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 (The Wrath of God)
“하나님의 진노”
(The Wrath of God)
3-1-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18~19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For the wrath of God is revealed from heaven against all the ungodliness and unrighteousness of men, who hold the truth in unrighteousness;)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Because that which may be known of God is manifest in them; for God has shown it unto them.)
[설교 요약]
우리는 이제 <로마서>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습니다. 지난시간 우리는 ‘로마서’의 주제말씀인<16~17절>말씀을 통해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사도는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복음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놀랍게 선언하고 나서, 이제 본격적으로 ‘복음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지?’를 그는 오늘 본문을 통해 시작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진노하십니까?’ 그 이유를 바울은 우리 인간의 ‘경건치 않음’ (=불경건)과 ‘불의’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 ‘불경건’ (ungodliness)는 ‘하나님 없는 마음 상태’요
- ‘불의’ (unrighteousness)는 ‘하나님이 없는 마음상태가 낳는 모든 죄악된 행위’ 곧 ‘불경건의 결과들’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1장>을 마무리하며 ‘불의’의 리스트를 이렇게 자세히 나열합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근수근하는 자요 ~” (롬.1:29~31)라고. 그리고 <1장>의 마지막 <32절>에서 ‘이런 모든 일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죄를 이처럼 심각하게 다루실까요?’ 그 이유는 우리는 ‘큰 죄 작은 죄’로 구별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죄는 동일하게 <우리를 죽이는 것> 곧 <영적 암세포>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으로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해 머지 않아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경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들)” (엡. 2:1)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출발함을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것은 <구약말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인데, ‘죄악에 물든 이스라엘’에 대해 진노하심으로 심판하시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시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믿는 자를 살리는 복음은 단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만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겸손과 자복하는 심령으로 그분의 의로우심을 따라 순종의 ‘거룩한 산 제사’를 올려 드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이제 <로마서>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사도가 로마서를 시작하며 간결하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정의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복음의 주인공’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이 복음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주간에는 점 더 구체적으로 로마서의 주제가 되는 <1장 16~17절>말씀을 통해 ‘사도가 복음을 그토록 자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는 것과 ‘왜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17절>을 마무리하며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v.17b)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영생의 축복을 통해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고행이나 선행이나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은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이렇게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놀라운 믿음을 선포하고 나서, 곧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본문 <18~19절>에서 갑자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밝힙니다. 왜일까요? 저는 오늘 ‘하나님의 진노’라는 <설교제목>을 통해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재앙이나,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리어 다시 살리는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복음의 출발점이 되는지?”를 깨닫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고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기를 힘써 추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 인간 대부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용서’, ‘은혜와 긍휼’이라는 말은 대단히 기뻐하고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그분의 ‘심판’이라는 말씀은 결코 달가워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이 ‘로마서’를 주의 깊게 읽어 나간다면, 사도 바울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이제 본격적으로 전개해 가면서, 복음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에서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은 ‘그분의 사랑’이나 ‘용서’ ‘긍휼’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우리의 공포의 대상’이라든가 혹은 ‘우리를 망하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고, 깊고 넓은 구원의 복음을 성취해 나가는 그 시작점’이 됨을 이해하는 것이 복된 ‘로마서 말씀’을 바로 깨닫아가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우리가 구약성경의 말씀을 읽어 나가게 된다면, 여러분은 정확히 모든 구약말씀에서도 ‘로마서’에서와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범죄하고 우상 숭배함으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그의 여러 종들을 보내어 그 죄에서 뉘우치고 돌아올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죄를 회개치 않고, 악에서 돌아서지 않음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우신 진노하심으로 그 백성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고 감사한 사실은 이것이 ‘구약성경’의 결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깊이 빠진 그의 백성을 징계하심으로 그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지만, 그 징계의 심판이 끝이 아니라 반드시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심으로 택한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결같이 ‘구약성경’에서 확인하게 되는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하시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시작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18~19절>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v.18)라고 사도는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이유를 영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 대해 진노하시는 이유를 바울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경건치 않음’ (=불경건)과 둘째는 ‘불의’입니다.
먼저, <경건치 않음> (불경건)은 ‘영어’로는 <ungodliness>로서 직역하면 ‘하나님이 없음’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고,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의’는 ‘영어’로 <unrighteousness>로써 ‘의롭지 못함’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위반하는 모든 부정하고 죄악된 행위>가 불의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쉽게 말하면, ‘경건치 않음’이 ‘하나님을 거부한 삶의 방식’이라면, 그와 같이 ‘하나님을 거부한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모든 삶의 결과 (=열매)’가 바로 ‘불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불의’의 적나라한 모습을 사도는 <1장>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자세히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근 수근하는 자요 ~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1:29~31)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렇게 <1장>을 마무리합니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롬.1:32)라고 말입니다.
사도는 지금 인간의 모든 불의한 행동, 곧 ‘인간의 모든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죄의 다양한 모습을 잘 지적했듯이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악독이 가득한 자, 무정하거나 무자비한 자, 혹은 수근 수근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사도가 이렇게 열거한 모든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언한 것에 대해, ‘이 모든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가?’ 하고 본능적으로 의야해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죄가 얼마나 무겁냐 가볍냐, 혹은 얼마나 흉악하냐 아나냐로 형벌정도를 판단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이나 간음, 혹은 남을 무자비하게 해친 자는 심각한 죄를 범했고, 그냥 마음 속으로 욕심부리거나 남을 미워하고, 혹은 수근 수근거린 것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그것은 죄조차 아니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챤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런 허물과 실수를 저지를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미워하고, 수근 수근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도 그 말에 동의하신다면, 제가 한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다 하면 죄가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시간 성도 여러분과 함께 진실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왜 사도는 우리 인간의 모든 불의한 행동, 비록 그것이 사소하고 별 것 아니라고 할찌라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언하는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도 자신이 무결점한 존재라고 스스로가 확신했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분명 그 자신도 이런 죄를 범할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그는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선언하는 ‘사형에 해당하는 모든 죄’의 기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우리 인간의 양심의 기준도 아니요, 세상나라의 형법, 상법, 민법의 기준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죄를 예외 없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고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 대해 조금의 실수와 허점도 용납하지 않는 심히 까다롭고 엄중하며, 무자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 죄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시간이 있겠지만, 오늘은 큰 그림에서 ‘왜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토록 심각한 것인지?’를 함께 이해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비유하자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날, 성도 여러분이 잠을 자고자 하는데 잠이 잘 오지 않고, 머리에 두통이 사라지지 않고,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옴을 느꼈다고 합시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닥터와 상담하고 뇌 관련한 사진을 찍었더니, 뇌에서 작은 종양정도의 암세포가 자라고 있음을 검사결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암세포는 이제 막 시작단계이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은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라고 여러분을 안심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사의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암세포가 계속 자라도록 방치해 두어도 괜찮다는 뜻일까요?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닥터의 말은 ‘이 작은 암세포가 발견되었다고 당신이 당장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무서워하거나 낙심치는 말고, 당연히 조속히 암세포를 제거하는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아야 합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런 의미가 의사선생의 말속에 있음을 상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중요한 사실은, 만약 뇌에서 생긴 이 작은 암세포를 하루 빨리 제거하지 않고, 방치했을 때 조만간 손쓸 수 없는 치료 불가능한 절망적인 상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눈에는 그것이 큰 죄, 작은 죄로 나눌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모든 죄는 동일한 <영적 암세포>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을 반드시 죽이는 암세포인 것입니다. 아니,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영적 암세포인 죄’가 우리 인간을 죽여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우리 모든 인간은 ‘이미 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2:1)라고 말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라고 사도 바울은 선언함으로써, 죄를 범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죄의 문제가 왜 이토록 하나님께 심각한 것인지?”를 이해하고자 했을 때, 만약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때는 어떨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좀더 이해가 쉬운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하나님과 복되게 살아가는 천국에서 ‘죄가 존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천국에서 죄가 발생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만, 만약 누군가 죄를 범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시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답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방치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에서 주와 함께 의롭게 된 우리 인간이 죄 지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음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했다면, 이처럼 우리 인간을 영적 죽음으로 가두어 두는 죄를 미워하고, 진노하시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동일하신 의로우신 성품’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이미 타락함으로 죄가 심히 관영한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매우 엄격해 보이기도 하고,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심에서 비롯된 <그분의 진노하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부부를 처음 창조하실 때, 우리를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만드셨기에 (창.1:26) 우리 인간의 타락이후에도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온전한 회복을 염두에 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이후 구원받은 그의 자녀들을 다시는 사망도 눈물도 고통도 없는 그의 나라에서 영광스럼게 살아가도록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빛된 천국시민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시키시기에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는 반드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왜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지?’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는데, 이제 제가 남은 시간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그릇된 대표적인 유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로이드 존스’목사의 본문에 대한 주석을 중심으로 함께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불신자들>의 경우”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이들은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언제나 온유하고 자비하고 화낼 수 없는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진노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처럼, 그리고 서양사회로 본다면,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철회초리로 자녀를 다스리고 억압하던 완고한 아버지의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신자들은 ‘진노하는 하나님’을 한마디로 희화화하여 우스운 존재로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맥아더’목사는 하나님의 성품은 그분의 ‘사랑’과 함께 ‘진노하심’을 통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설파했는데, 불신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완벽한 균형잡힌 성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맥아더목사는 ‘사랑’과 함께 ‘죄에 대해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인간의 분노와 화냄에 끼워 맞추려 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심리학’적인 잣대로써 “모든 종교는 두려움을 기초로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면, 모든 종교에서 이 두려움의 개념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용하는 원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래전 원시인들은 나무를 두려워하였고, 별과 달을 무서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자연에 있는 여러가지 두려움의 존재를 신격화하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각종 종교들에 있는 신들이 언제든지 갑자기 들이닥쳐 자기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자극하여 신을 믿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도 이와 같은 여러 타종교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을 자극하여 종교심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입니다.
한편 두번째로는 “<기독교 신학자>의 경우”입니다. 이들은 어쩌면 일반 불신자들보다도 더욱 포악하게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반대하고 공격합니다. 이들은 흔히 ‘자유주의신학자’라고 불리어지는데, 이들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 전체를 부정합니다. 그 이유로써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구약성경에서 보게 되는 여러 이방민족의 신들처럼, 구약 성경에서 비롯된 해묵은 종족의 신들의 유물이나 잔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들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하나님’ 혹은 ‘성난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폄하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는 ‘구약의 부족개념의 하나님’이지만, 신약에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그들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교훈과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자들은 신구약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노>을 과거 유대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하지 않고 아직 작은 부족단위의 종교로 있을 때의 진화하지 않은 ‘원시적 개념’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노>는 이제 폐기처분해야 마땅한 시대착오적이고, 현시대와 전혀 맞지 않은 빛 바랜 종교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그러므로 우리가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히.12:28~29)라는 말씀과, ‘야고보 사도’가 권면하기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약.5:9)고 도전했고, ‘베드로’도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선생을 경고하면서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2:1)고 강하게 책망합니다. 이 모든 신약성경의 말씀에도 우리는 구약성경에서와 동일하게 ‘세상의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 안에서 “<복음주의적 크리스챤>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와 여러 곳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를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형식상은 이점을 받아들이지만, 실제로는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좋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믿습니다. 그러나 조심하도록 하십시요. 특별히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맨먼저 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맨먼저 말하면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그것을 들으면 멀리 달아날 겁니다”라는 식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르는 크리스챤 중에는 복음전도에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오늘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을 펼치는 것과는 정반대로 방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뭔가 불편해하고 거부감이 강할 것이니 바울이 했던 방식을 피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급적 피하고 나중에 말하자는 것입니다. ‘백년 전이면 그것이 통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21세기인데, 그렇게 하면 전혀 안통해요.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라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느냐고 물어보기 이전에, 내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른 깨닫음과 인식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 자신은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의 비극은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복음전도에 있어서는 바울처럼 성령의 권능을 의지하여 올바른 복음을 선포하기보다 인간적인 설득력과 상황분석에 전전긍긍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사려 깊은 크리스챤이요, 언제나 복음전하는 대상의 문화와 사상과 형편을 고려함으로 그들의 눈높이에서 전했습니다 (고전. 9장).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좋아할까? 내 메시지를 받아들일까?’를 저울질하기 이전에 언제나 성령의 권능에 모두 맡기고 참된 복음을 희석하지 않고 전했던 것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친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경고하시고, 역사하실 것을 신뢰함으로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의 복음’이 되는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를 살리며 구원하는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시작됨을 이해하십니까? 이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를 살리는 것임을 신뢰하십니까? 바라기는 복음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능력으로 인하여 주와 함께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더 나아가 성령의 신실한 도우심으로 우리의 복음에 대한 더 깊은 깨닫음과 확신 가운데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더욱 감사와 순종으로 나아가며, 성령과 함께 우리 육신과 세상과 악한 영과 싸워 승리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