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7, 2026

“아브라함의 믿음” (I)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4:1~3
Service Type:

“아브라함의 믿음” (I)

(The Faith of Abraham)

5-17-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4:1~3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오늘부터 <로마서4장>을 묵상하겠습니다. <로마서4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언약과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사도는 ‘우리의 화목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리게 될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를 <4장>을 통해 밝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인데, 한 사람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사도는 그 사실을 증명해 가는 것입니다.

먼저, 유대민족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배경에서 성장했는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 셈의 후손: 노아의 아들인 셈의 후예 (창. 11:10~27)
  • 살았던 지역: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 지역, ‘수메르 문명’의 중심도시, 달의 신 ‘난나’를 우상숭배) (창. 11:28)
  • 아버지 데라: 우상 숭배자, (행. 7:2~3) 가나안으로 출발했다가 하란에서 중도하차 (행. 7:2~4)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이렇게 명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1~2)라고 말입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갔고, 우리가 잘 아는데로 유대민족 뿐 아니라 우리 모든 크리스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롬. 4:11~12).

그렇다면, 사도는 <4장>에서 왜 아브라함을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본으로 소개하는 것일까요?그것은

         첫째,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 모두가 인정하는 ‘민족의 아버지(조상)’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그를 통해서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둘째, 행위로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1,2)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것이 없음을 주장합니다.

         셋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창세기 15:6>말씀을 인용하며 ‘어떻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선언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3)라고. 아브라함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바라기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수많은 믿음의 후손을 얻고, 복의 근원자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오늘부터 <로마서4장>을 묵상하겠습니다. <로마서4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언약과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과 <4장>말씀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한가지 질문합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이 질문은 다른 말로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로마서가 수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드러난 복음을 통해 ‘영적 각성과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도록 인도했음을 우리는 2천년 교회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요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의 은혜와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로마서 3장21절>을 통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 삼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음을 힘주어 선포하고 나서,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혜가 어떻게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고, 열매 맺을 수 있는지를 영적으로 설명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 각자가 그 복음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이 ‘믿음으로써’ 역사하는 구원의 은혜를 밝혀 나가며, ‘어떻게 우리 성도가 믿음으로 이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지?’를 <4장>에서 구체적으로 한사람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는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도가 믿음의 샘플로 여러분과 저에게 분명히 소개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출신과 성장배경은 어떠하며, 그의 믿음의 핵심은 무엇인지? 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통해 우리 각자가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결론적으로 묵상해 보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말씀은 <창세기 11장26절>입니다.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창. 11:26)라고. 여기서 <아브람>은 제가 <아브라함>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의 옛이름인 것입니다 (창. 17:5).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을, 하나님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원대하게 그 이름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이렇게 아브라함은 가장 먼저 <창세기 11장>에서 ‘셈의 후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나홀과 하란과 함께 아버지 데라의 맏아들로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창세기 12장>을 시작하며 <창세기 23장>에 이르기까지 본격적으로 성경은 <아브라함> 한사람을 집중해서 주목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12장>은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1~2)라고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하심은 단순히 한 명의 택한 자녀를 향한 구원의 은혜를 너머서서, 그 한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원대한 역사가 우리 인류 전체를 향해 구체적으로 시작되고, 그를 통해 천하만민이 축복을 누리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는 심히 중요한 성경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아브라함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사도행전 7장>에서 기독교 첫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가 그의 성령의 충만한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행. 7:2~4)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성장배경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얻게 되는데, 첫째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전에 ‘메소보다미아’ 곧 ‘갈대아 사람의 땅’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갈대아 우르> (창. 11:28,31; 15:7)라고 명명하는 것입니다. 이 <갈대아 우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번성하던 <수메르 문명>의 중심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이 지역은 고대 달의 신 ‘난나’를 섬기며, 극심한 우상숭배를 횡행했던 지역으로 유명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의 아버지 데라와 일가 친척들이 이 갈대아 우르 지방에 언제부터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우상숭배의 중심지에 점점 더 터를 박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말씀이 <여호수아서>인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수. 24:2,3)라고.

여기서 ‘여호수아’는 400년가 애굽에 종살이하던 이스라엘민족과 함께 다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며, 과거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편 갈대아 우르에 거하며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아마도 아버지 데라 뿐 아니라, 그의 자식이었던 아브라함조차도 그 지역에 성행했던 우상숭배에 사용되었던 우상을 만들며 살아갔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많은 인간사가 그러하듯,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브라함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한명인 셈의 후손이었지만, 이 악한 세상 속에서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과 뒤섞여 사는 가운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죄에 젖어 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나이 75세까지였으니, 인간적으로 본다면 이제 별 소망 없이 무탈하게 살다가 죽을 날 만을 준비할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느날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명하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을 삼고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한가지만 언급하고 싶은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창. 11장> 후반부에서 ‘데라의 후손’에 대해 성경은 기록하면서, 마지막 두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데라가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오세를 향유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 11:31~32)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데라가 그의 자손을 이끌고 그동안 터를 박고 살아가던 우상숭배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2장>에서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 명하시기 전에, 이미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성경은 더 구체적으로 ‘왜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났으며,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 데라에게 가나안 땅에 갈 것을 명령하셨을 것이다’라고 추정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은 아들 아브라함이 받았는데, 아브라함 때문에 데라도 함께 가나안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더 이상 그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창. 11:31~32>에서 볼 수 있듯이,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 <하란>이란 곳에 머물더니, 결국 그곳에 완전히 주저 앉아 죽을 때까지 두번 다시 가나안으로 떠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데라’의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은,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영적 삶을 매우 강하게 상징하기 때문인데, ‘우리 크리스챤이 세상 가운데 안주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청년시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가운데 신앙의 비젼과 목표를 품고 살아가다가, 나이가 먹고 사회생활 하면서 점점 세상과 동화되어, 젊은 시절 꿈꿨던 믿음의 목표와 소망은 사라지고, ‘하란’이라는 세상의 어느 한곳에 어정쩡하게 하차하여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라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타산지석’과 같은 영적 교훈이라 여겨집니다. 사실 <데라>라는 이름의 히브리 원어의 뜻은 ‘지체하다/ 머무르다’는 의미임을 볼 때, 제가 영적 교훈으로 데라의 삶을 ‘비젼을 향해 나아가다가 중도 하차하다’는 추측은 좀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건 데라는 가나안으로 향한 발걸음을 멈추고 중도에 ‘하란’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것이 <창. 12장5절>의 기록입니다. “아브람이 ~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창. 12:5)라고.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따라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도착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마침내’의 믿음이 있습니까? 가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착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 저는 남은 시간 큰 그림에서 ‘왜 사도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샘플로 소개하는지?’를 오늘 본문의 <4장>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미와 우리 각자에게 주는 도전과 적용할 점은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사도가 <4장>을 통해 사도는 왜 아브라함을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본으로 소개하는 것인지?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정통 유대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조상 중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본받고 싶어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대민족’의 조상이자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여러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이처럼 ‘아브라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유대인 모두가 인정하는 민족의 혈통적 그리고 믿음의 조상이기에,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을 예로 들고자 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유대인들이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유대인들의 신앙의 모순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은 조상 아브라함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문헌을 보게 되면, 바울시대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대다수의 유대교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누리고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그의 인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를 자신의 택한 민족 곧 ‘이스라엘’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맥아더’목사는 이런 유대교 랍비들의 주장에 대해 두가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첫번째는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는 의로움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요, 그리고 두번째는 ‘아직 하나님의 의로움의 기준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람이 그 기준을 지킬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해 랍비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뛰어난 직관과 영감으로 율법을 지키고, 양심으로 행동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객관적인 마음으로 창세기를 읽어 나간다면, 아브라함이 결코 완벽하지도 행위로 의로운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창세기> ‘12장과 20장’에서 두번씩이나 아내 사라가 뛰어난 미인임으로 혹시 그 나라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차지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입니다. 이것은 그냥 농담이나 대소롭게 넘어갈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아내 사라의 권유로 못이긴 척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 (갈. 4:23)을 보게 됩니다 (창. 16장). 이것은 결코 아브라함이 행위로 가장 뛰어난 삶을 살았음을 증명하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가감 없이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동시에 결코 놓치지 말아야 될 <아브라함>의 덕목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로마서 4장>에서 이것을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인품이 뛰어나고, 율법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이 자랑할 수 없다’라고 사도는 주장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두번째로 아브라함을 소개하는 이유입니다.

         둘째, 행위로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브라함’의 삶을 앞에서 처음 소개하며, 나누었던 <창. 11장> 끝절부터 <창. 23장>에 이르는 말씀에서 이 한사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많은 유대인 랍비들이 믿듯이 그가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행위에 있어서 완벽하고,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정직히 아브라함의 삶을 묵상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한 것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정확히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일 것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1,2)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아브라함이 자랑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그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신앙의 핵심을 설명하면서 또 한명의 유대민족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는 그들의 조상을 예로 듭니다. 그는 다윗 왕인데, 다윗은 자신의 죄와 허물이 씻겨지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은 자신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 때문이라고 시편에서 고백했는데, 사도는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롬. 4:6~8)라고 말입니다. 내가 일을 하고 보수을 받으면, 그것은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일하지 않았는데 보수를 받으면 그것을 은혜로 여기듯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라 기뻐해 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은 자신이 율법을 완벽하게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아니했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유대인의 대표적인 신앙의 선조를 예를 들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님으로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사도가 아브라함을 통해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셋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사도가 아브라함을 우리 성도들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로 든 마지막 세번째 이유를 나누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앞서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며, “여러분들은 어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이 질문에 대해 여러분 각자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기 원합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 각자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에 대해서는 다 들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여러분이 믿는 그 하나님에 대한 그 믿음의 내용과 깊이만큼이 여러분의 믿음의 현주소’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처음 아포슬교회 청년사역을 시작하며, 아니 제가 청년시절 여러분과 같은 때부터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를 고민하고, 한명의 주의 제자로써 고민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제가 진정으로 믿음에 대해 내린 결론은 <믿음은 맹신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덮어 놓고 믿는 맹신은 말할 것도 없이 위험하며, 모든 사이비 이단의 근거가 이 맹신에 뿌리를 박고 있음을 저는 그동안 여러 번 여러분과 나누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은 나의 신념도 아니요, 나의 철학이나 바라는 바도 아니며, 내가 나를 설득하는 작업이 믿음이 아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믿음일까요?

이것이 사도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샘플로 우리에게 소개하는 핵심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3)라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저는 로마서 전체에서 무엇이 믿음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정의한 것이 비로 이 본문 <롬. 4:3>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어디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도가 <창. 15:6>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라고. 이 본문은 몇 주전에 제가 잠깐 언급한 바 있는데, 하나님께서 <창.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의 근원자로 삼으심으로 가나안 땅에 가게 하시고, 약속의 아들을 약속하셨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에게 자식을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어느날 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는 밤에 찾아오셔서, 텐트 밖으로 그를 이끌어 내시고 이렇게 다시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고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늘의 뭇별과 같이,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같이 수많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이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창. 12장>에서 그를 처음 부르실 때 하신 약속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반응입니다. 그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기록한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그 근거는 그가 훌륭한 인품을 가졌고,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사도는 말씀을 통해 밝히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성도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무턱대고 믿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정말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말씀을 상고함으로 영적으로 분별해가는 지혜로운 베뢰아 성도와 같은 믿음인가?”하는 것입니다. 또한 ‘상황과 조건과 형편을 넘어서서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과 크신 권능을 신뢰하며, 그분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런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이 우리 안에 있는지를 묻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어떻게 우리 각자에게 그 믿음을 적용할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선지자 미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6~8)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하면,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과 지식과 실천력과 그 어떤 행위가 아니라, 오직 겸손과 사랑 가운데 역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과 같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그의 자녀가 누리는 권세와 약속하신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