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4, 2025

“하나님과 겨루는 자” (Man Contending With God)

Preacher:
Series:
Passage: 창세기 (Genesis) 32:26~28
Service Type:

“하나님과 겨루는 자”

(Man Contending With God)

9-14-25

본문말씀: 창세기 (Genensis) 32:26~28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설교 요약]

오늘은 창세기의 인물, 3번째 시간으로 ‘야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의 파란만장한 삶 가운데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택하신 구원의 은혜와 야곱의 하나님을 향한 치열한 갈구는 무엇인지를 묵상하길 원합니다.

먼저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쌍둥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이라는 그의 이름도 먼저 태어난 형 ‘에서’의 뒷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뒷발꿈치를 움켜잡다’ ‘속이다’는 뜻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에 대한 기록은 대략 <창. 25~35장>인데, 그는 아버지 이삭이 무탈하게 외유내강의 온유함으로 대를 이어 믿음을 잘 물려받은 인물이라면, 야곱은 대조적으로 자신의 고백처럼 갖가지 시련과 풍파속에 ‘험한 인생’을 산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야곱의 삶을 결정하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축복>일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축복’이라는 주제로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야곱은 축복을 추구해 나갔을까요? 그것은,

첫째, “형의 장자권을 빼앗음으로써”입니다: 젊은 시절 야곱은 팥죽 한그릇에 형 에서의 ‘장자권’을 삽니다 (창. 25:27~34).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추구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나중에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체는 것은 성숙된 모습이 아닙니다 (창. 27장).

둘째, “가족과 물질적 복을 추구함으로써”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 집에 가 있던 20년동안 11명의 아들과 수많은 가축을 소유로 삼는 세상적 축복을 일구었습니다. 형이 있는 고향 땅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 시간까지 그는 이것이 축복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창. 28~31장).

셋째, “하나님과 씨름함으로써”입니다: 때가 되어 야곱은 형을 만나기 전날 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습니다. 곧 하나님께 ‘목숨을 건 간절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v. 26)라고.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이 소유한 것은 진정한 복이 아님을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전 인생을 살펴볼 때 야곱이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를 ‘움켜잡고 빼앗는 자’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자’ 이스라엘로 바꿔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분 만이 주실 수 있는 ‘이스라엘’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성경의 수많은 인물중에서도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과 매우 유사한 인물을 뽑으라면, 저는 단연코 야곱을 뽑고 싶습니다. 그만큼 야곱은 ‘빼앗고, 움켜잡고 자신이 꿈꾸는 야망을 성취하고자 온 힘을 다해 달려왔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창세기 인물연구 시리즈, 3번째 시간으로 ‘야곱’의 삶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 말씀으로 은혜나누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빼앗고 움켜잡는 자’, <야곱>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자’ 혹은 ‘하나님의 황태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축복된 ‘믿음의 선조’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야곱의 그 파란만장한 삶 가운데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택하신 구원의 은혜와 야곱의 자발적인 하나님을 향한 목숨을 건 치열한 추구는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그의 삶에서 신비롭게도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성취되는지를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야곱을 택하시고,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대합니다.

성도 여러분도 대부분 잘 아시는데로, 야곱은 지난 주 함께 나누었던 신앙의 인물,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 사이에서 쌍둥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야곱>도 그가 태어날 때, 먼저 태어난 쌍둥이 형 ‘에서’의 뒷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뒷발꿈치를 움켜잡다” 혹은 “속이다”는 의미의 ‘야곱’이라고 그 부모들이 이름 지은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단순히 이름처럼 ‘형의 발꿈치만 움켜잡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움켜 잡고, 빼앗는 삶’의 연속이었음을 성경에 기록된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쌍둥이 형제,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은 여러 면에서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외모에서 볼 때 형 ‘에서’의 경우는 태어 났을 때 살결이 붉고 온 몸이 털로 덮여 있다고 해서 ‘붉다’ ‘털이 많다’는 의미의 ‘에서’라고 이름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야곱’은 털이 없고 매끈매끈한 사람이었습니다 (창. 27:11). 그런가 하면, 성격 (기질)적으로도 형 에서는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짐승을 잡는 외향적인 타입의 사람인가 하면, 동생 야곱은 ‘마마 보이’처럼 늘 엄마 리브가 주위를 맴돌며 음식 만드는 것 도와주며 내향적인 타입의 사람으로 성장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사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비교하자면, 이삭이 조용하고 내실 있게 신앙의 유산을 잘 받아 누린 삶을 살았다면 야곱은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으며 그의 고백처럼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험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인 것입니다. 이런 삶의 유형과 기질의 차이가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람만의 독특한 삶 가운데 흐르는 신앙의 본은 무엇이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야곱은 여러가지 면에서 그 다양한 인생경험에서 우리가 할 말도 많고, 다루어야 할 점도 많은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야곱의 다양한 삶의 모습 가운데서도 특별히 ‘축복’이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인생을 성도 여러분과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살아온 인생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축복을 얻고자 온 힘을 다해 달려온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라고 ‘축복’을 원치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특별히 야곱의 인생만큼 이 축복을 향한 삶의 궤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람도 드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축복’이라는 단어를 어떤 사람은 ‘성공’ ‘행복’ 혹은 ‘만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부르는 표현방법의 차이일 뿐이지, 그 본질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축복인가?’하고 질문할 때, 저는 ‘그 사람이 신앙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들의 공통되는 추구함’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인간이 타고 나면서부터 본래적으로 가장 행복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최고의 상태>”가 <축복>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축복을 얻고자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추구했던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의 한사람이 야곱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런 질문을 통해 본격적으로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 야곱은 축복을 추구해 나갔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형의 장자권을 빼앗음으로써”입니다: 대략적으로 ‘야곱’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은 <창. 25장>에서 <창. 35장>까지입니다. 앞서도 야곱의 기질적인 특성을 잠깐 살펴봤듯이, 야곱은 형 에서처럼 활달하고 외향적으로 밖을 돌아다니며, 사냥하고 사람들을 두루 사귀는 타입과는 대조적인 엄마 주위를 맴졸며 집에서 보내기를 더 좋아하는 내향적인 스타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다른 한편 형 에서에 비해 훨씬 ‘경쟁심’과 ‘승부욕’이 강하고, 빼앗고자 하는 성향이 더 심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한번 목표를 정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쟁취하고자 돌진하는 사람’이 야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제가 말씀을 시작하면서 표현했듯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과 상당히 흡사한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의 삶의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관이 야곱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야곱처럼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보다는 내 방식’을 고집합니다. 목표가 좋은 것이라면, 그 과정이 남의 것을 빼앗고, 거짓말하고, 이기적이라도 상관없다고 치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과만 좋으면 그 과정은 악해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실까요?! 물론 아닙니다.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은 ‘결과가 선하기 위해선 반드시 그 과정이 선한지?’를 물으시는 하나님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선한 과정을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결과만을 추구했던 것이 야곱의 젊은 시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야곱은 젊은 시절, 형 에서의 장자권이 탐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은혜 (장자권) 최상의 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잘 아는데로 형 에서가 밖에 사냥하고 돌아왔을 때 형이 무척 배가 고플 것을 교묘히 이용하여 맛있게 팥죽을 미리 끓여 놨다가, 형에게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삽니다. 그것뿐 만이 아니라 그는 어머니 리브가와 한 팀이 되어 늙고 앞을 잘 못보시는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에게 주는 축복 (기도)’를 받아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그릇에 사게 되는 사건 속에서 역설적으로 형 에서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는가를 보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망령된 행동’이라고 엄중하게 에서의 어리석음과 영적 무지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6)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한가지 다루고 싶은 것은 ‘야곱과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행동’입니다.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자 이삭을 속여 축복기도를 받아냅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선한 목적을 위해 정당한 과정을 희생시킨 사건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권을 빼아았음으로 형 에서는 분노해서 야곱을 죽이고자 했고, 야곱은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잠시동안 피해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어머니 리브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간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은 이렇게 야곱처럼 결과가 좋으면 과정을 무시해도 된다는 잘못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런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시지도 않으며, 이런 무리한 과정 속에서의 갈등에는 반드시 ‘혹독한 대가지불’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목표를 위한 잘못된 과정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가족과 물질적 복을 추구함으로써”입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쟁취하는 것에서 구체화된 야곱의 복을 향한 추구는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 집에 가 있던 20년간 절정에 다다릅니다. 20년동안 야곱은 외삼촌집에서 ‘내것을 네가 다 빼아았다’라는 식으로 외삼촌이 말할 만큼 그는 큰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2명의 아내와 11명의 아들과 수많은 소떼와 양과 염소떼를 소유한 거부가 된 것입니다. 물론 외삼촌의 재산을 빼앗은 것은 아니고, 그가 성실이 일하고 노력해 일구어 낸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야곱이 많은 자손과 물질적 복을 누리게 된 것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과 같이 야곱을 속이고 이용해 먹으려던 외삼촌 라반의 모든 권모술수에도 불구하고, 야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그 권능의 손길이 함께 하셨기 때문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한 예로서, <창세기 30장>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과 서로 합의를 했는데, 점 있고 얼룩진 짐승이 태어나면 자기 것이 되고, 점 없는 것이 나면 삼촌 것이 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점이나 얼룩이 없는 것이 실제적으로 건강한 짐승임을 알았기에 외삼촌도 동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양떼와 염소 떼들이 모이는 물가에서 나뭇가지를 벗겨 얼룩 얼룩한 무늬를 만들어 건강한 짐승들이 짝짓기를 할 때 그것을 보게 했을 때’, 얼룩무늬 새끼는 대부분 건강한 것이 태어났고, 얼룩이 없는 새끼는 약한 것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전학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야곱이 했듯이, 얼룩무늬를 보여 주었다고 해서 얼룩무늬 새끼가 태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야곱이 깜찍한 꾀 한가지를 냈다고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권능과 은혜를 베푸심으로 이런 놀라운 일들이 야곱을 위해 베푸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외삼촌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막으시고 보호하셨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야곱이 20년전 형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떠나는 그 첫 순간에서부터 하나님은 ‘광야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는 고독하고 두려운 야곱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창. 28:10~15). 그래서 잠을 깬 야곱은 이렇게 놀라와 하며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세기/Genesis 28:16)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와 함께 하셨고, 그가 잘 깨닫지도 못하는 모든 순간들 가운데 신실하게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넘치게 필요한 양식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보낸 20년동안 자신이 꿈꿨던 많은 세상적 복을 쌓았습니다. 바로 자녀들과 물질적 복입니다. 여러분도 야곱처럼 세상이 부러워할 물질적 복과 세상의 성공을 위해 지금 무엇을 추구해 가고 있습니까?

셋째, “하나님과 씨름함으로써”입니다: 시간은 흘러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 머문지 20년만에 그는 이제 운명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야곱은 외삼촌집에 거하는 동안 열한명의 자녀들과 수많은 짐승을 소유하는 거부가 되었지만, 재산이 불어나면 날수록 갈등과 긴장도 점점 더 고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재산이 불어나면 날수록 그의 낯빛이 예전 같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외삼촌의 자녀들은 ‘저 야곱이 굴러 들어와서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아간다!!’라고 강한 피해의식 가운데 볼멘 소리하며 불만이 깊어 갔던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외삼촌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이 왔음을 그는 절감하게 되었고, 이제 고향으로 그의 무거운 발길을 돌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야곱이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심히 무거울까요? 그것은 당연히 형 ‘에서’ 때문일 것입니다. 고향 땅에는 20년 전 자신을 죽이고자 벼르던 형 에서가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자신이 받아야 되는 ‘축복’ (기도)를 가로채 갔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잘못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리고 형의 분노를 잘 기억하기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형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심히 무겁고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뒤에는 적개심에 가득찬 외삼촌 라반의 식구들이 지키고 있고, 앞에는 자기를 죽이고자 했던 형 에서가 있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점점 더 진행하여, 마침내 고향 땅을 눈 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루 뒤면 형과 만나게 되는 마지막 밤을 얍복 강가에서 홀로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 32장>의 사건입니다. 이 밤에 야곱은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했고, 그 사람은 그를 이길수 없게 되어 야곱에게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창. 32:26a)고 말했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6b)라고 야곱은 끝까지 그를 붙들고 ‘축복’을 간구했습니다. 제가 이해할 때 성경 가운데서 가장 신비롭고 상징적인 사건의 하나로 이해되는 이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밤새 씨름했던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나중에 이 상황을 되뇌이며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창. 32:30)고 고백했고,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의미의 <브니엘>이라고 그가 지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그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하며 ‘축복’을 목숨 걸고 구했다는 것입니다. 왜요? 왜냐하면, 야곱이 지금까지 축복처럼 여기며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었음을 그가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날이 밝아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는 형에게 만약 죽는다면, 그의 축복처럼 여겼던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참된 행복을 구했고,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고, 하나님의 황태자라고 참으로 과분하고 감격스러운 이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이름이 바뀌었을 때 야곱은 순순히 그 하나님을 가게 놓아 드렸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야곱이 본질적인 변화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요,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음을 그의 전 존재가 깨닫게 되었고, 그 축복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성도 여러분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축복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여러분 각자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여러분이 계획하고 소망하는 삶을 주님 안에서 성취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야곱의 삶을 통해 우리가 깨닫듯이 진정한 행복은 세상의 성공으로 얻을 수 없고, 참된 축복은 세상이 가져다 줄수 없음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그 홀로 된 외로운 밤에 경험한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축복의 은혜가 기대하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날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간구함을 통해 넘치도록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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