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로 심히 죄되게” (Sin Might Become Exceeding Sinful)
“죄로 심히 죄되게”
(Sin Might Become Exceeding Sinful)
9-27-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7:13~14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Was then that which is good made death unto me? God forbid. But sin, that it might appear sin, working death in me by that which is good; that sin by the commandment might become exceeding sinful.)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For we know that the law is spiritual: but I am carnal, sold under sin.)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로마서7장>을 진행해가며 ‘율법과 성도’의 관계를 더욱 깊고 정교하게 밝혀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7:13)고 말입니다.
저는 7장을 통해 사도가 ‘율법에 대한 2가지 관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 <율법은 선하다>는 것 (v.7,12,14)이요
- <율법은 죄에게 이용당한다>는 것 (v.5,8,11)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율법은 죄에게 이용당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율법이 죄에게 이용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요? 과연 “무엇이 <죄가 율법을 이용한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 을 뜻합니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v.13a)라고,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율법이 죄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죄를 심히 죄 되게 드러내는 것’ (v.13)이 율법의 기능이라고 밝힙니다.
둘째,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연약함’을 뜻합니다: 이처럼 ‘죄가 심하게 죄로 드러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비록 거듭난 존재가 되었지만,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죄가 거하는 존재양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인정함은 절망의 시작이 아니라, ‘나의 약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강하심을 경험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고후. 12:10)
셋째, ‘예수님을 바라보게 함’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우리를 격려하고 도전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a)라고. 심히 악한 죄의 권세를 이기고, 나의 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로 승리하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날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의 말씀과 성령과 함께 죄와 맞서 힘써 싸우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점점 더 자라가는 성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사도 바울은 <로마서7장>을 진행해 나갈수록 ‘율법과 성도’의 관계를 더욱 깊고 정교하게 밝혀 나가고 있습니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7장 가운데 분명하게 강조하고 변화된 우리 성도의 존재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우리 성도는 율법에 대해 자유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 자유하게 되었다’는 의미는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됨으로, 과거 율법의 법에 메인 바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가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속이고, 탐심을 열매 맺는 이런 악한 힘의 작동원리가 무엇니지를 우리는 사도의 개인적 경험과 깊은 영성을 통해 함께 성찰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죄와 율법과 성도’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밝혀 나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때로 헛갈리기도 하지만, 한걸음 한걸음 인내하며 우리 존재의 진실을 밝혀 나가고, 더 분명히 복음의 진리로써 깨닫아 가는 복된 시간 되시길 기대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의 <로마서7장>을 읽고 묵상하면 할수록 사도가 우리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연합한 우리 성도는 율법과의 관계를 잘 정립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사도는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가 율법과의 관계는 언제나 우호적인 관계요, 온전히 추구해야 할 관계이지만, 그 관계는 이제 더 이상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 율법의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양됨으로, 우리 성도는 이제 예수님의 법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지키고 따르는 관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제가 말씀드린 ‘율법과 우리 성도와의 관계’의 변화에 대해 성도 여러분은 큰 어려움 없이 대부분 이해를 하였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게 여겨지는 부분은, 사도가 주장하는 <죄가 율법을 이용해서 악한 영향력으로 우리를 속이고 죄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부분을 중심으로 성도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눠 보기 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7장을 통해 “사도가 율법에 대해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한마디로 해서, <율법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제가 ‘율법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라고 말씀드리는 뜻은 ‘율법을 이해하고자’할 때, 두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율법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는 ‘7장7절’에서 “율법이 죄냐 그렇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v.7)라고 했고, ‘12절’에는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v.12)라고, 또한 ‘14절’에서는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v.14)고 사도는 거듭해서 ‘율법은 선하고 거룩함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데로 ‘하나님의 법’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로움과 거룩함에 이르는 선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 저는 더 긴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또한 또 다른 관점에서 율법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두번째로 <율법은 죄에게 이용당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처럼 ‘죄가 율법을 이용한다’는 개념을 사도는 다양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말씀은 무엇일까요? 기억하시겠지만, 사도는 ‘5절’에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v.5)라고 선언했으며, ‘8절’에서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v. 8)라고, 그리고 ‘11절’에서도 ‘8절’과 매우 유사하게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v.11)라고 반복해서 죄가 선한 율법을 이용해 우리를 속이고 각양 탐심을 이루는 영적 실체 (메커니즘)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율법은 어처구니없이 죄에 의해 이용당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율법이 선하지 못해서 입니까? 아니면, 율법에 무슨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사도는 그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v.7)라고. 결코 율법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도 확인했듯이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전혀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남으로 그동안 ‘6~7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되고 영광스러운’ 변화된 존재가 되었지만, 우리 몸, 곧 ‘육체’는 여전히 죄가 거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영적인 존재방식이라고 우리는 확인한바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는 6장에서 이렇게 우리 성도의 존재방식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6)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존재 (=새사람)이 되었지만, 우리의 ‘몸’ 곧 ‘육신’은 ‘죄가 거하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죄의 몸’ (the body of sin/the body ruled by sin)라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갑자기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사람 되어 살아가는 우리 성도의 육신 안에 죄가 함께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 받은 성도의 존재양식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제가 앞서 여러분에게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에게 “죄가 율법을 이용해서 우리를 속이고 죄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좀더 본격적으로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앞서 나눈 율법의 두번째 관점인 <율법은 죄에게 이용당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처럼 “무엇이 <죄가 율법을 이용한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 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율법의 정당성을 선언합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v.13) 율법은 결코 악하지 않고,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이 우리를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로 심히 죄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사실 우리는 ‘로마서’를 시작하며 과연 무엇이 율법의 기능인지에 대해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핵심적인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사람이 없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로마서 3장20절>에서 이렇게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음이라” (롬. 3:20)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중심 메세지는 그 누구도 율법을 다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지킴으로 구원받을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사악하고 교활하며 그 힘이 막강한지, 그 죄는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까지도 자신의 전투에 ‘작전 본거지’로 삼아,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각양 탐심의 열매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도의 결론은 ‘율법이 악해서도, 약해서도, 무능해서도 아니고, 오직 죄가 죄로 심히 드러나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자체로는 결코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종교 지도자들 뿐 아니라, 오늘날 21세기의 바리새인들 곧 ‘율법준수’를 통해 스스로 의로와지고, 구원받겠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율법을 통해 죄와 사망의 악한 실체가 드러남을 이렇게 강력히 선언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6)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율법을 통해 의로와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오직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연약함’을 뜻합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체 (몸)에는 여전히 죄가 거하는 것이라면, 이런 구원받은 우리 성도의 존재방식은 우리 스스로 자신만만하고 높아지기 보다는, 겸손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천사처럼 완전히 죄짓지 않는 존재로 우리를 만드시지 않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순간 두번 다시 죄짓지 않도록 바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않는 것일까요? 이렇게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존재가 되었지만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죄로 인해 넘어지고 실수할 수 있는 존재’로 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깊은 뜻과 경륜이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사도는 <7장>을 마무리하고,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권세와 영광이 무엇인지를 본격적으로 <8장>에서 밝히며 ‘어떻게 우리가 육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죄를 좇지 않고,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지?’를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4) 여기서 사도가 주장하는 핵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지만, 우리 스스로는 죄와 육신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으로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내 힘과 능력으로 내 육신의 정욕과 죄와 사단 마귀의 권세와 홀로 싸우는 것을 뜻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좇아 겸손과 신실함으로 따름으로 비로소 ‘율법의 요구’를 성취시켜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성도가 ‘스스로의 약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할 때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10)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예수님을 바라보게 함’을 뜻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을 묵상해 나가며,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살리고자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참되게 믿고 의지하게 하시고자 하심임을 믿습니다. 제 말씀의 뜻은 단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아 구원 얻게 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 그분의 생명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면, 더욱 우리는 우리의 참된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분만을 바라보며, 주님 오시는 날까지 주님과 하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로마서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라는 성도의 삶의 핵심을 누누히 강조하는 핵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바로 이 점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우리를 향해 밝혀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기자는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벨과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 뿐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믿음을 지키고자’ 희롱과 채찍질과 심지어 돌에 맞고 칼에 죽임을 당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자랑스럽게 모두 소개하고 나서, <히브리서 12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a)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릴 수 있을까요? 그 길은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b)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 치 않으신 주님의 삶이 바로 우리의 샘플이요, 끝까지 따라 가야할 푯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주님과 함께 앞에 있는 구원의 소망과 생명의 즐거움을 누리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우리가 율법 가운데 역사하는 내 가운데 있는 악하고 강력한 죄의 덩어리를 발견하면 할수록 좌절하고 낙심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육신의 장막이 끝날 때까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영 성령과 더불어 율법이 깨닫게 한 이 죄와 육신과 악한 영 사단 마귀와 온 힘을 다해 피 흘리기까지 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율법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율법은 여전히 여러분의 주인처럼 절대적 영향을 미치며, 그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로와지고자 하는 율법주의자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이제 자유케 되었으니 ‘율법폐기론자’가 되어 율법의 요구와는 관계없이 내 마음데로 방종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까? 이런 ‘율법주의’적 삶이나 ‘율법폐기론’적 삶은 결코 복음의 진리 가운데 우리 성도들에게 가르쳐주는 올바른 ‘율법과 성도’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 율법과의 관계는 우리 성도가 율법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한 계명임을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이제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에 얽매임으로 우리 스스로 행할 수 없었던 율법의 요구를 비로소 성취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성화시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성화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그의 영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의의 종이 되어 의로움과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더 이상 내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실족하거나 낙심하거나 심지어 내가 구원받지 못한 것 아닌가 의심하는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고, 날마다 우리 믿음의 주인 되시며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주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죄를 이기고 육신을 이기고 악한 영과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김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가는 축복된 주의 자녀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