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5, 2026

“부활의 의미”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Preacher:
Series:
Passage: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5:12~19
Service Type:

“부활의 의미”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4-5-26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5:12~19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 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9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볼쌍한 자니라

[설교 요약]

          할렐루야! 우리 주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묵상해 가면서 큰 그림에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해서, ‘왜 구원자 되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성경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두가지 이유로 이해하게 됩니다.

  1. ‘속죄’ (Atonement/ Propitiation) 를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된 것처럼, 첫 인간,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와 죽음에 갇힌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뤄 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를 구원코자 하심” (롬.3:24-25)입니다
  2.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을 자녀삼고자’ 하심입니다: <에베소서1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라고 밝히듯이,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를 이미 아셨을 뿐 아니라, 창세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성도를 자기의 아들과 딸이 되는 권세를 예정하심”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묵상할 때, 그분의 부활의 의미는 더욱 선명히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뿐 아니라, ‘우리의 자아와 육신’을 죽일 때만 다시 살아남으로 많은 생명의 맺게 되는 진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활만이 <새 생명>을 얻게 함’을 뜻합니다: C.S 루이스는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자 하나님은 피조물을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옛 인간보다 더 나은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by ‘순전한 기독교’)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새 생명’으로 주십니다 (갈.2:20).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말입니다.

셋째, ‘부활은 메시아 사역의 완성을 확증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메시아로써의 모든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확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7)라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이처럼 주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여러 제자들에게 보이심으로 구속사역이 완성되었음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그의 새 생명 안에서 날마다 부활의 능력으로 생명과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할렐루야! 우리 주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만의 명절이 아니라, 세상사람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 즐기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문제는 세상사람들에게 있어서 성탄절은 그 의미는 관심 없고, 그 분위기와 케롤송에 들떠서 세상 방식대로 그들만의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절>은 우리 크리스챤들이 진정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고, 찬양을 우리 성도의 가장 기쁜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주님의 부활의 능력만이 죄와 육신과 세상의 어두운 세력으로부터 우리 성도를 자유케 하고, 승리케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승리의 부활절을 맞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는 뜻 깊은 시간 되기 원합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묵상해 가면서 큰 그림에서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원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해서, ‘왜 구원자 되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첫째), ‘속죄’ (Atonement/ Propitiation) 를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 이유로써, 우리 성도들이 가장 가장 잘 알고 있는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사건의 하나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첫 인간부부, 아담과 하와의 ‘타락사건’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 먹고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모든 후손은 우리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는 그 ‘죄와 사망’의 막강한 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원죄’ (The original sin)를 물려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올해 들어 <로마서> 말씀을 묵상하며, 그동안 확인한 것처럼, ‘우리 모든 인간은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 누구도 죄의 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롬. 3:10,13)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와 같이 ‘죄와 죽음의 강력한 힘’에 갇힌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죄 없는 그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 그의 피로 죄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요,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중심 메세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예배 드리는 성도 여러분 대부분도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함임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는 ‘창세전에 그의 아들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자녀삼기’ 위해서입니다. 이점에서 우리가 먼저 이해할 것은, 이런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두번째 교리는 첫번쨰 교리와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되어 보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두번째 성경의 가르침은 그 시간적인 개념에서 볼 때, 첫번쨰 교리보다도 훨씬 더 앞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가장 첫 원인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말씀이 <에베소 1장>에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라고 말입니다. 이 에베소서 말씀의 요지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첫 인간부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도 전에, 다시 말해 그들을 만드시기도 전에, 아니 천지만물이 존재하기도 전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 인간을 택하셔서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적인 가르침이 제가 앞서 첫번째 가르침을 보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첫번째 가르침 <창세기3장>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사건’으로 인해 그 죄를 속하고자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했다고 했을 때, 여기에서 저는 근본적인 2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할 줄 모르셨을까?’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하나님은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셨다면 그는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은 ‘하나님이 우리가 범죄할 줄 이미 아셨다면, 왜 이런 인간을 만드셨는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싶습니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대답의 하나가 바로 <에베소 1장>의 말씀이라고 이해합니다. 무엇입니까? 저는 ‘왜 범죄할 줄 알면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는가?’에 대해서 <창세기3장>과 <에베소 1장>의 말씀을 근거로 이렇게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기록되었듯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꼭 닮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시고 사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기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인간을 죄 없고 하나님을 닮은 완전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이 그들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범할 수 있고, 타락할 수 있음을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너무도 잘 아셨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우리를 죄 짓게 하는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닮게 하는 것으로써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임도 하나님은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심령속에 이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된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볼 때, 이런 축복된 영적 존재는 두 그룹이 있는데, 그것은 <천사들>과 <사람>입니다. 이들 두그룹은 가장 하나님을 닮고, 그분의 영광과 뜻을 깨닫고 분별할 수 있는 탁월한 영적 존재이지만,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했을 때, 끝없이 추락할 수 있음도 동시에 확인하게 됩니다. 예건데, 그 존재가 귀할수록 타락의 깊이도 깊듯이 말입니다. 어쨌건 이런 우려(위험)가 현실로 나타난 첫번째 사건이 ‘루시퍼의 타락’입니다. 바로 사단 마귀입니다. 이렇게 ‘루시퍼’라고도 불리는 존재는 본래 ‘하나님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보좌하고 경배’하는 천사들 중의 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여러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늘에서는 루시퍼를 머리로 한 타락한 천사들과 미가엘을 천사장으로 한 하나님의 군대와 큰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전쟁에서 사단과 그 타락한 천사들이 미가엘의 천군천사들에게 대패함으로 땅으로 쫓겨나게 되었음을 ‘요한계시록’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계. 12:7~9). 그리고 천사들에 이어 두번째 타락한 사건이 바로 <창세기 3장>에서의 ‘첫 인간 부부’의 범죄사건인 것입니다. <창. 3장>에서 보는 것처럼, 사단 마귀는 뱀을 조정하여 인간을 범죄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류가 죄와 사망에 갇히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이런 긴 시간의 흐름속에서 인간의 타락과 실수를 이미 아셨기에,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그의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할 계획을 이미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 이후에 있게 될 회복과 완전한 구원 (영생)의 계획을 그 첫 시작에서부터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왜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할지 아시면서도 인간을 만드셨는지?’에 대한 놀라운 본질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죄 용서’라는 차원뿐 아니라, ‘창세전에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 성도를 택하신 계획’을 성취하고자 오셨다는 것을 큰 그림에서 밝혀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을 통해 다시 살아남으로 더 큰 그림에서 볼 때 완전한 인간으로 지음 받았던 아담과 하와보다도 더 영광스런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 짓기도 전에 완전한 인간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지닌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목사는 로마서 설교 가운데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사실은 범죄하기 전의 완전한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된 존재를 의미한다고 주석한 바 있습니다.

그럼으로 저는 이 기쁜 주님의 부활절을 맞아 ‘무엇이 부활의 의미인지?’를 살펴봄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그 신실하신 사랑과 은혜를 먼저 이해할 때, 그 부활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뜻합니다: 그동안 몇 번에 걸쳐 살펴본 것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오해함으로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데는 몇 가지 주된 이유가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 주된 이유로서 그들은 메시야는 ‘현실적인 구원자’라고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유대인들이 언제나 자랑하는 ‘다윗 왕’과 같이 칼과 창을 가지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적군을 무찌르고, 이방민족을 지배하는 군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뛰어난 현실적인 메시아를 그들은 요구했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그의 생명의 말씀과 여러가지 신적 능력으로 병자를 낫게 하고,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배고픈 자들을 배불리 먹이셨을 때, 유대백성들은 주님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메시지는 현실적 메시아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으면서 그들은 점점 더 실망하고, 결정적으로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의 사역은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것’임을 밝혀져 나갔을 때 유대인들은 주님을 등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8장>에 보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라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드러내 놓고 밝히셨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주님의 죽음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요, 죽음은 실패가 아니요 참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죽음을 통과한 다시 살아나실 부활로 말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 자신의 임박한 죽음과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그 외에도 <마태복음17:22-23; 20:18-19>, <누가복음 9:22>등 여러 복음서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며칠 남겨 두지 않은 어느날, 이렇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영적으로 잘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4~25)라고. 이 말씀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이지만, 또한 이 말씀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각자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도전의 말씀이기도 함을 깨닫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의 보배로운 피로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신 것과 같이, 우리 각자도 죽지 않는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죽음은 그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라고 했을 때와 같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원죄에 속한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죽음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났음에도, 여전히 죽지 못한 나의 자아와 고집과 높아진 마음과 육에 속한 모든 마음(속성/성품)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육에 속한 자아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고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의지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온 힘을 다해 죽이지 않으면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은 이런 여전히 ‘죄와 허물이 거하는 우리의 육신’을 가리켜 ‘썩어질 육체/육신’(고전.15:42-54)이라고 말했고, 그럼으로 바울 자신은 이 육신의 요구에 끌려 다니지 않고 육신의 욕망을 날마다 죽여 나갔음을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강력하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날마다 주의 성령으로써 내 안의 있는 육에 속한 몸의 행실을 죽이고 (롬. 8:13),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면 (마. 16:24-25)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뿐 아니라, 주께서 약속하신 것과 같이 수없이 많은 생명과 인격의 열매를 맺는 복된 삶을 누리게 됨을 ‘주님의 죽으심을 통과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부활’의 의미임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부활만이 <새 생명>을 얻게 함’을 뜻합니다: 우리가 앞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죄를 그 피의 공로로 대신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으심은 더 근원적으로 볼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의 아들 안에서 계획하신 택한 자를 구원 하심이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를 믿는 (택함 받은) 자들을 자신의 아들과 딸로 삼으심>이라고 그 뜻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는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그분의 <새 생명> 안에서 다시 살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저는 ‘C.S. 루이스’만큼 영적으로 잘 설명한 사람도 드물었다고 생각합니다.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이 <새 생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특별히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지막 ‘소주제’인 <새 사람> (the new man)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루이스’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자 하나님은 피조물을 아들로 삼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옛 인간보다 (더) 나은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그는 또한 이렇게 영적으로 설명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우리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조금 부가설명하자면, ‘C S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된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사람만을 ‘새 사람’이라고 부르는가?’가 핵심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명’만이 우리를 ‘새 사람’되게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헬라어로 <조에> (Zoe)라고 부르고, 반면 우리 모든 인간과 자연만물 속에 있는 생명은 헬라어로<바이오스> (Bios)로써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늙고 병들어 죽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순전한 기독교’에서 CS 루이스가 결론적으로 강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정체성은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런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곧 ‘조에’를 가지고 다시 태어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새 사람되고, 그 안에서 누리는 새 삶의 은혜와 특징’이 무엇인지를 잘 밝혀주는 말씀이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 말씀임을 저는 믿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라고. 이것이 예수의 영원한 생명을 입고, 완전히 변화된 존재로 살아가는 사도 바울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는 대표적 말씀이요, 그 아들의 새 생명을 입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과 저는 비로소 <그분의 생명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입양 (adapt)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고백할 수 있는 대표적 성경적 근거의 하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입고 새 사람이 된 거듭난 성도는 <에베소1장>에서 사도 바울이 밝힌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택하신’ 놀랍고 영광스러운 계획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구원받고, 그분의 아들과 딸의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와 영광은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거듭남의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교묘한 말 장난이나 단지 박식한 지식으로 이런 자녀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를 믿는 믿음으로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될 때 비로소 새 사람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새 사람의 은총을 날마다 누려 나가고 있습니까?

셋째, ‘부활은 메시아 사역의 완성을 확증함’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부활은 그분의 하나님께서 명하신 메시아로써의 모든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증명하고 확증하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부활’ 자체가 예수님의 사역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존 스토트’는 그의 책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점을 정확하게 분별하였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그 절정(크라이막스)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살을 찢으시고 보혈을 남김없이 흘리심으로 죽으시는 그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선언과 같이 “다 이루었다” (요. 19:30)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부활사건을 ‘우리를 위해 속죄하시는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모든 구속사역은 십자가 위에서 모두 성취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의 부활사건은 이토록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쁘고 승리의 사건이 되는 것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이 주의 부활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며,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속사역이 완성되었음을 확정>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고난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결코 숨기지 않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라고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드러내 놓고 밝히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임박한 주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요, 그리고 정확히 사흘만에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될 기적의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약의 여러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모든 메시아의 구속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함으로 거부(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삼고자 하심입니다. 사복음서에서 다양하게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 그의 시신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안치되고, 거대한 돌을 그 무덤 입구에 막았지만, 안식일 다음날 곧 주일에 막달라 마리아와 몇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고자 향품을 가지고 갔을 때, 그 돌문은 열려 있었고 무덤을 비어 있었고 그 무덤 옆에 있던 천사가 주님의 부활을 그녀들에게 알렸고, 그 놀라운 관경을 목격한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급히 고했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와 그 빈무덤을 보았을 때 주님을 싸 두었던 세마포는 놓여 있는 모습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의 상세한 기록은 우리 성도들의 굳건한 믿음과 유대인과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오실 메시아요,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권능으로 다시 살리심으로 이제 죄와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셨음을 영광스럽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를 실로 놀라게 하는 것은, 마음이 강팍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치 않는 대제사장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당시 돌무덤을 지켰던 군병이 큰 지진과 함께 주님의 부활된 권능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그들에게 전했을 때,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인 예수님을 잘못 오해했음을 깨닫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격한 로마 경비병에게 돈을 많이 주고 ‘자신들이 잘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시신을 훔쳐갔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28:11~15).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엇 때문에 많은 돈을 주겠습니까?! 제가 놀라는 것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부활의 진실을 목격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거짓으로 덮는다는 사악함입니다. 이것은 모르고 짓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부활의 부인할 수 없는 권능과 영광을 확인하면서도, 거부하고 구원을 조작하는 죄이기에 그 죄는 심히 무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의 부활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싸워 나갈 흔들림 없는 승리의 근거와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께서 이미 죄와 사망을 이기고 살아나셔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예수님과 승리가 확정된 싸움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부활의 중요성과 의미를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 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고전. 15:12~19)라고. 우리 크리스챤의 모든 믿음과 소망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에 있고, 그 대속 죽음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확고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 성도들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와 사망과 사단 마귀의 권세를 이기셨음을 확신합니다. 그 뿐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첫 열매가 되어 주와 함께 우리도 함께 살아날 산소망을 누리게 되었고, 승천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날마다 중보로 간구하심을 우리는 확신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주의 부활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구원과 하늘에 속한 모든 기업을 주실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주님의 부활사건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사망과 죽음을 향해 담대하게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하노니” (고진. 15:55~57)라고.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그의 새 생명 안에서 날마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을 십자가에 목 박는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이를 통해, 주의 영 성령 안에서 주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 생명과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 주의 제자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