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으로 탐심을” (Covetousness Through Commandment)
“계명으로 탐심을”
(Covetousness Through Commandment)
9-20-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7:8~9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But sin, taking occasion by the commandment, wrought in me all manner of concupiscence. For without the law sin was dead.)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For I was alive without the law once: but when the commandment came, sin revived, and I died.)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로마서7장>의 본격적인 난해하고 복잡미묘해 보이는 ‘영적 메커니즘’ 안으로 들어섭니다.
먼저, 오늘 분문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v.8a)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가 <계명/율법>을 이용하여 군사적 요충지로 삼아 탐심으로 하여금 나를 공격하여 넘어트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주장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의 신앙의 궤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그의 삶이 극적으로 회심하게 되었는데 (행. 9장), 그 이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가량과 ‘고향 다소’에서 10년가까운 시간을 칩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복음의 진리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적 성숙을 거치며, 사도 바울이 과거 자신이 ‘바리새인’일 때 <율법에 대한 오해>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율법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은,
-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려고 율법을 힘써 열심히 행했다는 것 (롬. 10:2~3)이요,
- ‘율법준수’을 ‘내적 순종’은 제쳐두고, 단지 ‘외적 행위’이 전부인 양 여겼다는 것 (마. 5:21~26)입니다
그럼으로 사도가 오늘 본문을 통해 고백하는 것은 ‘과거 자신은 마치 율법을 흠 없이 모두 잘 지친다고 착각’했는데, 복음의 진리를 통해 ‘율법이 명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허물과 약함을 발견하고, 죽은 자처럼 낙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 7:8-9).
이것이 <9절>의 말씀입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v.9)라고. 따라서, 사도가 “죽었도다”는 것은 실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깊이 근심하고 참회하는 내적 고통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을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나의 죄와 허물을 정직히 율법을 통해 깨닫고, 이제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싸우고,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성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로마서7장>의 본격적인 난해하고 복잡미묘해 보이는 ‘영적 메커니즘’ 안으로 들어섭니다. 사도는 이렇게 날카롭고도 충격적인 우리의 내면상태를 영적으로 해부하듯 밝힙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니라 (v.8)라고 말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탐심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 가운데서 사도가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제기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요, 거룩한 것’이지만, 죄가 율법 곧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온갖 탐심과 부패의 온상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사도의 주장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자칫 모순되고,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연결되지 않는 우리 성도 자신의 삶 속에 스며 들어 있는 죄와 율법과 우리 존재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를 이제 본격적으로 묵상해가며, 생명의 말씀과 성령님의 크신 도우심으로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변화된 삶의 존재방식을 더욱 밝혀 깨닫아가는 성도 여러분의 소망스런 시간 되길 기대합니다.
오늘 말씀을 본격적으로 나누기에 앞서, 지난시간 살펴본 것처럼 ‘삽입장’이라고 특징 지워지는 ‘6~7장’의 소주제가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기 원합니다. 저는 먼저 6장을 요약하면 ‘우리 성도의 삶은 이제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라고 했고, 둘째로 7장은 ‘우리 성도는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을 위하여는 열매 맺는 존재>가 되었다’고 정의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7장>을 시작하면서 사도가 주장하듯이 ‘우리 성도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과거 율법이 주인과 같이 우리에게 행했던 절대적인 영향력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이 우리의 주인 (남편)되심으로 그 영향력이 율법에서 그리스도께로 이양되었다’는 뜻임을 우리는 나누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 분문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v.8a)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먼저 이해할 것은 “죄가 기회를 타서” (v.8a)라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죄가 기회를 타서’라는 말에서 “기회를 타다” (taking occasion)라는 표현에서 ‘기회’는 <헬라어 원어>에서 ‘아포르메’ (ἀφορμή/Aphorme)로써 ‘군사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군사기지, 작전개시선, 혹은 군사공격을 시작하는 발판기지>를 뜻합니다. 그럼으로 본문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탐심을 이루었(다)”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죄가 <계명/율법>을 이용하여 하나의 군사적 요충지로 삼아 탐심으로 하여금 나를 공격하여 넘어트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의미는 죄가 계명 곧 ‘율법’을 군사적 전략요충지로 확보하여 공격함으로써 나를 탐심이라는 죄로 장악하고 넘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죄가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능동적이요 적극적인 막강한 힘임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죄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여건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하여 우리를 죄짓게 하는데, 심지어 가장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의 율법까지도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마치 ‘지렛대’처럼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죄’라는 강력한 (간교한) 원수는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선으로 인도할 율법 마저도 마치 전쟁시의 <군사 전략기지>로 삼아, 그것을 명분과 핑계와 빌미로 결국 우리를 탐심에 빠트리는 것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내 속에서 탐심을 이루었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어떻게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성도 여러분 대부분이 잘 아시듯, 사도 바울의 삶의 극적인 전환점은 그 자신의 계획과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느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적발해서 처단하고자, 다메섹 언덕을 달려가고 있을 때, 그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행. 9장). 이렇게 주님께서 그를 극적으로 만나 주심으로 가능케 된 사도의 ‘청년 사울’시절의 회심사건은 사도행전과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주님을 만난 이후 어떤 영적 변화 곧 그리스도의 충성되고 성숙된 제자로 변화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잘 찾아보기 힘듭니다. 단지 그가 주님을 만난 이후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3년가량 거했다는 것 (갈. 1:17)과 그 이후 고향 다소로 돌아가 10년이라는 긴 기간을 칩거 (갈. 2:1; 고후. 12:2)했던 그의 행적에 대한 간략한 언급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처럼 지나가듯 언급하는 것 말고, 구체적인 사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경에 더 이상 없지만, 바울의 여러 서신서에서 그의 자서전적 고백들 가운데 드러난 ‘영적 변화’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와 같은 예로서 대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도가 청년 시절 곧 ‘청년 사울’시절 자기 자신이 어떤 자였는지를 그는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갈. 1:14)라고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빌립보 3장>에서는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빌. 3:5~6)라고 회고합니다. 사도는 지난날 그의 말 그대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임을 자랑하며,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음으로 열심으로는 교회를 심하게 핍박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 된다는 것이, 그리고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는다는 것이 왜 교회를 심하게 핍박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써 사도는 <로마서 10장>에서 과거 ‘청년 사울’로 살았던 자신과 같은 바리새인들, 곧 ‘율법준수를 생명처럼 여기며, 유대교를 지나치게 지킴으로 스스로 의로와지고자 했던 열심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문제가 핵심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힙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 청년 사울은, 그리고 그와 같은 많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준수하고자 하는 열심이 넘쳐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율법준수의 <동기>’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율법을 열심으로 준수함을 통해 ‘나는 이 정도의 의로운 존재야!’라고 스스로의 의를 세우고 자랑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년사울과 같이 외형적인 ‘율법준수’라는 관점에서 보면, 마치 율법을 어기고 율법을 폐기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는 없어져야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이단집단으로 간주했기에 유대인들은 교회를 심하게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준수를 심봉하는 유대인들은 정작 그들이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요,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 자신은 이런 영적 맹인과 같은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노라고 말은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의>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의>를 세우고자 결국 하나님의 의에 불순종하며, 대적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유대인들이 범하는 외적인 ‘율법준수’의 함정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도가 주장하는 그 중심에는 이미 우리가 여러 번 확인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율법’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영적 진리를 기초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수많은 율법, 600개가 넘는 그 수많은 유대인들이 행하고자 하는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 위에서 모두 만족시키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고 말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도가 <8절>에서 선언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v.8) 앞서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듯이, 죄라는 막강한 힘이 계명을 군사작전의 전초기지로 삼아 우리 속에서 각가지 탐심이라는 죄의 열매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v.8b)고 ‘죄가 기회를 타서 탐심을 이루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좀더 깊이 밝혀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법’ 곧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다>고 진술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의 경우는, 자기 스스로 고백했던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난 이후, 동갑자들보다 유대교에 더 열심이었던 지난 날’에서 보듯이 사실 그의 인생은 율법을 떠난 삶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정말 그의 인생에서 율법에 영향을 받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이요 ‘경험적’으로 마치 ‘율법이 없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그가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것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이어지는 <9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v. 9)라고 말입니다. 사도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v. 9a)라고 ‘법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좀더 분명히 설명합니다. <8절>에서 ‘법이 없다는 것은 율법이 없는 것과 같은 율법을 무시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언제나 외적으로 율법준수를 생명처럼 여기고, 언제나 자신은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키며 살았다고 스스로 확신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율법을 깨닫지 못함으로 정작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율법준수를 확신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실상은 자신이 <율법에 대해 무지하며, 율법의 정신과 명령을 깨닫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는 한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빌. 3:6) 곧 ‘율법의 명령을 모두 지키는 자’라고 굳게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처럼 청년 사울도 ‘자신의 외적인 율법준수’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했고, 이를 통해 남(세리)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허망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청년 사울의 시기에 그는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그 스스로의 의로 인하여 살아 있었고, 자랑과 교만과 높아진 마음으로 그는 생생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의 자존심과 자랑과 잘남은 충만하게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v. 9b)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사도는 ‘계명이 이른다’든가 ‘나는 죽었도다’는 표현을 ‘절대적’인 표현보다는 ‘상대적’표현으로 진술합니다. 여기서 사도가 “계명이 (내게) 이르매”라는 표현은 그 자신이 처음으로 ‘계명’곧 ‘율법’을 접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대로 ‘상대적이요, 경험적인 표현’입니다. 즉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비로소 ‘무엇이 율법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요, 어디로 나를 이끌어 가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명이 이르매”라는 뜻입니다. 계명이 내 영혼 깊이 이르게 되었고, 그동안 수없이 율법을 읽었음에도 깨닫지 못했던 율법의 참된 가르침을 마침내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는 없다’는 사실이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인가를 철저하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누가 복된 자인가?’를 가르쳐 주신 핵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진정으로 복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미 스스로 부자가 되어 하나님께 대하여는 가난한 인생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하게 빈 마음 되어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애통한 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요, ‘마음이 청결한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청년 시절’ 바울과 같이 외적인 율법준수에 어긋남이 없음으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 자랑하는 심한 착각에 빠진 삶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로는 결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영의 눈을 열어 온전히 깨닫고, ‘내가 죄인의 괴수임’을 정직히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다스림만을 간구하는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v. 9b) 그렇습니다. 내가 계명을 온전히 깨닫게 될 때, 내 속에 있는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가 살아난다’는 것은 이미 내 속에 죄가 있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이제 올바른 진리의 깨닫음으로 나의 내면을 바라봄으로써 ‘흉측한 죄덩어리’가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엄중한 것은 내가 이 죄덩어리를 끄집어 내고자 하면 할수록, 이 죄의 막강한 힘은 심지어 죄를 깨닫게 한 율법까지도 전쟁의 전초기지로 이용하여 내 속에서 탐심과 각종 죄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죽었도다”라는 것은 ‘내가 정말 죽었다’가 아니라, 죽을만큼 낙심하고 실망하고 슬픈 고뇌와 좌절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도전하시듯, 인간적인 자신 만만함과 스스로 높아짐으로 우쭐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진리를 통해 나의 죄와 허물을 직시함으로 가난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좌절하거나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죄 용서하심과 자비와 은혜’로 이어지는 축복된 삶의 출발점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의 본질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을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고 말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여전히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현대판 바리새인과 같이 살아 가는 우리 자신을 깨닫았다면,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정직히 직면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거울인 율법, 곧 ‘계명’을 통해 ‘나 자신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 과연 나는 어떻게 율법에 반응하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청년 사울과 같이 ‘외면적인 율법준수’가 곧 율법을 다 지킨 것처럼 착각하거나,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처럼 10계명에 대해서 ‘내가 어려서 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자신을 오해하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여전히 이웃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고, 형제를 미워하거나 시기하며, 마음에 온갖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찬 나의 실존을 직시하며, 나 자신을 겸손히 발견하며, 가난하고 통회하고 의에 주린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 있는 이 죄의 막강한 힘을 이해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죄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 8:34)라고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죄’는 단순히 도덕이나 윤리나 세상의 형법과 상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계명을 ‘외면적으로 뿐 아니라, 내면적으로 어기는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v.9b)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계명을 통해 도리어 죄를 경험하고, 죄에 지배되고, 나는 죽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바라기는 날마다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말씀과 그의 영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의 몸을 멸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과 사랑과 생명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