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4, 2025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God Is With You)

Preacher:
Series:
Passage: 스가랴 (Zechariah) 8:23
Service Type: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God Is With You)

8-24-25

본문말씀: 스가랴 (Zechariah) 8:23

23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This is what the Lord Almighty says: “In those days ten people from all languages and nations will take firm hold of one Jew by the hem of his robe and say, ‘Let us go with you, because we have heard that God is with you.’”)

 

[설교 요약]

          이제 대부분의 대학캠퍼스가 가을학기를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가을학기를 맞아 하나님의 동행하심으로 인하여 풍성한 열매 맺는 이번학기 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약 “당신의 삶은 만족스러운가요?”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고 싶은가요? 그 다양한 대답 중에 ‘나는 만족하고 기뻐합니다!’라고 사람들 중에 ‘좋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복음’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복음일까요?’

  • ‘복음’ (福音)은 헬라어 원어로 ‘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으로써, ‘기쁜 소식/ 좋은 소식’ (‘Good News’)입니다.

‘좋은 믿음의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를 진정으로 ‘기쁜 소식’으로 신뢰하기에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나사렛 예수’가 오실 메시야 이심이 확증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메시야로써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롬. 1:2-4).

따라서 ‘복음’이 기쁘 소식인 이유는 그 진리의 소식을 듣는 모든 자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피로써 죄 용서하심으로 자신의 아들과 딸이 되는 특권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을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구체적인 변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구원을 받습니다’ (To be saved):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6)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는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성화 되어갑니다’ (To keep sanctifying):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스가랴 8장>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누리게 될 ‘기쁨과 즐거움’을 약속하십니다 (슥. 8:19). 구원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기쁨 가운데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삶의 핵심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삶 속에서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줌으로 이웃들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방백성 열명이 ~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v.23)고 말입니다.

새 가을학기는 캠퍼스의 친구와 이웃들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우리 공동체로 몰려오는 이런 축복된 복음의 열매들이 맺히기를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대학캠퍼스가 가을학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포슬 교회 멤버 대부분이 청년들인데, 이번 새로운 가을학기를 맞아 우리 각자하는 공부와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그 말씀의 이끄심으로 풍성한 열매 맺는 이번학기 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성도 여러분에게 ‘왜 이곳 미국에서 살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의 대답은 다양할 것입니다. 어떤 부는 ‘부모님이 일찍 미국에 이민 오셔서 태어났거나, 어려서 부모님과 함께 이곳에 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한국에서 어린시절에 일찍 조기유학을 위해 왔던지, 혹은 청년시기에 대학 혹은 대학원 공부를 위해 유학공부를 위해 이곳에 왔다고 대답할 지체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제각기 다양한 이유로 오늘 이곳 아틀란타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내가 왜 미국에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보다도 더욱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삶은 만족스러운가요?”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싶으신가요? ‘매우 만족스러운가요?’ 아니면 ‘만족스럽다가도, 때론 불만스럽고 불안하기도 하는 삶의 등락이 반복되는 삶을 사는가요?’ 그것도 아니면 ‘삶이 늘상 불만스럽고 힘들기만 한가요?’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며 성도 여러분에게 ‘각자의 삶에 대한 만족함 (=만족도)’을 질문하는 이유는 이런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진솔한 평가가 우리 각자의 믿음 (신앙)을 객관화하고 정직하게 바라보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먼저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늘상 기쁘고 만족스럽다’고 평가하는 경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저는 충분히 예상되고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 모든 인간은 늘 갈등과 불만의 끝임 없는 유혹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갈등하고, 스트레스 받고 절망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만약 여러분이 ‘늘 만족스럽고 기쁨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제가 이해하기에 이런 경우에는 크게 두가지 케이스가 있는데, 첫째는 좀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이 ‘자기도취형’의 ‘꿈꾸는 듯한 몽상가의 비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마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관계없이 자신은 오롯이 자기 안에 깊이 무쳐서 늘상 자신에게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일종의 ‘왕자병’이나 ‘공주병’과 유사한 정신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했을 때 맞이하게 될 실체에 대한 정신적 충격과 아픔을 두려워함으로써, 사실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상태에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즐거움과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두번째 유형은 ‘실제로 그런 만족과 기쁨의 충분한 실제적 이유와 근거를 발견한 케이스’입니다. 저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좋은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제가 이런 두번재 유형의 사람들을 ‘좋은 믿음 (참된 신앙)의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의 만족과 기쁨’은 앞서 말씀드린 비현실적이고, 주관적인 만족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깨닫음에서 오는 만족과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좋은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언제나 만족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도 때로 스트레스를 받고 힘겨워하고 좌절하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분명한 특징은 한가지 사실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 (福音)때문입니다. ‘복음’은 헬라어 원어로 ‘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으로써 그 뜻이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고, 영어로는 ‘Good News’ (Gospel)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한가지 사실은 이 ‘신실한 믿을 가진 신앙의 사람들’은 ‘복음’을 그 단어의 의미 그대로 ‘기쁜 소식’으로 믿고 그 믿음을 따라 살아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우리 성도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복음이 과연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믿고 신뢰함으로써 ‘여러분의 삶이 실제로 기쁨 가운데 변화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이요, 그리고 그 ‘복음의 진리를 듣고 믿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어떤 변화가 벌어지는 것일까요? 먼저 이 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복음서 중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로마서>를 쓰며 이렇게 ‘복음의 핵심’을 밝혔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6)라고. 여기서 <하나님의 복음>은 놀랍게도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이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무시하거나 무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히 기뻐하고 자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사도는 이 복음의 중심적인 내용을 흥미롭게도 ‘로마서’편지를 시작함과 동시에 곧바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2~4)고 말입니다. 이것을 요약하자면, 첫째로 ‘복음의 주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요, 둘째로 ‘복음의 핵심적 내용’은 <복음의 주인공 되신 나사렛 예수님은 오랜 구약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오실 메시야’로 인정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럼으로 이 복음은 실로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 여러분 중에 제가 지금 함께 나눈 로마서에 기록된 이 복음의 중심 내용을 오늘 처음으로 들은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한 두번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오실 메시야가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신다”는 복음의 중심 메시지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아니 여기 예배에 참석하신 분 중에는 열번, 백번도 넘게 들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 복음이 ‘과연 성도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인가?’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 복음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자랑스럽고, 내가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루더라도 죽음의 위협이 온다고 할지라도 소중하게 간직할 진리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제 두번째로 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의 우리가 누릴 실제적 변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방금 살펴본 대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밝힌 것처럼 복음이 가져오는 핵심적인 변화요 축복인 ‘구원’ (salvation)인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 복음의 진리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축복의 삶’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믿는 자가 경험하게 될 궁극적이요, 본질적인 변화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음’ 곧 <하나님의 독생자요, 우리를 구원하시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이 시간 오늘 예배 참석하신 분들 가운데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의 충성된 종,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우리를 간절히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사. 55:6-7)라고 말입니다. 바라기는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겸손히 나아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문을 열고 인격적으로 영접함으로 영생의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시길 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 변화가 전부일까요? 전부가 아닙니다. 어떻게 본다면 ‘구원’은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통해 비교할 수 없는 축복된 변화를 누리게 되는 그 첫번째 출발점>이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슨 변화가 더 있을까요? 그것을 한 단어로 말하라면 ‘성화’ (sanctification)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성도는 오직 한번 ‘구원을 받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표현한다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간’(=칭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두번 다시 구원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살아가는 평생동안,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계속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요, ‘영적 성숙’이라고 불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평생을 통해 우리의 푯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날마다 성화(영적 성숙/성장)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당신의 삶은 만족스럽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함을 받았다면, 여러분의 삶은 만족스럽고 행복하십니까? 기쁨과 감사가 날이 갈수록 더욱 넘쳐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왜 그럴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솔직히 이 질문은 제가 우리 교회 청년들 같은 나이때에 수없이 제 자신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왜 나는 삶의 충만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만약 청년 여러분들이 저와 같은 고민을 한적이 있고, 또 현재도 하고 있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문제의 핵심은 ‘내가 구원받음으로 인하여 지금 현재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것이 얼마나 엄청난 영적 특권인 것일지? 깨닫지 못하고, 또한 이런 하나님의 자녀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미래의 영광이 무엇인지? 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스가랴서’ 본문말씀은 이런 자녀의 영적 특권과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잘 묘사해주는 말씀의 하나입니다. 먼저 스가랴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참혹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악한 길에서 떠나 성결한 신앙을 붙들고, 구체적으로 성전의 완공을 이루어서 장차 임할 메시야 왕국의 승리와 영광을 간직하도록 백성들에게 격려하고 도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이 포함된 <슥. 8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고 확고하신 약속의 말씀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장차 하나님의 산 ‘시온 산’과 그분의 성 ‘예루살렘 성’에 임할 충만한 임재와 은혜를 <8장>에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앞의 <19절>에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행해오던 금식 곧 ‘넷째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 이런 슬픔과 고통의 금식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 금식이 변하여 유다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슥. 8:19a)고 말입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참된 영적 금식을 통해 누리게 될 은혜인 것입니다. ‘더 이상 얼굴을 흉하게 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외식된 금식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사단에 매인 바 된 영혼들을 그 흉악한 결박에서 풀어주고 압제 받는 자를 자유케 하는 진정한 금식’ (사. 58:1-9)을 행함으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낙심이 변하여 희락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의 복된 삶이 <8장>의 ‘마지막절’인 오늘 본문에서 놀랍게 선포되는 것입니다.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예루살렘 성으로 몰려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v.20). 그 뿐만 아니라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될 것임을 하나님은 예언하십니다 (v.22). 왠줄 아십니까?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v. 23)라고. 이방민족이요,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10명의 불신자들이1명의 유다 백성에게 몰려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골자는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먼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심과 또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심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성도들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기쁨과 만족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예수 믿으세요! 너무 좋습니다!’라고 아무리 외쳐본다고 해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고 말에 힘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결코 녹녹하지 않지만, 성령의 충만하신 도우심으로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낙심케 하는 세상의 헛된 것들과 고난 가운데서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복되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세상사람들은 비로소 여러분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저들의 삶은 왜 저렇게 기쁨과 감사와 만족으로 살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할 것이고, 여러분이 믿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대해 더 알고자 오늘 본문의 예언과 같이 여러분에게로 몰려올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가운데 가장 온유한 대표적인 믿음의 조상인 ‘이삭’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영토에서 강력하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풍성한 열매의 삶을 살수 있었는지가 창세기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6장>에게 이삭은 가나안 땅에 심한 흉년으로 인하여 이웃나라 그랄에 가서 거주하였는데, 그곳에서 이삭은 백배의 풍작을 이루었고, 수많은 양과 소떼를 이루었는데 이것을 시기한 그릴 목자들이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때 판 우물물을 흙으로 메웠고, 이것을 몇번씩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때마다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또 다른 골짜기로 옮겨 우물을 팠고 그곳에서도 크게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블레셋의 아비멜렉왕과 군대장관 비골이 마침내 이삭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며 그와 계약을 맺기 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창. 26:28) 그들의 눈에도 이와 같은 이삭이 환경과 조건에 관계없이 풍성한 농사와 열매를 거두는 이유는 이삭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때문이었음을 분명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삭과 같은,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동행하심의 진정한 영적 특권과 권세와 은혜를 우리는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각자가 이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한다면 저는 단언컨데, 우리의 삶은 참으로 만족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때로 고난과 핍박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실족한다 할찌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또 다시 주와 함께 일어서서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운동경기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공격은 최고의 수비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원리가 우리 신앙에서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누리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의 삶’은 ‘최고의 전도’>인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공허한 전도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복음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전도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번 학기에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아포슬’ 신앙공동체 안에서 하나되어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캠퍼스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고 우리에게로 몰려오는, 그리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을 경배하는 이런 놀라운 복음의 능력과 생명의 열매가 맺혀지는 이런 축복된 한 학기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