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2, 2026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1:16~17
Service Type: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

2-22-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because it is the power of God for the salvation of everyone who believes: first for the Jew, then for the Gentile.)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에 계속해서 <로마서>전체의 주제말씀이라 일컬어지는 ‘1장 16~17절’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16절>말씀 가운데서 사도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 우리는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주는 <17절>을 중심으로 ‘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도는 <16절>에서 ‘복음이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복음을 <총괄적으로 정의>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복음이 모든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정의>가 <17절>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v.17a)라고. 사도 바울은 <복음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으로써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논리적으로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흔히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불별하고, 공의롭고, 죄를 미워하는 성품으로서의 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반면에 이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요, ‘하나님을 만족하는 의’이며, ‘그 의가 사람에게 작동할 때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도록 변화시키는 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1~22) 이 의는 ‘율법준수 이외에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를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죄씻음(=용서) 받았다’는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을 때, 그분의 피로 죄 씻음 받고 의롭다 불러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또 한가지 어떻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해석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오직 믿음’으로 라는 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롭다 불러 주시고,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준수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영생의 구원을 누리며, 복음의 은혜를 자랑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에 계속해서 <로마서>전체의 주제말씀이라 일컬어지는 1장 16~17절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v.16)는 말씀 가운데서 사도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는지에 대한 의미와 이유에 대해 우리는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주는 <17절>을 중심으로 ‘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함께 살펴봄으로 진정한 복음의 진리에 대한 더 깊은 깨닫음과 은혜를 누리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저는 먼저 사도가 ‘로마서의 주제’가 되는 <16~17절>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라” (v.16)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지난시간 살펴보았듯이 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한다고 선언했는데, 이렇게 ‘복음을 자랑한다’는 뜻은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는 뜻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를 자랑한다’는 뜻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사도가 왜 복음을 그토록 자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16절>에 나와 있듯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은 실로 위대한 복음의 선언입니다. 이처럼 <16절>에서 ‘복음이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밝히는 것이 복음에 대한 <총론적 정의>라면, 그러면 어째서 복음이 모든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지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각론적 정의>가 <17절>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v.17)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그 이유는 <복음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으로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함’으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성도 여러분과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기에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것일까요?” 또한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일까요?” 이 점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v.17a)라고 선언했을 때, 여기서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로마서 전체를 올바로 이해하는 ‘핵심단어’가 됨을 많은 성경학자들은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깨닫느냐 하는 것이 이 주제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요, 그 이유는 <16~17절>이 로마서 전체 주제말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뜻하는 것을 살펴보겠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특성)으로서의 ‘하나님의 의’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하나님의 의’라고 했을 때, 이것은 <언제나 옳고 공의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완전하고 불변하는 기준이시며, 그분의 모든 행하심과 말씀은 공의롭고, 죄를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17>에서 사도가 선언하는 <하나님의 의>, 곧 ‘복음에서 나타나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의>’는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성도 여러분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마르틴 루터>가 이 <로마서 1장17절>말씀을 통해 경험한 예화일 것입니다. 그는 ‘천주교사제’시절 <로마서>를 강론하고자 공부하던 중 ‘하나님의 의’에 대해 오해함으로 도리어 <17절>로 인해 스스로 큰 영혼의 고뇌를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그 때를 회고했습니다. “나는 열심히 <로마서 1:17>에 나오는 바울의 말을 이해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 때문에 오랫동안 탐구하였지만, 결국 너무나 근심한 나머지 녹초가 되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내가 그 선언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복음을 알리지 않았으면 차라리 더 좋을 뻔하였다고 생각했다”라고 루터는 그때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이런 루터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고통스럽고 괴로운 반응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그가 ‘복음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공의 ‘정의’ ‘죄를 미워하는 의’, 쉽게 말해 ‘엄격하게 자기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의’라고 잘못 이해했기에, 이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루터에게 있어서 복음은 결코 기쁜 소식이 아니요, 도리어 하나님의 절대적 의로우심 앞에 다가설 수 없는 죄로 얼룩진 자신의 절망적인 모습만을 발견하고 괴로와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17절>의 ‘<하나님의 의>는 무엇일까요? 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의’가 될 것이요, ‘이 의가 사람 안에서 작동할 때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기쁘게 열납 받으시게 변화시키는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하나님의 의’는 복음 안에 역사하여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되기에 참으로 기쁘고 축복된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의는 우리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3장20절>에서 이와 같이 밝히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음이니라” (롬. 3:20)고 말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우리 인간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할 것 없이 모두 죄 아래 있고,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음’을 밝히고 난 다음, 이런 인간존재의 대전환을 가져오는 상태를 이어지는 <3장21~22절>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1~22)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는 ‘우리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로움인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더 이상 율법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의 그 절대적인 의로움을 충족시키려는 우리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율법준수 이외의 또 다른 한 의를 하나님은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가 우리에게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의’, 곧 ‘율법 이외에 (밖에서) 나타난 의’는 지금 처음 밝혀진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임을 사도는 강조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1장2절>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v.2)고 선언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지금 사도 바울을 통해 처음으로 ‘복음 외에 하나님의 의’를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 의가 바로 이어지는 <3~4절>에서 우리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나누었던 내용입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주인공인 그 메시아는 예언을 따라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고,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로 인정되신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기쁜 소식’이요, ‘복음의 핵심’인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복음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롭게 된다’ (To be justified)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죄로부터 씻음 받는다’, 그리고 ‘죄의 값이 치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더 이상 ‘우리는 죄인이라 불리지 않고, 의롭다 불리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의인’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성도가 ‘의롭게 되었다’ (being justify)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다는 뜻이요.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아 주셨다 (=지불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작용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는데, 오늘 본문 16절에서 선언하듯, ‘유대인이에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모두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의로움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어떻게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한다는 뜻인지? 에 대한 사도의 영적 해석(설명)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묵상하며 제가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성품은 크게 죄를 미워하고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는 <공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이라는 속성’을 가지셨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오늘 살펴보듯이 ‘복음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이 두가지 하나님의 성품, 곧 ‘공의’와 ‘사랑’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통일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죄를 못본 척 넘어가거나, 죄를 방치하는 하나님이 아니시요, 그분의 의로운 율법을 통해 철저히 죄를 드러내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이 율법만으로는 우리 인간을 살릴 수 없음을 아시기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살릴 것을 태초부터 계획하신 긍휼과 사랑이 무궁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 그의 아들을 나무에 달리게 하심을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애 대한 진노와 저주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들을 믿는 우리를 ‘죄 없다’고,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그 엄청난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는 ‘복음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그분 자신의 <의로우심>과 <용서의 사랑>을 동시에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의’가 가장 최고조로 드러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일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와 심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내어 주셔서 우리를 살리신 그 크신 사랑의 크라이막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이것이 ‘왜 사도가 십자가를 자랑했는지?’ 아니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했는지?’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남겨놓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인가?”하는 것입니다. 사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요, ‘믿는 자를 의롭게 하는 믿음’에 대한 오늘 본문의 본질적인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성도 여러분도 충분히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만 그 정의만을 나누고 이 후에 <로마서 4장>에서 ‘무엇이 믿음인지?’를 사도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서 설명할 때 더 깊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기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나니” (v.17a)라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면,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구약에서 신약까지’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불완전한 믿음으로부터 완전한 믿음에까지 이르는 신앙적 성장’을 의미한다고 신학자 칼빈은 해석하기도 하는데,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말해 ‘오직 믿음으로’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17절후반>에 선언한 말씀인 것입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v.17b) 이 말씀은 사도가 “기록된 바”라고 언급했듯이, 자신이 한말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한 말입니다. <하박국서2장4절>에서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고 선언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민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속히 닥쳐올 비극적인 미래를 하박국 선지자는 예언하면서, 그러나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은 암담하고 어려움과 고난이 넘쳐난다고 할찌라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중세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르틴 루터는 천주교 사제로써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고자 갖은 노력을 다해 고행을 행하고 신앙 양심을 따라 살아가고자 했지만, 결코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그는 절감했던 것입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어느 날 그가 성베드로 성당의 28개 대리석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며 피가 나도록 고행을 통해 죄 용서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순간 그의 마음에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이 마음에 떠오르며,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죄사함 받고 진정한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고행이나 선행이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 (Sola Fide)로 가능함을 그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깨닫음을 통해 루터는 ‘인간의 공로와 행위’에 기반을 둔 천주교 교리에서 벗어나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라는 깃발을 내걸고 종교개혁을 앞장섰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를 누리셨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으신다면, 그것은 그 어떤 여러분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가능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의롭다 함을 얻고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소유한 자는 반드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그리스도의 날까지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나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