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장사 루디아” (Lydia, A Dealer In Purple)
“자주 장사 루디아”
(Lydia, A Dealer In Purple)
5-12-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6:14~15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One of those listening was a woman named Lydia, a dealer in purple cloth from the city of Thyatira, who was a worshiper of God. The Lord opened her heart to respond to Paul’s message.)
15 그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When she and the members of her household were baptized, she invited us to her home. “If you consider me a believer in the Lord,” she said, “come and stay at my house.” And she persuaded us.)
[설교 요약]
오늘 어머니 날을 맞이하여,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믿음의 여인, ‘루디아’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사도 바울의 <2차선교여행>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통하여 이것이 성령의 지시하심임을 바울과 일행들이 깨닫고 순종함으로 ‘마게도냐’ 즉 ‘유럽’으로 선교방향을 수정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행. 16:6-10).
그리하여, 이제 사도 바울일행은 마게도냐의 첫 항구도시 네압볼리에 도착한 후에 ‘빌립보’성으로 가서 유럽의 전도역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v.11-12). 그때 그들이 복음을 전한 시간과 장소를 저자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v.13)라고.
여기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곳 강가에서 모여 기도하던 여인중에 ‘두아디라’성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하던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먼저, ‘루디아’는 어떤 여인일까요? 그 당시 그녀는 유대교로 개종한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었고, 직업은 왕과 귀족의 옷으로 쓰였던 ‘자색 옷감’ 장사였습니다 (v.14).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루디아를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점일까요?” 그것은
첫째, “복음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v.14a)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 한가지 이해해야 하는 구원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v.14b) 이 구원은 주께서 우리의 마음문을 열어 주실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셋째, “온전히 섬김으로 열매 맺었다’는 것입니다: 루디아는 구원받게 되었을 때, 바울과 일행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유하게 하며,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삶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v.15). 받은 구원의 감격으로 인해 공동체를 사랑하고, 복음의 통로가 되기 원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루디아와 같이 귀를 열어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복음을 위해 삶을 아름답게 드리는 주님의 충성된 제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제에게 있어서 힘들고 낙심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생각하면 큰 힘과 소망을 주는 한 예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 여러분도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기독교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신실한 성도로 일컬어지는 성 어거스틴을 믿음으로 키운 어머니 모니카에 관한 일화입니다. 어거스틴은 청년시절, ‘마니교’라는 종교의 잘못된 사상에 심취하였을 뿐 아니라, 육신적으로는 사생아를 낳게 하는 타락한 삶을 살아감으로 어머니 모니카를 힘들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엇나간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어느날, 그날도 아무도 없는 교회의 뒷자리에 혼자 앉아 눈물로 기도하던 모니카에게 암브로시우스 목사는 무슨 일로 이렇게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지를 그녀에게 묻었고, 그녀는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그녀에게 남겼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결코 자녀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라고. 오늘은 ‘Mother’s day’입니다. 이 따의 모든 어머니의 사랑과 섬김이 없었다면, 과연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어머니 날을 맞이하여, 믿음의 여인, ‘루디아’에 대해 함께 은혜의 시간 가지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참된 믿음만이 모든 것을 이기고, 주와 함께 승리함을 깨닫게 됩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의 열린 마음과 아름다운 믿음이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도 성령충만함으로 넘쳐나고, 이런 복된 믿음으로 주 앞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함께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과 일행들의 <2차선교여행>과정에서 성령의 충만하고 강권적인 인도하심으로 중대한 선교방향의 변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로의 선교여행을 계획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그 계획을 허락지 않으시고, ‘마케도냐’ 곧 오늘날 ‘유럽’으로 그 선교의 방향을 전환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령의 아시아에로의 선교여행의 방향을 막으심과 마게도냐인 환상을 통하여 유럽으로 선교방향을 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깨닫고, 즉시 그 뜻에 순종함으로 마게도냐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과 일행은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역사적인 ‘마게도냐 지역’ 곧 ‘유럽’으로의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앞 <11-12절>말씀입니다.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v.11-12)라고. 이들은 소아시아의 항구 도시 ‘드로아’에서 배 타고 ‘사모드라게’ (‘드라게’의 높은 봉우리라는 뜻)의 섬을 거쳐서, 유럽지역의 첫 지역에 해당하는 항구 도시 <네압볼리>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빌립보’ 남동쪽으로 16km정도 떨어진 지점입니다. 그리고 이들 일행은 <네압볼리>에서 다시 진행하여 <빌립보>에 도착하게 되는데, 저자 누가는 이 ‘빌립보’를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v. 12)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는 주전 4세기 중반에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는데, 주전 2세기 중반, 로마에 의해 정복됩니다. 그리고 이 ‘빌립보’는 ‘로마의 축소판’라 불릴만큼 로마의 법과 생활방식을 그대로 따랐던 도시였습니다. 여기서 저자 누가는 ‘빌립보’를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라고 소개하는데, 그 이유는 이 곳이 ‘바울 일행이 마게도냐에서 첫번째로 마주한 성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게도냐의 가장 ‘으뜸가는/유력한’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빌립보는 종교적으로도 그리스 로마의 여러신들을 믿는 ‘다신숭배’와 로마황제를 신격화한 ‘황제숭배’ 도시로도 유명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게도냐 지역에 들어가는 첫번쨰 관문에 해당하는 빌립보지역에 바울일행이 도착하게 되었고, 그 도착하게 된 빌립보에서의 <첫장소와 시간>을 저자 누가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v.13)라고. 이제 바울 일행이 본격적인 마게도냐 전도여행을 시작함에 있어서, 이들은 마게도냐의 중심부인 ‘아테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에서 그것도 도시의 외곽인 강가에서 여인들의 기도모임 가운데서 시작되었음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복음의 출발하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럽으로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유대인종교의 중심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요, ‘막강한 권력의 상징인 <로마 황제의 궁전>’에서도, ‘인류 철학과 문명의 중심지인 <아테네 광장>’도 아니요, 단지 도시의 변두리 강가에서 이름모를 여인네들이 안식일에 모여 기도하는 모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방법인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곳 강가에서 모여 기도하던 여인중에 ‘두아디라’성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하던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믿음의 여인’이 된 ‘루디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자주장사 ‘루디아’가 어떻게 복음을 영접하고, 주님의 참된 제자로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각자의 귀한 본을 삼고자 합니다.
먼저, ‘루디아’는 어떤 여인일까요? 오늘 본문말씀 <14절>은 ‘루디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루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v.14a)라고. 여기서 ‘루디아’라는 그녀의 이름은 사실상 이름이 아니라, 그녀의 ‘출신지역의 이름’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그녀은 루디아 출신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직업이 ‘자색 옷감을 판매하는 자주장사’인 것입니다. 이 당시 ‘자색옷’은 ‘왕’이나 ‘귀족과 같은 부자들’이 주로 입던 옷이었는데, 이처럼 자주색 옷감으로 물들일 ‘자주색 물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조개에서 한 방울씩 수집해야 하기 때문에, 이 옷은 매우 고가에 팔렸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런 자색 옷감을 장사했던 그녀가 상당히 상류계급 출신의 부인이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색옷이 그 당시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고급품’이었기에 이런 물품을 장사하는 데는 ‘상당한 자본’이 필요했고, 또 그 옷을 팔았을 때 많은 수익을 내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루디아를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점일까요?” 그것은
첫째, “복음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루디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섬겼던 여인이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녀가 왜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이 안식일날 빌립보 성문 밖 강가에 찾아 갔을 때, 거기 앉아서 있었던 여인들 중에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떤 설교자들이 추측하듯 바울이 우연히 안식일 날, 성밖 강가에 기도하러 갔다가 그들 무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하나님을 믿는 무리들이 안식일날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장소를 찾아 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해볼 것은, 앞서 <13~14장>에서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당시에 구브로섬의 항구도시 <살라미>에서 유대인의 여러 회당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 또 버가의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도 안식일에 유대인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는 가장 우선적인 선교전략의 하나로 그 지역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을 경우에는 먼저 그곳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구원자, 곧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성경의 진리를 믿는 자들에게 먼저 그 약속의 주인공이신 ‘나사렛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한 선교전략이라고 사도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가는 회당마다 나사렛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했을 때, 많은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이곳 빌립보에서는 회당에 가지 않고, 대신 성 밖 강가에서 모여 있는 여인들 무리에게로 간 것일까요? 왜냐하면, 이곳에는 유대인들이 적었기 때문에 유대인 회당이 따로 없었던 것이고, 성 밖 강가 한적한 곳에 유대인의 회당을 대신하여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 여인들이 안식일날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이 기도장소를 찾다가 우연히 마주친 곳이 그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강가에서 모여 안식일에 예배 드린다는 것을 사전에 누구에게 선가 듣고 찾아 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13절>에서 ‘여인내들이 안식일날 강가에 모여서 집안 빨래하거나, 한가롭게 수다 떠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함께 기도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고, 또한 <14절>에서 ‘루디아’를 소개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볼 때 루디아는 비록 이방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예배드리고자 추구했던 경건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루디아는 바울의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처럼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없이 바울의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베뢰아 사람들처럼 열린 마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하였다)” (행. 17:11)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에서 선언하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의 믿음의 시작은 바로 생명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루디아도 복음을 들은 것입니다.
둘째, “마음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어떻게 한사람의 인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순간에 이르게 되는 ‘회심’을 경험하게 되는지를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고자 노력할지라도, 그 놀라운 구원의 신비를 우리는 온전히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 한가지는 이런 회심의 역사는 ‘마음 속’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 <마음의 문을 열므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죄를 회개하고 마음의 문을 열고 구원의 주요, 영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실 때, 여러분과 저는 죄사함 받고 구원함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구원받았음을 확신하신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영생을 확신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년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영접’에 대해 분명히 질문하는 이유도 이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루디아도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이 구원이 놀라운 신비로 우리의 머리로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야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v.14b)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번 이해하게 되는 것은 ‘비록 나의 마음이라 할찌라도, 내 마음을 여는 것은 어떤 나의 의지나 노력이나 힘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요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밝힌 구원의 핵심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 루디아가 먼저 구약성경에서 드러난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그분을 추구함으로 그의 자녀되기 원했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어두웠던 영적 눈을 여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녀의 마음을 여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로 자신의 구원을 공표했고, 자신 뿐 아니라 모든 가족에게도 함께 구원받는 축복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경건한 로마군대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 모두가 사도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마음을 열어 믿음으로 구원받았듯이, 루디아도 마음을 열어 그 모든 가족들이 함께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셋째, “온전히 섬김으로 열매 맺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루디아가 구원받고, 주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 맺히게 되는 영적 열매를 우리가 끝으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녀에 대한 오늘 마지막 말씀은 <15절>에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v.15) 루디아와 그녀의 모든 집안 식구들이 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침례 받은 후에, 그녀는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에게 이렇게 강하게 권유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 입니까? 이 말은 ‘만약 당신들이 내 집에 유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는 당신들이 나를 믿지 않는 자로 여기는 것으로 이해할 것입니다!!’라는 뜻이죠. 그러나, 물론 이런 그녀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바울 일행이 그녀 집에 묵든지 안 묵든지, 그것이 그녀의 믿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녀가 왜 이토록 강권하여 말하는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이것은 그녀의 받은 구원의 감격함으로 공동체를 귀하게 섬기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정확히 첫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충만하여 주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를 기억하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모든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6) 너나 할 것없이 서로의 필요를 따라 물건을 통용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루디아가 오늘 말씀에서 보인 태도도 같은 이유라고 믿습니다. 자신과 온 집안이 구원을 얻게 된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열어 바울 일행이 유하도록 강하게 권유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을 ‘가정교회’로 사용되어 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녀의 태도에서 볼 때,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한번이라도 더 말씀을 가까이서 더 자주 듣기를 원하는 갈급함을 느낄수 있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뜨겁게 기도하는 예배의 장소로 자신의 집을 그 복된 장소로 사용코자 원했던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부유한가 혹은 가난한 가도 아니요, 내 집과 나의 그 무엇을 함께 나누었느냐로 본질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의 중심에 주께 받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함이 있고, 모든 일상 가운데 자족함으로 이 세상의 그 어떤 부귀 영광보다도 주의 생명의 말씀이 귀하고, 허락하신 믿음의 가족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로만이 아니라, 진실로 깨닫고 고백되고 있느냐는 사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루디아는 그 구원에 감격했고, 그리하여 ‘주의 복음’을 위해 온전한 섬김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어머니의 날을 맞아 이 땅에 사랑으로 섬기고 헌신하시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주의 은총이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루디아’의 복된 삶과 같이 여러분의 귀를 열어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받은 구원에 감격하여 복음을 위해 삶을 아름답게 드리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