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고한 사람” (Wretched Man)
“곤고한 사람”
(Wretched Man)
10-11-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7:22~24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For in my inner being I delight in God’s law;)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but I see another law at work in me, waging war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making me a prisoner of the law of sin at work within me.)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What a wretched man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that is subject to death?)
[설교 요약]
이제 이번주로 <로마서7장>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신령한 줄 알뿐 아니라, 그의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모순된 나’라고 사도가 묘사하는 ‘7장’의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저는 먼저 로마서 전체의 주제말씀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는 말씀인데, 사도는 4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할례(율법)를 행하기 전’이라고 밝힘으로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정리합니다 (롬.4:10~15).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선언하듯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갈. 2:16)는 것이요, ‘로마서 7장’의 결론인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함으로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롬. 7:4).
이제 저는 7장에서 묘사된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바울의 경험적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 사도 바울의 인생에서 극적인 전환점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순간입니다
- 그런데 주님은 청년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 9:4)고 말씀하시고,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 20:14)고 그에게 도전하십니다
- 이런 주님의 말씀은 그가 주님을 다메섹 언덕에서 만나기 전에, <비록 그가 자신의 모순으로 갈등했을찌라도,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의 진리의 빛을 깨닫고, 그의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영적 각성’의 기간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7장에서 사도가 묘사하는 ‘나’는 청년사울이 ‘율법의 진리를 깨닫은 이후에 주님을 다메섹에서 만나고,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성령충만을 받아 주님을 영접함으로 중생하기 전까지’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7장에서 묘사하는 ‘나’를 누구라고 이해하느냐 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7장을 통해 사도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7:4)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7장의 결론은 ‘이제는 율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위해 풍성한 열매맺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저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 말씀으로 <로마서7장>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신령한 줄 알뿐 아니라, 그의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모순된 ‘나’라고 사도가 묘사하는 ‘7장’의 ‘나’는 도데체 누구일까요? 우리는 대략적으로 그 결론부분을 지난시간 나누었습니다. 오늘 함께 <7장>의 말씀을 정리해가며,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밝히는 ‘나’는 누구인지, 그를 통해 우리 성도의 ‘율법과 죄’와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함께 더 분명히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자난 시간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로마서7장>에서 사도가 묘사하는 <나>는 누구를 의미하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대표적 견해는 먼저, ‘성 어거스틴’에 의해 주장된 것인데, 7장의 ‘나’는 <중생한 그리스도인, 그것도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의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존 웨슬러’와 ‘알미니안들’의 경우는 <중생하지 못한 자>라고 주장했고, 그리고 ‘제2축복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중생은 했지만, 아직 로마서8장의 성숙된 신앙으로 나가지 못한 자>가 7장에서 사도가 묘사하는 ‘나’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견해는 ‘로이드 존스’가 주장한 것인데, 로마서 7장의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빛을 깨닫았지만,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라는 것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마지막 견해를 지지함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로마서7장’은 로마서 말씀 가운데서도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고 난해한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입니다. 그 주된 이유는 사도가 ‘7장’에서 묘사하는 ‘나’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언제의 나’인지에 대해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도가 묘사한 7장의 나에 대한 진실은 사실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7장을 중심으로 앞뒤 전후의 문장을 사도의 영적 논리를 따라 살펴볼 때, 쉽지는 않을찌라도 좀더 가까이 사도가 뜻하는 복음의 진실을 이해해 나갈 수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이제 저는 <7장>의 주제인 ‘율법과 성도의 관계’에 대해 다시 돌아와서 우리 성도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잘 아는 것처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음’입니다. 바로 ‘로마서’ 전체의 주제말씀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정확한 본보기를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제시합니다.
이처럼 사도는 <로마서4장>에서 ‘어떻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롬. 4:3)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5장6절>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창세기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후손을 밤하늘의 뭇별과 같이 셀 수 없이 많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었다는 것이요, <이런 그의 믿음을 하나님은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사도는 여기서 우리가 ‘믿음과 율법’과의 관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개념을 한가지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것이 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유대인들이 대표적인 율법으로 온 힘을 다해 지키는 ‘할례’를 그가 행하기 전인가? 후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언제라고 기억합니까?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무할례시’ 곧 ‘할례 받기 전’인 것입니다. 그 점을 사도는 이렇게 분명히 밝힙니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0~11)라고.
여기서 저는 사도가 매우 중요한 ‘믿음과 율법’의 상관관계를 밝혔다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하심을 받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써’라는 영적 원리를 ‘할례를 행한 시점’이 언제냐를 점검함으로 밝혀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브라함은 이미 무할례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그 이후 하나님의 명령에 좇아 할례에 행함으로 그가 가진 믿음을 인쳤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을 확증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계속되는 <로마서 4장>말씀에서 한층 강도 놀게 율법에 의지하여, 율법의 행위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도전합니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4:14,15)라고. 사도는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는 이 말씀을 통해 <로마서 7장>에서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것처럼 ‘죄가 기회를 타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각양 탐심을 맺었다’ (7:8)는 말씀과 ‘~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 그러나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7:8,9)는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여기 4장에서 살짝 예고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에 대한 깨닫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사도가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과 율법의 관계’에 있어서 결론적으로 강조한 복음의 진리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핵심의 하나가 <갈라디아2장16절>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믿음과 율법의 관계’에 있어서 결론적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라고. 그렇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그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했다면, 제가 몇 주전에 ‘사도 바울’의 개인적 경험을 통한 <로마서7장>에서 ‘나’라고 묘사된 존재의 상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 본적이 있는데, 저는 이제 7장을 마무리하며 사도 바울이 경험한 율법을 통해 ‘나’라는 묘사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이런 저의 주장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추측의 영역인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 대부분 잘 기억하듯이 사도 바울의 참된 믿음의 변화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만나주시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로마서7장>의 묘사된 <나>를 염두에 두며, 이점을 좀더 깊이 묵상해 봅니다. 추측건대, 제가 확신하는 것은 청년 사울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그리스도를 갑작스럽게 만날 때까지 결코 예수님이나 그분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나중에 자기 스스로 고백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미워하고 박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열심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고 잘못된 열심으로 가득찬 종교인의 삶을 살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자기 앞에 갑자기 나타난 나사렛 예수, 바로 ‘유대 이단종교의 교주’로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었다고 믿었던 예수가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9:4)라고 하시고,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20:14)라고 그를 깨우쳤을 때, 그의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리고 청년 사울이 강렬한 광채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하고, 주님의 명하심을 따라 ‘직가’라는 시내로 가서 자기에게 행할 것을 이를 자를 기다리는 “사흘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행.9:9)고 ‘사도행전 9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울이 그 사흘동안 앞을 볼 수도 없었지만, 또한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야말로 식음을 전폐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왜 그가 이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이와 같은 심각한 금식을 한 이유일까요? 그것은 어떤 슬픔이나 좌절이나 절망적인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적극적으로 매우 겸손하고 진실하게 지금까지 자신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결단적 모습임과 동시에 자기 앞에 갑자기 나타나신 나사렛 예수님의 존재가 가져온 대지각변동과 같은 엄청난 진리의 대혼란을 깨닫게 해 주실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생명을 걸고 적극적으로 간구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원수처럼 여겼던 ‘나사렛 예수’가 진정 메시아가 맞는지를 깨닫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불과 하루 전 까지만 해도 원수처럼 미워하고, 반듯이 색출하여 잔멸해야만 할 유대 이단집단으로 확신하며 탄압과 핍박을 가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그들이 믿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그리스도요, 자신을 포함한 유대민족들이 그토록 간절히 기다려온 구원자’이심이 정말 사실인지를 ‘지금 당장 죽어도 좋으니 하나님 꼭 가르쳐 주소서!’라고 청년 사울은 사흘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죽을 힘을 다해 하나님께 매어 달렸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사울에게 가서 그를 안수하라 명하셨고, 그가 가서 안수했을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고, 그때 그는 일어나 침례를 받게 됩니다 (행. 9:10~19). 저는 사도행전에서 청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짐으로 그가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그의 육체적인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뜻도 되지만, 동시에 그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됨을 암시한다고 이해합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기 등등하여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핍박하고, 모두 색출하여 잔멸코자 했던 자신의 열심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것이요, 오직 자기 의를 세우고자 했던 어리석은 행위였던지를 그는 주의 제자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경험하게 될 때, 영적 비늘이 벗겨짐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청년 사울은 이제 자신이 미워하고 박해하던 나사렛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제가 또 한가지 사도 바울이 청년 시절에 철저한 율법준수를 통해 어떤 경험을 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저는 바로 <로마서7장>에서 사도가 ‘나’라는 존재를 통해 묘사하는 그의 내면상태가 바로 ‘율법이라는 진리의 빛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이해하고 행하길 원하지만, 또 한편 자기 속에 있는 죄로 인하여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을 그는 제3자적 시각으로 관망하듯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로마서7장의 ‘14~25절’ 후반부에서 사도가 묘사하는 ‘나’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율법이 신령한 줄 알고 (7:14)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는 존재 (7:22)인 것입니다. 이런 나는 ‘비록 중생한 자는 아닐찌라도, 죄에 대해 무감각한 불신자들의 상태 (7:8)가 아니라, 죄의 그 막강한 힘을 이해하고 율법을 통해 내 스스로는 그 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통렬히 깨닫고 그런 사망의 몸에서 건져지기를 간절히 절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상태는 중생한 상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신자와 같은 상태도 아닌 상태요, 율법에서 깨닫은 죄의 막강한 힘과 나의 그 깊은 죄성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는 하나님의 다루시는 ‘과도기적 상태’ 혹은 ‘영적 각성 단계’라고 <로이드 존스>목사는 주석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그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구원의 은혜는 그의 택하신 자들을, 사도 바울이 청년시절 율법을 행하면서 경험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 전에 먼저 진리의 빛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은 신령한 것과 그분의 법을 즐거워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은 행하는 모순된 자신을 깨닫고, 이런 곤고한 자신을 탄식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런 7장 후반부의 ‘나’는 사도 바울의 경우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모순된 자신을 발견하고 깊이 고뇌하고 탄식하게 만드는 과도기’를 아마도 주님을 다메섹에서 만나기 전의 여러 해 동안이나, 혹은 주님을 다메섹에서 만나고 4일 후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눈의 비늘이 떨어지고 주님을 영접하는 중생을 경험하기 전까지의 기간이 바울이 7장에서 언급하는 ‘나’가 아닌가 하고 저는 추측해 봅니다.
이제 저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깨닫았던 복음의 진리를 함께 나누며 오늘 말씀을 마무리해 나가고자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젊은 시절 카톨릭 수도승으로 있을 때, 그는 고행과 수도자들의 각종 수행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뜻을 행하여 나감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각고의 노력을 통해 고행과 금식하고 계명을 따라 살고자 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속에 있는 죄의 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괴로와 견딜수는 없었습니다. 마치 7장의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7:19,24)고 말입니다. 이렇게 그는 모순된 자신에게 절망하고, 죄의 힘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괴로와 탄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날, 마르틴 루터는 그날도 로마에 있는 <라테란 대성당>의 28돌계단을 자신의 죄를 고행으로 용서함 받고자 무릎으로 피가 나도록 힘겹게 기어오르는 가운데 불현듯 <로마서1장17절>의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7)는 복음의 진리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은 그 어떤 우리의 고행과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과 그분의 은혜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인 것을 말입니다. 루터는 그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일어서서 그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요?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모순된 존재임’을 스스로 깨닫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것이 사도의 마지막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끝절 <25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7:25)라고. 우리 스스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기에, 도리어 선한 율법을 이용해 각양 죄악을 맺어가는 그 막강한 죄의 힘을 이길 수 없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고,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결론을 사도는 <7장4절>에서 이미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7:4)라고. 따라서 7장의 결론은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완성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성도들에게 이렇게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를 밝혔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4) ‘몽학선생’ (school master/tutor)은 그 주인이 오기 전까지 그 주인의 자녀를 책임지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선생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약속하신 주인이 왔을 때, 가정교사는 더 이상 그 자녀를 자기 아래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율법에 가두어짖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하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주의 영, 성령 안에서 육신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주와 함께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도 실수하고 넘어질지라도, 결코 자포 자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주와 함께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더 이상 내 행위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죄를 이기고 율법의 마침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통하여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삶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자녀 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