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새로운 것으로” (In The Newness of Spirit)
“영의 새로운 것으로”
(In The Newness of Spirit)
9-13-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7:6~7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에서부터 <로마서7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먼저 7장을 본격적으로 살펴봄에 있어서, <7장의 구조>는 3단락으로 구분됩니다.
- 첫 단란 (1~6절):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
- 둘째 단락 (7~13절): ‘율법이 선함을 옹호’
- 셋째 단락 (14~25절): ‘둘째 단락, 곧 <율법이 선하다>는 것에 대한 체험적인 고백’
그리고 지난 주, ‘7장 1~4절’을 중심으로 나눠본 것처럼, 사도는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롬.7:4)는 것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 ‘과거 율법이 우리 인간의 주인 (남편)으로 행사해 오던 영향력’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율법의 강력한 영향력’이 ‘그리스도께로 이양’된 것일까요? 왜냐하면,
1)‘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하고자 함이요
2) 그럼으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 입니다 (롬.3:20)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까요? 그것은 그동안 <로마서5~6장>을 통해 살펴본데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로마서3장>에서 ‘율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나타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를 이루시는 역사를 선언한 것입니다 (롬. 3:21-22).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함으로 율법에서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롬. 7:6). 에스겔이 예언한 것처럼 ‘하나님의 새 영을 통해 새 마음을 받아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겔. 36:26,27).
바라기는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나의 참주인으로 모심으로 성령의 능하심으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고, 우리의 행위로는 불가능한 율법을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써 서로를 섬겨 나가는 가운데 완성해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로마서7장>을 시작하며, 큰 그림에서 살펴보았습니다. 7장의 중심주제는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이며, ‘6장’과 더불어 하나의 <삽입장역할>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7장이 로마서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사도가 이미 밝힌 바 있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 더 나아가 ‘율법을 통해 죄를 심히 죄 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로마서’ 뿐 아니라, 신.구약성경 전체에서 이 ‘7장’만큼 그 깊은 영적 통찰력을 통해 조명해 주는 말씀도 더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진 이유’ 그리고 ‘이제 우리 믿는 자는 율법에서 벗어남으로 율법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하는 것을 함께 묵상하고 깨닫아가는 시간되길 바랍니다.
먼저 제가 여러분과 함께 사도가 ‘왜 7장에서 율법에 대해 언급하는지?’를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율법을 주셨는지?’를 이미 로마서 앞부분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 이유, 곧 ‘율법의 기능’은, 첫째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고자 함’이요, 둘째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고자 (롬. 3:20)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여기 <7장>을 통해 다시 율법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 사도는 특별히 우리 구원받은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를 종합적 (결론적)으로 밝힘으로써, 우리가 율법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가치’는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밝히고자 하는 “우리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 단락은 <1~6절>로써 소주제가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이며, 둘째 단락은 <7~13절(13절은 요약)>이고 ‘율법이 선함을 옹호’하고 있으며, 마지막 셋째 단락은 <14~끝절 25절>이며 ‘둘째 단락, 곧 <율법이 선하다>는 것에 대한 체험적인 고백’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시간, 7장을 시작하며 살펴본 것처럼 <1~4절>말씀은 앞선 단락의 분류에서 본다면, ‘첫번째 단락’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첫번째 단락에서 사도는 ‘우리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존재로써 율법과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5~6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 우리 성도의 존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함께 확인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7장>을 시작하면서, 이와 같이 ‘우리 성도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율법과의 관계>에서 영적으로 밝혀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도는 실제적인 우리 성도의 영적 변화의 핵심은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밝힌 것처럼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롬.7:4)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가 7장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우리 변화된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라는 영적 사실을 분명히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사도는 <2~3절>에서 <결혼관계>를 통해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한 여인이 결혼하게 될 때 남편에게 법적으로 매인 바 되듯이, 우리 인간은 율법에 매인 바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남편이 죽으면 결혼의 법에서 자유하게 되듯이, 우리 성도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게 될 때, 우리는 과거 우리를 지배하던 율법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 매인 바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성도는 과거 우리를 결혼한 여인의 남편과 같이 지배하던 율법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새롭게 신랑으로 모시고 그분과의 연합을 통해 그분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여기서 ‘율법에서 죽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지난 시간 이점을 결론적으로 잠깐 언급했는데, 우리 성도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말의 의미는 ‘죄’는 그야말로 ‘우리 인간을 하나님과 단절시키고, 죽음을 가져오게 하는 우리의 원수요, 암적 존재’이기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될 때,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 성도는 ‘죄와는 무관한 존재가 되었고,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 (=자유케 되었다)’는 것은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율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산다거나, 마치 우리 성도가 죄를 대하듯 율법에 대해서도 원수처럼 대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단지 분명하게 우리가 명심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율법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의 차이점은 <어떻게 율법이 우리 성도에게 영향력을 미치는가?>하는 차이입니다. 이 차이는 과거에는 ‘율법이 우리 인간의 주인이 되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다’면, 이제(현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심으로 우리 성도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바로 ‘과거 율법이 한 여인의 남편처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방식에서,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남편으로써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과거 율법이 우리 인간의 주인으로 행사해 오던 영향력’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양 (hand over/transfer) 되었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 사도가 <7장4절>에서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v.4)라고.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음을 당한 것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 (율법에 대해 죽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성도는 율법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율법과의 관계를 통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v.6)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율법’을 ‘의문의 묵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의문의 묵은 것’을 <우리말성경>에서는 ‘문자의 해묵은 것’ (In the old way of the written code)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문자의 해묵은 것을 섬길 것’이 아니고, ‘영의 새로운 것’ (In the newness of spirit/ In the new way of the Spirit)으로 섬긴다고 말합니다. 저는 아마도 사도 바울이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충만한 영을 통해 장차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의 마음 가운데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약속하신 ‘새 영’을 주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라고.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속죄하여 주실 때, 하나님은 그분을 영, 곧 ‘새 영’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의 육신에 속한 굳은 마음을 제하여 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고, 규례를 지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 영을 통해 율법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온전히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인 율법을 기쁨과 단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일부 율법주의자들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비난하며, ‘그의 가르침은 ‘율법폐지론’ (=안티노미아니즘) 혹은 ‘무율법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주장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영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도리어 과거 ‘율법을 주인으로 모셨음에도 결코 온전히 지킬 수 없었던 삶’에서, 이제 ‘새로운 영을 통해 온전히 율법을 지키는 삶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복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성도의 역설적인 삶>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주인인 율법주의에서 죽고, 그리스도가 주인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온전히 율법을 완성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7절>말씀을 이어갑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v.7)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7장을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단락은 ‘1~6절’ 그리고 둘째 단락은 ‘7~13절’, 마지막 단락은 ‘14~끝절’까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으로 오늘 말씀인 ‘6,7절’은 이런 구분에서 보자면, 6절은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라는 소주제를 가진 첫 단락의 마지막 구절이고, 7절은 ‘율법이 선함을 옹호’하는 사도의 주장인 두번째 단락의 시작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는 갑자기 여기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일까요?’ “율법이 죄냐?” (v. 7a)고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하고, 또한 스스로 대답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v. 7b)라고 말입니다. 사도는 율법은 결코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가 “율법이 죄냐?” (v. 7a)라고 질문하는 이유는, 사도 자신이 그동안 ‘율법을 묘사하면서, 부정적으로 성도들이 인식하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이 아니었을까?’하고 저는 추측합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가 <6장>에서 “(우리가) 죄에 거하겠느냐”고 질문 하고서는, “결코 그렇수 없느니라” (6:1,15)고 대답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율법이 죄냐’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사도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결코 아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선한 것이요,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법인 것입니다. 율법은 결코 악한 것도, 죄도 아닌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식별함으로 그 죄의 길에 빠지지 않도록 허락하신 <영적 나침반>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이 선하고 거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기에, 율법의 원칙은, 오직 그 율법을 지킴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며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신. 28:15)라고 선언하십니다. 율법의 원칙은 ‘모든 율법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야만 구원을 받고,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야고보>는 ‘율법의 요구’를 이렇게 잘 요약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 2:10)라고. 무슨 말입니까? ‘율법은 99%가 아니라, 단 1%라도 지키지 못하면 율법을 범한 것이요, 따라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여러분 중에는 ‘맞아요! 율법은 너무 까다롭고, 너무 엄중해요!’라고 얘기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율법이 이런 의견처럼 너무 까다롭고, 엄격한 것이 문제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언젠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 안에서 영원토록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율법에서 우리에게 명한 것이 너무 엄격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구원받은 천국시민은 하나님의 빛된 자녀로써, 지극히 당연하게 천국시민의 법을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문제는 우리 인간은 그 선한 율법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이 선한 율법을 결코 온전히 다 지킬 수 없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살펴보게 될 7장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율법을 그대로 지키지 못하고, 도리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기회를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는 이 안타까운 결과만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진정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결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자녀들에게 이루게 하실 진정한 능력과 승리를 이렇게 예언했던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6)고 말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세상의 악한 영들과 죄의 강력한 힘을 이길수 없고, 선한 율법의 요구를 다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주의 영,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죄를 이기고 율법의 요구를 이룰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가 <로마서 3장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고 선언하고 나서, 다음 절 <롬. 3장21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3:21)라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선하고 신령하지만, 우리가 연약함으로 그 온전한 율법의 요구를 모두 행할 수 없음을 하나님은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인간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길, 곧 ‘하나님의 한 의’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하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셨기에, 이제 누구든지 그분을 믿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선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행위로 만족시킬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위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이며, 이와 같은 ‘율법 외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한 의’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율법에서 자유케 되었습니까?’ 과거처럼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율법에서 벗어났습니까? 만약 율법에서 자유케 되었다면 어떻게 자유합니까? 마치 ‘율법폐지론자’나 ‘무율법주의자’들처럼 율법을 무시하거나, 내 하고 싶은데로 죄 지으며 사는 것을 ‘율법에 대해 자유하게 되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밝히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방종이요, 죄가 왕 노릇하는 어리석고 불행한 삶인 것입니다. 사도가 밝히는 ‘율법에서 자유한 삶’은 ‘더 이상 율법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에서 죽음으로,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그분을 나의 주인이자 영적 남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법, 곧 ‘사랑의 법’을 행해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선한 율법을 온전히 성취시켜 나갈 것’입니다. 사도가 <로마서10장>에서 선언하듯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 (love is the fulfilling of the law) (롬. 13:10)입니다. 더 이상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현대판 바리새인, 곧 ‘율법주의자’의 굴레 (모순)에 빠지지 않고,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 분만이 주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사랑 가운데 함께 서로를 섬겨 나감으로써 선한 율법을 성취시켜 나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