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30, 2021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자” (A person who does not condemn by himself)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14:22
Service Type: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자”

(A Person who does not condemn by himself)

5-30-21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4:22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So whatever you believe about these things keep between yourself and God.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condemn himself by himself by what he approves.)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로마서 14장>에서 <음식의 문제>에 대해 영적 가르침을 주면서, 음식은 결코 성도들의 믿음을 좌우하지 못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v.23)고 선언합니다.

그것은, 신앙양심의 옳다고 믿는 바를 좇지 않고, 거리낌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음식문제로 인하여 공동체가 서로 반목하게 된 것을 바르게 지도할 뿐 아니라, 각자가 어떻게 양심의 명령을 따라 올바른 신앙생활 할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 <22절>에서 “~ 자기의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롬. 14:22)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신앙양심을 따라 옳다고 인정함을 따라 행함으로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는 자는 복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이해하자면, 신앙을 거스려서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행하는 자는 복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스스로 이미 ‘정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자신을 정죄하지 않을수 있을까요?” (How do we stop ourselves by self-condemnation?)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내 인생의 설계자임을 이해하는 것’ (We may stop ourselves by understanding God’s plan to us)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엡. 1:4~5)라고 우리 성도의 구원의 비밀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을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 (엡. 2:10)임을 이해하는데서 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둘째, ‘지나간 과거는 돌아오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 (We may stop ourselves by accepting ‘passing time never come back’)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돌을 쌓고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 불렀습니다. ‘길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다’는 뜻 입니다 (수. 5:9). 우리가 자신을 정죄하는 많은 이유의 하나는 지나간 과거의 실수와 상처, 고난과 수치를 굴러 보내지 못하고 움겨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굴려 보내야만 합니다.

셋째, ‘현재의 나의 존재를 깨닫는 것’ (We may stop ourselves by recognizing our status in God)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 3:21~22)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인데, 그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 (요일. 3:23)을 지키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해 나갈 때 더 이상 우리는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 전문]

            우리 크리스챤들 가운데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신앙의 양심과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음의 명령을 좇지 않고 믿음 따로 행위 따로 이렇게 두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도 안타깝지만 있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심각한 점은 <믿음의 명령>을 좇아 살아가지 못하는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의 영적 문제점조차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믿음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삶 가운데 옳다고 믿는 바에 있어서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고, 담대하게 사자처럼 살아가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자신을 더욱 용납하고 참되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로마서 14장>은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음식문제>에 대해 영적 가르침을 주는 말씀입니다. 요지는 ‘음식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성도들의 음식에 대한 태도인데, 현실적으로 ‘믿음이 강한 자는 그 음식에 얽매이지 않는 반면에, 믿음이 연약한 자는 거리끼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연약한 자가 어떤 음식에 있어서 거리껴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 자신이 크리스챤이 되기 전에 특정 음식에 대해 가졌던 선입관이나 그 음식으로부터 받았던 좋지않은 영향력, 그리고 그가 과거 어떤 종교에서 그 음식에 관련한 명령 (가르침)이 그 이후 크리스챤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 음식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이유가 어찌되었건 믿음이 연약한 자는 양심의 거리낌으로 인해 그런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심각한 것는 음식을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향하여, 또한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향하여 서로를 비난한다는 점입니다. 서로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은 <롬. 14장>에서 결론적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먹는 자도 주를 위해 먹지않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해 먹기’ (롬. 14:6~8)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먹는 자도 자신의 신앙양심에 거리낌 없이 그 자유함을 따라 먹었고, 먹지 않는 자도 자신이 가진 신앙양심의 명령을 좇아 거리끼는 것을 먹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고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각자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믿음 안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경우는 단순히 음식 뿐만 아니라 생각의 차이, 그리고 그 사람과 나의 취미와 가치관과 같은 여러가지 차이점’으로 인해 함께 주님의 몸된 지체가 되었음에도 서로를 비난하고 무시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비난과 책망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는데 심각성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v.22)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자신을 책망 (=정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 왜 심각한 문제인지? 를 함께 살펴보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품어주며 건강하고 성숙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제가 여기서 ‘자기 스스로를 책망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끔씩 문뜩 문뜩 과거를 회상하며 “그렇게 계속 살았으면 내 인생이 확짝 폈고, 행복길 환히 열였을 텐데…”라고 지난 날을 되돌아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계속해서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현재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아쉬워하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된 자신에 대한 불만과 후회스러움으로 스스로를 책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에 대한 책망은 과거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재에서도 계속됩니다. 현재에 스스로가 하는 행동과 삶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곧 ‘자신이 신앙양심에 따라 옳다고 믿는 바 대로 행하지 않고,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행하는 자는 불행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심의 명령을 어기며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했다면 우리가 최종적으로 살펴보기 원하는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신앙양심의 명령을 거스리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자신을 정죄하지 않을수 있을까요?” (How do we stop ourselves by self-condemnation?)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내 인생의 설계자임을 이해하는 것’ (We may stop ourselves by understanding God’s plan to us)입니다: 성경 말씀이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하나님은 철저하게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믿음을 통해 그분께 나아오기를 요구하시지만, 동시에 그의 자녀들을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고 선언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엡. 1:4~5)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의 영적 신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 근본적으로 따져 본다면, 그 어떤 나의 행위에서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골자는 ‘만약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그것은 결코 내가 어쩌다 운좋게 믿다보니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과 저의 인생은 완벽한 설계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믿음으로 행하느냐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 각자가 보아야 하는 큰 그림입니다. 산을 등산할 때 나무를 보기 전에 숲을 보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만약 내 자신이 어떤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걸작품’ (masterpiece)임을 진정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욱 더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을 더 품어주고 자신과 평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지나간 과거는 돌아오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 (We may stop ourselves by accepting ‘passing time never come back’)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과거는 돌아오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돌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돌을 쌓고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 불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길갈’의 뜻은 ‘굴러간다’는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 5:9). 그것은 이스라엘민족이 지난 날 애굽의 종살이하며 보냈던 치욕의 날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흐르는 강물과 함께 흘려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모든 성도는 과거의 고통과 치욕의 순간들도 또한 흘려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과거를 놓치 못하고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저 자신도 과거의 즐겁고 감사한 기억과 함께 불만스럽고 마음을 무겁게 하는 기억을 때로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 기억을 해결할까 고민하곤 합니다. 이런 생각에 잠길 때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중세 천년의 종교적 암흑을 깨고 참된 신앙의 자유를 외치며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올렸던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가 젊은 날 카톨릭 사제로 있으면서 참된 신앙을 얻고자, 수없이 많은 고해성사를 하며 베드로성당 계단을 무릎으로 피를 흘리며 기어올랐다는 일화를 여러분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서 계속해서, 아니 더욱 준엄하게 자신을 향해 외치는 율법의 정죄함에 그는 괴로워했고 절망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마침내 감사하게도 깨닫게 된 복음의 진리는 바로 그 유명한 <롬. 1:17>말씀인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율법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정죄를 받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라, 약속의 성령을 통하여 그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김으로 즐거워하고 육신으로 행할수 없었던 그 선한 법을 행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과거의 모든 무겁고 후회스러웠던 기억은 이제 흘려 보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과거의 것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여러분과 저를 정죄할 수 없고, 고통에 가둬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현재의 나의 존재를 깨닫는 것’ (We may stop ourselves by recognizing our status in God)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과연 어떤 영적 신분을 가진 존재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에게 허락하신 영적 특권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얼마만큼 이해하십니까?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 3:21~22)라고. 요한은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우리 스스로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근거가 무엇인지를 <그분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그의 계명은 ~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일. 3:23)고 ‘사랑의 계명’을 말합니다.

이러한 요한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자동적으로 자녀가 누리는 영적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영적 자유는 그분의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함을 통해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의 명령’을 서로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고,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사자처럼 담대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자녀의 존재를 깨닫아 나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를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배로우신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갚아 주시고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음을 온전히 깨닫고 그 자유를 누려 나갈 수 있는 것일까요?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자녀된 영광스러운 신분을 날마다 더욱 깊이 깨닫아 나감으로 자신을 이기적으로나 교만함으로가 아니라, 겸손과 진실되게 더욱 사랑함으로 영적 자유를 더욱 풍성히 누려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