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1, 202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Our Father In Heaven)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6:9
Service Type: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Our Father In Heaven)

5-11-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9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This, then, is how you should pray: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에 ‘경건생활’의 3대요소인 ‘구제’와 ‘기도’에 이어서 마지막 세번째 ‘금식’ (v.16-18)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시 기도의 뒷부분 곧 ‘주기도문’ (v.9-13)에 돌아와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2주전에 <마태복음 6장5-7절>에서 주님은 먼저 ‘기도에 대한 올바른 자세’에 대해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둘째 ‘기도의 장소’는 <골방>이며, 셋째 ‘기도의 시간’은 <항상>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오늘 본문 <9절>에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v.9)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 축복된 기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까요?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을 때” 입니다: 호세아가 죄악 가운데 고통받는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해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고 촉구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만큼 죄를 버리고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때” 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잠. 1:7)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공경’ (reverence)의 ‘경’ (敬)과 ‘놀람/감탄’ (awe)의 ‘외’ (畏)가 합쳐진 단어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거룩히 여기는 최선의 자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거룩을 좇아 행할 때” 가능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룩을 명령’하셨고 (레.11:45), 신약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를 향해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1:15)을 도전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이미 ‘거룩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히.10:10-14)에 이에 합당한 거룩을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거룩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더욱 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선한 뜻을 깨닫아 나감으로 주께서 약속하신 진정한 기도의 능력과 은혜를 풍성히 누려 나가게 될 것입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먼저 ‘경건생활’의 3대요소인 ‘구제’와 ‘기도’에 이어서 마지막 세번째 ‘금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금식은 오래된 종교의 더 이상 효력이 없이 사문화된 율법조항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낡고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오늘날도 자신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 겸손히 자복하며, 그분의 죄 용서하심과 새롭게 시작하는 영적 부흥의 은혜를 사모하는 신실한 성도들에게는 더욱 더 요청되는 경건생활의 핵심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기도’에 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시작되는 ‘주기도문’의 뜻에 대해 더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늘 ‘기도는 영적 호흡’이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핵심’이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과연 우리는 이 기도의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이해하며 누리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기 원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시간 가운데 특별히 주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의 깊고 놀라우신 영적 의미를 우리 모두 더욱 온전히 깨닫아 나감으로, 한걸음 더 주께서 허락하신 진정한 성도의 영적 특권과 축복을 이 기도를 통해 누려 나가는 개기가 되시를 기대합니다.

제가 2주전에 <마태복음 6장5-7절>말씀을 통해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기도의 자세>라는 설교제목으로 함께 말씀 나누었습니다. 주님은 ‘구제와 금식’과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을 경계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 (v.5)하지 말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v.6)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의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첫째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둘째 ‘기도의 장소’는 <골방>이며, 셋째 ‘기도의 시간’은 <항상>임을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9절>에서 시작하여 <13절>까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주기도문’을 주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설교제목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Our Father In Heaven)에서도 여러분이 느끼셨겠지만,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의 출발점이자, 이 기도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 (Father)를, 다시 말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먼저 바로 이해하는 것”이 결국 ‘기도의 근본적 자세와 기도의 모든 내용’을 결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기도’ (prayer)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부탁드리는/아뢰는’ 일이다” (offering up of our desires unto God) 라고 정의합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인데, 그분의 뜻에 맞는 것을 구하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자비하심을 깨닫아 감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원하는 마음의 소원을 담아 드리는 기도의 대상’이 단지 ‘나무나 돌로 만든 말못하는 우상 신’이나, ‘그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막연한 그런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처럼 그 선하심과 온전하심으로 자신을 말씀 가운데 드러내 보이시고, 믿음을 통해 기도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친히 ‘아버지’라 부르라고 말씀하시는 분과는 기도의 태도와 내용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시작할 것을 가르쳐 주신 그 의미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주님은 기도를 본격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v.9)라고. 그렇다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심 가지며,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한 경배와 영광을 돌립니까? 저는 주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기도의 출발은 이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그 거룩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임을 강조하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저는 이점에 대해서 성도 여러분과 좀더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드릴 때 그분께서 거룩히 여김 받으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까요?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을 때” 가능합니다: 앞서 어느정도 살펴보았지만, 기도의 자세와 내용을 결정하는 중심에는 기도하는 <대상>이 누군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 크리스챤의 기도의 대상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선언하십니다. 물론 우리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이해해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단언하지만, 우리 성도의 믿음과 영적 성숙은 결국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만큼 가능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좋은 소식’은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세상 신과 같이 자신을 숨기거나 감추지 않고, 스스로를 계시하셔서 우리가 그분을 만나고자 할 때 기쁨으로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선지자의 도전과 같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6) 한편,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 29:13)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과 존귀하심을 깨닫게 되고, 깨닫은 만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고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점을 가장 분명하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하나가 <호세아서 6장>의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호세아’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 순결을 버리고 이방신들에게 ‘우상숭배’ 곧 ‘영적 간음’을 행함으로 심한 고난과 징계의 아픔을 겪던 ‘북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라고. 비록 하나님께서 엄중한 징계의 매로 치셨으나, 이것은 결코 망하게 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을 다시 살리고자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의사가 칼을 들고 암환자의 환부를 도려냄은 그를 죽이고자 함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으로 살리고자 함과 같은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 6:3)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그분의 성품과 능력은 과연 어떠한지를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하고, 깨닫은 만큼 우리는 그분을 믿을 수 있고, 그분께 합당한 영광과 존귀를 올려 드리고, ‘간음한 아내가 뉘우침으로 충실한 남편에게 돌아가듯’ 그리고 ‘방황하던 탕자가 사랑 많은 아버지께 되돌아가듯’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아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깨닫고 이해해 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때” 가능합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표현했을 때, 그분을 믿는 것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잠언서 1장>의 말씀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인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instruction) (잠. 1:7)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영어성경>에는 ‘fear’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한글성경>은 ‘경외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히브리 원어는 “야레/yare(ירא)”는 ‘경외하다, 경의를 표하다’ (fear/reverence)라는 뜻으로써 구약에서 305절에서 314회 사용되었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 그리고 구원과 심판과 같은 그분의 주권에 대한 우리 성도의 ‘감탄과 숭배의 반응>을 의미하며, 이 경우에는 ‘경외’라는 한글번역이 영어의 ‘fear’라는 표현보다도 원어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경외’라는 단어는 ‘공경’ (reverence)는 뜻의 ‘경’ (敬)과 ‘놀람/감탄’ (awe)라는 뜻의 ‘외’ (畏)가 합쳐진 단어로써, 단순히 ‘fear’ (두려움)이라는 영어식 표현보다는 훨씬 원어에 가까운 뜻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얼마나 선하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복된 자녀의 삶을 허락하셨는지를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통해 깨닫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공경 (=경배)하고, 그 위대하심과 한없는 사랑에 감탄 (=놀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다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가르침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볼 때, 우리가 그 어떤 기도라 할찌라도 그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가 기도하는 그 대상은 이처럼 ‘그분을 알면 알수록 심히 놀라고 기쁨으로 경배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를 드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늘 ‘아버지여’라고 부르시며 하나님께 나아가셨듯이, 우리도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리고 영혼 없이 입술로만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진실로 마음 깊은 곳에서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경배를 담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거룩을 좇아 행할 때” 가능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보면, ‘거룩’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코데쉬’ (Kodesh)로서 ‘잘라냄, 분리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의 <레위기서 11장>에서 보면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레. 11:44-45)라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거룩을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추측 (이해)할 수 있는 ‘거룩’은 ‘하나님과 같은 조금의 죄도 함께 할 수 없는 절대적 거룩과 존귀’가 아니라 ‘주위의 속되고 더러운 것으로부터, 불결한 생각과 죄악된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곧 ‘우리 인간의 거룩’의 출발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진 여러 성도들을 향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5)라고 선포합니다.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을 부르신 거룩한 자’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되라고 도전합니다. 이제 저는 좀더 솔직히 여러분에게 묻어보겠습니다. 정말 ‘거룩’이라는 것이 아무나 마음먹고 노력한다면 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무나 원한다고 결코 하나님의 거룩을 좇아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거룩을 행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직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금식’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히브리서 9-10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예언의 성취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과 같이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지고 성소 앞으로 나아가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친히 속죄의 희생제물 곧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를 통해 완성하신 대속의 희생인 것입니다. 더 이상 희생제물은 필요치 않고,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로 모든 구약의 희생제사는 이제 끝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림을 통해 우리 성도가 누리게 되는 또 한가지 빠질 수 없는 영적 특권이 <성도의 거룩>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0장>에서 기자는 이렇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 10:10,14)라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씻어질 뿐만 아니라, 그 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노력과 행위 이전에 예수님의 피로 우리는 ‘거룩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성도’ (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주께서 불러 주시는 은혜와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고, 더욱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성령을 통해 증거함’ 받게 되는 영광과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오늘 성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깨끗하고 의롭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분의 거룩과 영광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풍성한 지식에서 자라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의 기도는 단지 내 소원성취만을 바라는 유아스런 기도가 될 것이고,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영혼 없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지막 기도는 언제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 되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경배를 마지막으로 올려 드린적이 언제였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곧장 (숨도 쉬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풀어놓고 하나님께 하소연만 하고, 그분의 응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기도를 끝내지는 않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우리의 살아 있는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에서부터 시작됨을 말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 나감으로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선하신 아버지를 더욱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찬미함으로 날마다 허락하신 거룩을 연습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정한 기도의 은혜를 풍성히 누려 나가는 그분의 아들 딸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