교생활)은 무효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바울이 말하는 ‘이면적 유대인’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을 말합니다. 이런 ‘이면적 유대인’은 마음에 할례 받은 자인데, ‘성령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음’ (빌.3:3)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며,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에 할례 받은 자’ 곧 ‘이면적 유대인’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계속해서 <로마서2장>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 믿음의 거울을 삼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 함께 살펴보았듯이, <2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의롭게 장차 우리를 심판(판단)하시는 ‘기준’이 바로 ‘율법’임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잣대가 되는 ‘율법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율법의 ‘원칙’과 ‘기능’과 ‘정신’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 인간 스스로는 율법을 모두 지킬수 없는 존재>임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피로 죄씻음 받아 생명을 얻고, 그의 영 성령으로 사랑을 행함으로써 율법을 완성시켜 나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라고 우리는 지난시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저는 오늘 <로마서 2장>말씀을 성도 여러분과 전체적 시각에서 묵상해 나가면서, 지난 시간에 ‘율법과 우리 크리스챤과의 관계’에 있어서 못다 나눈 점들을 중심으로 좀더 깊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특별히 ‘유대인’이라는 그 상징적 단어를 통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 성도가 놓치지 말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자기정체성’과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점검해보는 시간되기 바랍니다.
지난 2주동안 우리는 <로마서2장>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을 먼저 <2장>을 시작하면서 사도는 ‘남은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도 동일한 죄를 범하는 사람의 모순’을 날카롭게 도전했던 것입니다. 심각한 것은 이런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마지막 심판날 엄중하게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v.2~12).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든 자들을 그 행한대로 심판하실 때 어떤 기준을 심판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앞서 언급했듯이, 그분의 ‘율법’이라는 ‘진리의 잣대’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더 놀라운 것은 사도가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진리의 잣대를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적용하는 이유를 영적으로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에게는 <십계명을 포함한 구약의 말씀>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말씀’이 됨은 두말할 것도 없고, 또한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마음에 새겨두신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행한다고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놀랍게 밝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누구도 ‘나는 율법을 몰라서 못 지켰다’라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 사도의 치밀한 영적 논리요 주장인 것입니다.
이점을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되는 ‘율법’에 대해 우리 각자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내 신앙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될 때, 비로소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을 행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해 나가게 됨’을 저는 강조 드린바 있습니다. 이것까지가 <로마서 2장>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16절>까지의 내용인데, 사도는 이제 계속해서 이어지는 후반부 <17절>에서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한 마지막절 <29절>까지의 말씀을 진행해가고 있습니다. 이 <후반부>내용은 한마디로 ‘유대인과 율법과의 관계’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이것을 조금 풀어 설명하면 ‘유대인은 율법을 통해 자랑의 근거로 삼고자 했지만, 실상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함으로 그분의 진노를 일으켰다’고 사도는 강하게 책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결론적을 ‘누가 진정한 유대인인가?’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합당한 자인가?’를 사도는 영적으로 잘 정의하고 밝히는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일 것입니다.
이제 저는 사도 바울의 영적 논리를 따라가며, 그 당시 유대인들과 율법은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이해해 가기 원합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 스스로도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요,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고백하듯이,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 오해하고 하나님의 선한 진리를 거스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여 범하지 않고,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저는 먼저 성도 여러분과 <로마서2장> 후반부인 <17~29절>의 사도 바울의 “유대인에 대한 도전과 책망”의 메시지는 갑자기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2장>을 시작하면서 1절에서부터 시작된 도전의 말씀이 더욱 강화되고 구체화된 말씀이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2장1절>에서 ‘남을 판단하면서도 동일한 죄를 범하는 사람’의 모순에 대해 사도가 도전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는데, 그때 ‘이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조상이요,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함으로 언제나 율법으로써 이방인들을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가 <1장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 인간의 불경건과 모든 불의의 긴 목록들을 <32절>까지 상세하게 열거했을 때, 이런 사도의 고발을 듣고 맞장구 치며 ‘맞아요, 사도 바울 당신의 말이 맞아요! 이런 죄를 범하는 자는 모두 심판 받아 마땅해요!’라고 남을 판단하는 자는 그 누구보다도 첫째 유대인이라고 우리는 나누었습니다. 물론 둘째는 헬라인, 곧 모든 이방인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2:1~10).
따라서, 사도는 <2장>의 후반부를 시작하면서 <17절>에서 <29절>까지 구체적으로 ‘유대인’이라고 그 대상을 분명히 거명하며, 그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v.17~21a)라고. 이처럼 유대인 스스로 자랑하고 확신하는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사도는 선명하게 밝혀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사도가 <2장>을 마무리하며 결론적으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 (v.28~29)라고 선언하는 말씀에 좀더 집중하고자 합니다. 사도는 지금 ‘누가 진정한 유대인인가?’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써 그분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에 합당한 유대인인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서 비롯된 특권의식과 우월감이라는 스스로 높아진 마음으로 인해, 영적 맹인과 같이 자기 자신을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그들의 영적 모순을 고발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무엇이 사도가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선언하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유대인의 문제를 묵상하며, 이것은 본질적으로 우리 신앙인이 극복해야 할 대표적인 비뚫어진 영성과 성경말씀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임을 깊이 느낍니다. 다시 말해, 특별히 <2장>에서 사도가 강하게 유대인들을 향하여 문제제기 하는 핵심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심히 자랑하면서도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맡았다는 것을 큰 특권으로 알고 자부심을 느끼며, 스스로 율법을 잘 듣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율법을 순종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은혜는 그 누구도 작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심히 큰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광과 특권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영예를 누렸고, ‘복의 근원’으로 하나님이 복주신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며, 거룩한 율법을 맡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앞서 살펴본데로, <17~2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v.17-18)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신 택하심과 율법의 진리를 누리게 하심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요, 비난 받을 일도 결코 아닙니다. 다만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늘 하나님께 겸손함으로 감사해야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의 핵심은 ‘율법을 하나님께서 왜 주셨는지?’를 안타깝게도 대다수 유대인들은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자랑거리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행하라’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 (v.19)라고,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 (v.20)이라고 스스로 믿으면서도, 자신을 가르치지 않고 영적으로 심히 어두운 모순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 (little children)는 문자 그대로 ‘어린 아이’가 아니라, ‘그 당시 이방인으로써 유대교로 개종한 신앙적으로 초보인 자’를 의미합니다.
문제는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점을 유대인들을 향해 도전하는 것입니다.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v.21-23)라고 말입니다. 이런 모든 모순의 뿌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율법의 정신입니까? 저는 지난시간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이 율법을 통해 자랑케 하고자 함이 아니라, 반대로 내 스스로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자 함’이요, 이로써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자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주시고 성령을 통해 율법을 완성해 주시기를 추구하고 간구함’이 율법의 정신이요, 목적임을 우리는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은 율법을 맡은 것이 자신들만의 특권이요, 율법을 가지고 듣는 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받은 것처럼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비록 자기 동족이지만, 유대인들을 향해 이토록 신랄하게 도전적 메시지를 던지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해 <율법의 정신을 깨닫지 못한 자들은 전혀 진정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 곧 ‘영적으로 깨닫음을 받은 합당한 유대인’이 아니다>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합당한 유대인, 곧 ‘이면적 유대인’의 뜻입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진리의 말씀을 자랑만하고, 행하지는 않는 유대인과 동일한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습니까?
둘째, ‘형식과 본질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2장>후반부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도전적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그 중심에 ‘율법을 어기고, 율법의 정신을 오해한 문제’를 그가 날카롭고 논리적으로 주장함을 우리는 앞에서 소상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오늘 본문을 포함한 마지막 <네절>인 <25~29절>에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 가운데서도 그들 스스로 가장 자랑스러워 하고, 이방인과 뚜렷이 구분되는 증거로 내세우는 “할례” (circumcision)을 언급합니다. 먼저 그는 이렇게 문제 제기합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 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 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v.25~27)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이해할 것은 <할례>는 무엇이며, 언제 주어졌는가? 입니다. 이것은 <창세기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10-11)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에 속한 모든 남자는 ‘생식기의 표피’ (양피)를 베는 의식, 곧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명하심으로 시작된 ‘남성의 양피를 베는 의식’인 <할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유대인들이 대대로 지켜오는 ‘할례’의 뜻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창세기 17장>에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 (약속)에 동참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할례’라는 형식(의식)을 통해 <세상사람들과 구별되게 하고, 그의 자손을 언약의 땅에서 영원토록 번성케 하실 것이라는 그 약속에 신뢰함으로 동참한다>는 것이 할례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언약에 동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믿는다는 뜻이요,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평생을 통해 경배하고 순종하겠다는 맹세의 의식’이 할례의 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중요한 것은 ‘할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할례의 영적 의미로 살아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몸에 행하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할례의 정신과 그 뜻을 기억하고 순종함으로 날마다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금전에 읽은 <25~27절>에서 사도가 유대인들을 향해 도전하는 요지입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 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 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v.25)라고 말입니다. 만약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몸에 행하는 할례는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할례는 무효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상징이요, 형식인 몸에 행하는 할례가 전부인양 여기면서, 정말 중요한 그 할례의 정신과 내용을 무시한다면, 할례 자체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모세가 그의 마지막 고별설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할례>를 가지고 얼마나 오해하고, 육체를 자랑하는 도구로 삼을 것인지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이렇게 놀랍도록 경고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10:16)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분명히 유대인들을 향해 몸에 행하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행하는 할례가 중요하다고 분명하게 도전하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곧 참된 유대인은 껍데기와 같은 ‘형식’만 있고, 진짜 내용인 ‘본질’은 빠져 있는 그런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순종 없는 할례는 무효요, 참된 할례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행하는 할례라야 한다는 사도는 그 당시 유대인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향해 또한 도전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성도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질문하기 원합니다. 혹시 우리는 침례 받고, 믿음으로 구원받고, 교회 참석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의 마음은 이미 말라 있고, 감사도 기쁨도 감격도 사라졌는데, 껍질만 남은 형식화된 종교생활을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이면적 유대인’ 곧 ‘속사람이 유대인’이 참된 유대인이라고 도전하는 의미는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진정한 유대인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여기서 잠깐 우리 기독교2천년 역사에서 시대와 장소와 민족을 불문하고 늘 우리 성도들의 ‘믿음과 영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2가지 극단적인 사상>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것은 첫째 <율법주의> (legalism)이고, 둘째는 <반율법주의 (=율법폐지론)> (antinomianism)입니다. 먼저 ‘율법주의’는 말그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상>인데, ‘유대인’의 경우를 통해 이미 앞에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고, 스스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신앙형태’가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렇게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이 불행하게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크리스챤들은 적어도 ‘자신이 행위로 구원받고자 한다’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챤들’의 구원관은 ‘율법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임을 대부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삶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성전에서 기도하는 한 ‘바리새인’처럼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끝임 없이 자신의 행위 속에서 찾고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 은연 중에 무의식적으로 남과의 비교를 통하여 자신의 잘남을 뽐내고, 의로운 존재임을 행위로,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21세기의 바리새인들이요, 율법주의자들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반율법주의> 혹은 <율법폐지론>은 <율법주의>와 정반대적인 개념으로써, <구원받은 자는 율법의 요구를 따를 필요가 없고,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또 하나의 극단적인 사상>입니다. 물론, 전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방종’과 ‘무법 상태’를 조장하는 이런 ‘반율법주의’는 율법주의 못지않게 위험한 사상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사에서도 볼 때도 초대교회 당시의 ‘영지주의자’나 오늘날 ‘구원파’와 같은 기독교 이단들에게서 이런 극단적인 율법 폐지론적 사상이 사용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두 극단으로 치우친 것이 한쪽은 ‘율법의 행위로 스스로 구원 얻겠다는 <율법주의>’라고 한다면, 다른 한쪽은 ‘이미 구원받은 자는 율법과 상관이 없고, 예수님이 오셔서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반율법주의>’인 것입니다. 제가 이 두가지 율법에 관한 잘못된 사상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런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결국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그분께 불순종하며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23~24절>말씀입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v.23~24)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52:5>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이 더럽힘을 받게 되었음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자랑하고, 그 율법을 가지고 선생이 되어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못했을 때, 가장 심각한 것은 그들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그분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먼저 율법을 받았고,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명하는데로 순종으로 살아갈 때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리지만, 문제는 그들이 율법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우상숭배를 하게 될 때는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함으로 그분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2장>을 마무리하며 사도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마지막 <29절>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v.29)라고. 무슨 말입니까? ‘오히려 속사람이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며, 율법의 조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할례’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참할례를 받은 사람, 즉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육신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마음에 받은 할례를 통해 육신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율법을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 사랑으로 성취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입니까? 사도 바울의 이 마지막 도전인 ‘당신은 속사람이 유대인입니까?’라는 질문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유대인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택한 자녀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은 후손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영적 유대인일까요? 그는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누가 진정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것을 <빌립보교회>성도들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영적으로 잘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3:3)고 말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배드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며, 육신을 신뢰하지 않음’으로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과 은혜를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그 뜻에 순종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