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4, 2026

“인간의 모순” (Human Paradox)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7:19~20
Service Type:

“인간의 모순”

(Human Paradox)

10-4-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7:19~20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For the good that I would I do not: but the evil which I would not, that I do)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Now if I do that I would not, it is no more I that do it, but sin that dwells in me.)

 

[설교 요약]

사도는 로마서 7장의 후반부인 오늘 본문에서 모순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v.19)라고.

이제 우리는 로마서 ‘7장’을 마무리해 나가며, ‘왜 사도는 이런 모순된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가?’하는 것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중심에는 ‘<로마서7장>에서 사도가 묘사하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지난 기독교2천년 역사를 거쳐오며 형성된 다양한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약하자면,

  1. ‘성 어거스틴’의 견해: 그는 사역 초기에는 ‘나’는 ‘중생하지 못한 자’이라고 이해했으나, 후기에는 ‘중생한 자’라고 자신의 견해를 바꿈
  2. ‘존 웨슬리’과 ‘알미니안들’: 이들은 ‘중생하지 못한 자’라고 주장
  3. ‘제2의 축복론자’: ‘중생이후에 추과적인 영적 체험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것이 <제2축복론>인데, 7장의 ‘나’는 ‘중생했으나, 로마서8장의 성숙된 신앙으로 나가지 못한 자’라고 규정
  4. ‘로이드 존스’: 로마서 7장의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빛을 깨닫지만,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라고 주장

저는 개인적으로 이 가운데서 4번째 견해인 ‘로이드존스’의 <7장의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빛을 깨닫지만,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라는 견해를 지지합니다.

왜냐하면, <7장13절>이후로 본격화되고 있는 사도의 ‘나’라는 존재가 <중생한 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14절’에서 사도가 묘사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리는 (sold under sin) 존재’ (14b)는 구원받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앞의 <5~6장>에서 사도가 선언하듯, ‘죄 아래 팔린 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5:21)하며, ‘죄의 종/노예’ (6:17)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나’는 <중생하지 못한 불신자도 될 수 없는 이유>는 불신자는 결코 ‘율법이 신령한 줄’ (7:14a) 알 수 없고, 또한 ‘그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7:22)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시간 7장에서 율법과 성도의 관계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해하기 난해하다고 일컬어지는 7장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할찌라도, 바라기는 ‘율법의 마침’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랑의 법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완성시켜 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이번주와 다음주 두 번에 걸쳐 ‘로마서7장’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과거 율법을 통해 경험한 개인적 깨닫음과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율법에 대해 자유하게 된 신분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놀랍게 밝혀 나가고 (변증해 나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는 7장의 후반부인 오늘 본문에서 모순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v.19)라고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의 깊은 영적 성찰과 성령의 충만한 도우심 가운데 드러난 변화된 우리 성도와 율법과 죄의 관계를 더욱 온전히 깨닫아가는 복된 시간 되기를 기대합니다.

먼저 저는 사도가 ‘7장’에서 강조하고 붙들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런 <7장>의 주제는 ‘무엇이 율법의 목적인가?’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그동안 확인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함’이요,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고 자랑치 못하게 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도 바울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 특별히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흠없이 잘 지켜 행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자랑했음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유대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율법을 생명처럼 사랑하고, 철저하게 지킨다’라고 자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은 결코 행위로 자랑할 수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기는 커녕 율법을 다 지킴으로 의롭다고 착각하는 영적 맹인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18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한 바리새인은, 성전에 서서 옆에 있는 세리를 깔보고, 자기자랑으로 가득찬 기도를 드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8:14)고 준엄하게 듣는 자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저는 이번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모순’에 대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사도가 7장을 통해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율법과 우리 성도와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제가 지난 시간 ‘율법’을 큰 그림에서 이해하고자 했을 때, 2가지로 특징 지울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율법은 선하다’는 것이요, 둘째는 ‘율법은 죄에 이용당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이견이 없겠지만, ‘율법이 죄에 이용당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령 ‘죄가 율법을 이용한다’는 이 영적 진리를 우리가 머리로는 인정할 수 있을찌라도, 7장에서 사도가 밝히는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런 치열한 전투와도 같은 영적(존재적) 갈등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우리 인간의 존재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이 왜 벌어지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7장>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죄로 심히 죄 되게 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죄에게 이용 당하는 것’은 <율법이 악해서도, 약해서도, 무능해서도 아니요, 이런 죄에게 이용당함을 통해, 도리어 죄의 그 사악하고 막강한 악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얼핏보면, 율법은 죄에게 지는 것처럼 보이고, 마치 죄에게 힘없이 끌려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것을 통하여 율법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죄로 심히 죄 되게 드러내는 본연의 임무(미션)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이 원하는 하나님의 선한 율법은 지키지 못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이런 모순’의 중심을 보여 주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v.19)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1인칭 대명사> ‘나’라는 주어를 사용하여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순’을 토로하고 나서, 이런 모순된 삶을 살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어지는 <2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v.20)라고. 이런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우리 인간 모순의 중심에는 ‘죄가 있다’고 사도는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우리를 이런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하는 모순된 삶을 살게 하는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우리가 이해했다면, 중요한 사실은 ‘사도 바울이 과연 어느 시점에서 이런 고백을 하는가?’하는 점입니다. 사실 <로마서7장>을 이해하기 쉽지 않고, 난해하다고 느끼는 그 중심에는 바로 ‘사도 바울의 자기 자신의 모순됨’에 대한 인식을 어느 시점에서 가졌느냐 하는 것이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런 모순된 우리 인간존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7장의 말씀은 <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이 이런 죄와 율법에 대한 자신의 모순된 모습으로 말미암아 깊이 탄식하는 시점을 언제로 이해하느냐?>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우리 변화된 성도의 존재를 파악하는 판단근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자신에 대한 영적 깨닫음은 자기 한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동일하게 영적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되고,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사도는 7장에서 ‘언제 자신이 모순된 삶을 살고 있는지? 언제 이런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탄식하는 것인지?’를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다면, 사도가 의미하는 ‘나’라는 존재가 누구임을 우리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먼저 주후 3세기경에 사역했던 ‘성 어거스틴’의 로마서 7장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의 기초를 정립했고,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크리스챤 리더의 한명인 성 어거스틴은 사실 사도 바울이 7장에서 가르치는 ‘나’, 특별히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24절’까지의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모순된 나’, 그리고 더 나아가 ‘죄에 사로잡혀서 죽음과 같은 몸에서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나’는 누군가에 대해 처음에는 ‘중생하지 못한 자’라고 주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이런 자신의 관점을 바꾸어 사도가 주장하는 ‘나’는 ‘중생한 성도’를 의미한다고 자신의 종전 견해를 바꾸어 재해석했습니다. 이런 성경말씀에 대한 깨닫음과 주석에 있어서 제가 개인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어거스틴의 위대한 점은 그가 말씀의 진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놀라운 영성이 있었다는 것보다도, 자신이 한때 잘못 이해했던 말씀의 진리를 영적 성숙을 통해 바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과거의 실수를 은근슬쩍 덮어두거나, 옳은 것인양 고집하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어거스틴에겐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견해는 그 이후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 (Reformers)과 청교도들 대부분에 의해 계승되어 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존 웨슬리’와 ‘구원에 있어서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소위 ‘알미니안’들은 ‘나’를 ‘중생하지 못한 자’에 대한 묘사로 이해했습니다. 말 그대로 죄의 힘에 사로잡혀 탄식하고 절망하는 ‘나’는 중생한 크리스챤 일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난 19세기 이후 ‘나’에 대한 제 3의 관점이 등장했는데, 여기서의 ‘나’는 ‘중생하기는 했으나, 아직 사도가 8장에서 묘사하는 성숙되고 최선의 삶을 영위하는 중생한 성도’로 까지는 아직 나아가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7장의 <나>에서 8장의 성숙된 성도로 변화되는 개기’를 <제 2의 축복>이란 이론으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사도가 <7장>에서 주장하는 ‘나’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8절’과 ‘11절’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열매 맺는다’고 주장했음을 나누었습니다. 죄의 교활함과 막강한 힘은 심지어 선한 하나님의 율법까지도 전투의 본거지로 삼아 우리 안에 탐심과 색욕의 열매를 맺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며 강조했듯이 <이렇게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온갖 악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계명 곧 율법이 약하거나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율법의 기능>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유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힘없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같이 저항하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사단 마귀는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쾌재를 불렀겠지만, 주님이 그 <십자가의 죽음>은 죄와 사망과 사단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는 크라이막스가 되었듯이, 율법도 겉으로 보기에는 힘없이 무능하게 죄에게 이용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통해 정작 율법은 죄로 심히 죄 되게 드러내는 하나님께 부여받은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7장13절>에서 사도가 선언하듯이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v.13) 이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이어지는 <14절>입니다. 사도는 ‘14절’에서 ‘나’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v.14)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묘사하는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사실 사도는 7장에서 14절부터 마지막 25절까지의 후반부에서 ‘나’라는 존재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율법의 목적은 ‘첫째, 율법의 기능인 죄를 심히 죄로 드러내는 것’이요, 둘째,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임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속에 있는 죄로 인하여, 율법이 우리를 선한 행동으로 인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망의 대행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4절>에서 ‘육신에 팔린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중생하지 못한 자’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하지 못한 자’ 곧 ‘불신자’는 결코 “율법은 신령한 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거룩하고 신령한 줄 깨닫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은혜와 빛’을 통해 우리 인간의 어두운 마음에 비췰 때만 깨닫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14절>을 파악함에 있어서 부딪치는 하나의 난관은 ‘14절 후반부’에서 사도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v.14b)라고 ‘나’를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했을 때, ‘죄 아래 팔렸다’ (sold under sin)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원어의 시제상 ‘노예처럼 팔려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한마디로 ‘죄가 나의 주인이요, 나는 그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사도가 <5~6장>에서 밝힌 ‘죄의 노예/종’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비참한 상태인 것입니다. ‘5장’에서는 후반부 ‘12~21절’까지에서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를 사도가 비교하면서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5:21)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6장’에서도 후반부 ‘16~23절’에서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6:17,18)라고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분명한 차이를 밝히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과거 우리가 ‘죄의 종’이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함으로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7장14절’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나’라는 인간의 상태는 아직 ‘중생하지 못한 상태’임을 우리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그동안 ‘성 어거스틴’에서 출발하여 개혁파의 전통적 해석에 따라서 사도가 7장에서 주장하는 <나>는 <중생한 크리스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생을 했을 뿐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로마서편지’를 쓸 당시의 사도 바울 자신을 묘사한 것>이라는 견해는 큰 난관에 봉착하고, 이로 인해 7장 전체가 점점 더 난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상태로 남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저는 ‘로마서 강해’의 가장 권위있는 강해 설교자이자, 20세기의 대표적 명설교자의 한 사람인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7장’을 해석하는 견해를 지지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사도가 묘사하는 ‘나’는 ‘중생하지 못한 불신자’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중생한 성도’도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로마서 강해설교 가운데, 7장에서 사도가 묘사하는 ‘나’라는 존재는 첫째, <중생한 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나’는 죄 아래 팔려 현재까지도 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14절>의 뜻은 ‘5장~6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속하여, 죄의 종/노예에서 해방된 구원받은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둘째로, ‘나’라는 존재가 <중생하지 못한 불신자도 될 수 없는 이유>는 ‘율법이 신령한 줄 알거나, 그리고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결코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신령한 줄 알고 (7:4),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상태(7:22)는 결코 불신자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저는 지금까지 <로마서7장>에서 사도 바울이 묘사하는 ‘나’는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 곧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며, 더 나아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림으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v.24)라고 절규하는 <나>’는 누굴까요? 저는 이렇게 사도가 놀랍게 묘사하는 <로마서7장>의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악을 깊이 깨닫고 진리의 빛으로 나아오게 되었지만, 아직 중생하지는 못한 자>라는 ‘로이드 존스’목사의 견해가 가장 본문말씀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살펴본 것처럼, 7장의 ‘나’를 단순히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라는 견해나, 또는 ‘중생한 크리스챤으로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로마서 편지를 쓸 당시의 사도 바울’이라는 견해는 본문내용과 상당한 본질적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7장>의 앞뒤장에서의 사도 바울의 논리전개와 주장하는 논점들을 우리가 비교해 볼 때, 단순히 ‘나’라는 존재를 단순히 ‘불신자’ 혹은 ‘중생한 자’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성경학자들은 <7장>에서 사도가 토로하는 “나는 죄 아래 팔렸도다”라든가 혹은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는 탄식은 사도가 ‘중생한 크리스챤이자, 더욱이 그리스도를 누구보다 충성되게 사랑하는 제자’로써 여전히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 미워함으로써 그의 감정이 격하여 그런 절망적인 탄식을 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7장을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뿐 아니라, 그의 모든 <서신서들>을 재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서들에서 한결같이 자신의 중심되는 메시지를 언제나 흩트림 없이 전개해 나가면서, 영적 논리와 함께 단어 선택이나 문장을 서술하는 구조에 이르기까지 앞뒤 단어선택이나 문장이 서로 상충하거나 모순되지 않게 말씀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동일한 단어나 문장을 전과 후에서 서로 상충하게 사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이것이 전체적으로 사도가 <7장>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모순된 삶의 이유요, 이런 모순된 삶은 ‘어느 시점’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시간에 7장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7장의 주제인 ‘율법과 우리 인간’ 특별히 ‘우리 성도’와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결론적으로 확인해 나가며, 그동안 미흡하게 다루었던 내용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7장을 통해 비록 복잡미묘한 문장구성으로 인해 지금 다소간 사도가 의미하는 뜻을 우리가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할찌라도, ‘율법의 완성’되신 예수 그리스도, 율법으로부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허락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하여, 그분과 진정한 연합을 누리고, 사랑과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