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2, 2017

“성령이 친히” (2)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8:16~18
Service Type:

성령이 친히” (2)

(The Spirit Himself)

10-22-17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8:16~18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The Spirit Himself testifie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God’s children)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것 이니라 (Now if we are children, then we are heirs – heirs of God and co-heirs with Christ, if indeed we share in His sufferings in order that we may also share in His glory)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도다 (I consider that our present sufferings are not worth comparing with the glory that will be revealed in us)

<론>

저는 지난시간, 성도 여러분과 함께 ‘성령이 친히’ 라는 제목으로 우리 크리스챤의 진정한 승리와 열매맺는 삶은 나 자신의 어떤 투철한 노력이나 실천력에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 안에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우리 크리스찬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성령님에 대해 <롬. 8:16> 을 중심으로 다시한번 살펴 봄으로서 더욱 성령님을 깊이 깨닫고 그분을 신뢰해 갈수 있기를 소원 합니다. 언젠가 여러분과 제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실수 있는 축복된 삶 사시길 간절히 소원 합니다.

<론>

여러분은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정권에 의해 투옥되고 순교한 ‘디틀리히 본훼퍼’ 목사를 잘 아실것 입니다. 그는 1944년 7월, 베를린 군사 형무소에서 작성한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 하나님!

본훼퍼의 ‘나는 누구인가?’ 라는 글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고난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눈뜨게 합니다. 그리고, 이 고난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을 통해 우리 영으로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승리할수 없고, 열매맺는 삶을 살수 없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본훼퍼, 주기철 목사님 뿐 아니라, 믿음의 순결을 지키고 승리한 수많은 성도들의 삶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고, 지금 우리에게 격려하고 도전하고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지난시간, <로마서 8:14~15> 의 각각의 절에서 사도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우리 크리스찬의 영적 상태가 다르다는 점을 말씀 드렸습니다. <14절> 의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4) 는 진술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여 거듭나게 되는 상태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크리스챤도 ‘14절’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거듭나게 된자는 한명도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은 반드시 14절의 ‘성령님의 인도를 받았다’ 는 뜻 입니다. 그러나, <15절 & 16절> 은 단순한 <14절> 에 대한 설명이나 강조점이 아니라, 거기에서 더욱 나아가고 영적으로 전진한 상태라는 사실임을 우리는 이해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무엇 입니까? 먼저 ‘15절’ 은 우리가 단순히 영적으로 거듭났을뿐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어진 상태’ 라는 것 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 입니까? 이말은 <내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 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확신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가 있다> 는 뜻 입니다. 다시말씀 드리지만, 어느 누구도 성령님이 아니고는 결코 ‘구원 받을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없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확신하지 못할수 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구원받은 자들의 문제 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주에 진정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우리 크리스챤의 심각한 문제는 성령님에 대해서 무지할때 언제나 발생하게 된다’ 는 점 입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여러분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자신의 영광된 신분을 깨닫을수 없고, 진정으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살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 입니다. 이말은 <15 & 16절> 에서 성령님은 <14절> 에서와 같이 거듭난 성도들의 삶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지만, 차이점은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의 자발적인 그분께 대한 신뢰와 순종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 입니다. <15절> 에서 우리가 성령님을 신뢰하고 순종할때 나는 그분을 통해 ‘양자의 영’ 을 받게 되는 것 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진정으로 고백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16절> 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 라는 확신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지에 대한 의심할수 없는 확신과 증거를 성령께서 주신다’ 는 뜻 입니다. <16절> 은 <15절> 을 단순히 설명하거나 반복한 것이 아니라, 더욱 나아 간 것 입니다. 15절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자녀됨의 확신과 사랑을 성령께서 도우신 것’이라면, 16절은 ‘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 대한 그분의 반응을 성령께서 증거하신다는 것’ 입니다. 그러기에, 이 <롬. 8:16절> 은 우리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챤의 삶의 있어서는 가장 영광스럽고 최상의 영적 상태라고 ‘로이드 존스’ 는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지적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말씀 드리면, 성도 여러분 중에 혹시 ‘목사님, 물론 지금 언급하신 최상의 크리스찬의 영적 상태가 무척 훌륭하긴 하지만, 아직 제가 실천하기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라고 말 하실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 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역설적으로 말해서 <왜 우리 크리스챤들이 힘없는 신앙생활, 열매없는 신앙생활 하는가?!> 라는 질문에 가장 핵심적인 대답은 바로 <내가 어떤 신분의 존재인지를 아직까지 영적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저는 여러번 강조해서 지적 했습니다. 내가 의지가 약해서나, 실천력이 부족해서, 세상에 쉽게 유혹 받기 때문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이 <롬. 8:14> 에서 거듭난 모든 성도는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고 했지만, <15 &16절> 에서 모든 거듭난 자가 ‘성령으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았다거나, 우리 영으로부터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 를 모두 받은 것이 아니다고 선포한 사실이 여러분과 저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반대로, 사도바울이 <15, 16절> 에서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상세하고 훌륭한 설명을 하는 것은 우리가 거듭난 성도로서 승리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성령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 을 통해 ‘양자의 영’ 을 받고 더 나아가 ‘내가 자녀임을 증거’ 하시는 증거를 성령을 통해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결코 ‘선택사항’ (옵션) 이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령의 이런 은혜를 누리지 못할때, 여러분은 ‘여전히 불안과 불확신 가운데 불행한 성도의 삶’ 을 살게 될것 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구원받음) 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사실 여러분이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 조차도 알수 없다는 것’ 에 있습니다. 제가 오늘 또 다시, <로마서 8:16절>을 통해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성도의 가장 영광스런 삶을 나누기 원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은 무엇이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그의 자녀에게 얼마나 놀라운 권세와 영광스러운 삶을 허락 하셨는가를 우리는 반드시 깨닫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우리는 성령의 증거를 받을수 있는지?’ (How are we able to get the testifies of the Holy Spirit?) 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째, ‘성령님의 존재에 대해 영적 깨닫음이 깊어져야’ (We should realize deeply the attributes of the Spirit): “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하시라라” (. 16:7,8)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16:13)

성령님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분은 천지가 창조 될 첫 시작에서 부터, 하나님의 영으로서 수면에 운행하시며 모든 존재하는 것을 창조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오늘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구원받은 자의 첫 출발인 ‘거듭난 삶’ 을 가능하도록 역사 하시는 것 입니다 (“ ~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수 없느니라”/ 요. 3:5).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뿐 아니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요. 16:8~11) 하십니다. 한마디로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 (요. 16:13~15) 입니다. 이런 거룩하고 진리되신 성령님께 대한 여러분의 깨닫음이 있습니까?

‘내가 철든 자녀가 되어간다’ 는 뜻은 ‘내가 점점 더 나를 나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해 간다’ 는 뜻일 것 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철든 자녀로 살아가기 시작 할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그 깊은 뜻 까지도 감찰 하시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존재에 대한 깨닫음이 깊어질때 우리는 성령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그 신뢰를 기초로 한 그분의 도우심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비로소 알아가기 시작하는 그분의 철든 그분의 자녀가 되어갈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선하신 성령님을 더욱 말씀과 기도와 묵상 가운데 깨닫아 나가고 있습니까?

둘째, ‘성령을 신뢰하고 사모해야’ (We should trust and be longing for Him):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영혼이 하나님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 42:1,2)

제가 여기서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내가 성삼위의 3번째 위격에 해당하는 거룩한 성령님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지만, <잘못된 관점으로 성령님을 대하고자 하는 태도> 는 매우 위험함을 우리가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는 점 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소위 ‘성령파’ 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령님을 마치 자신들이 주거나 받을수 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매우 비성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봅니다. ‘성령을 받아라!’ 라든지 ‘믿음으로 성령을 취하라!’ 는 식의 말들에서 이들의 성령에 대한 이해가 어떠 한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핵심은 이런 과점에서 성령을 대하는 자들은 성령을 인격체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입니다. 더더욱 이들은 성령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이 잘못 이해되고, 성령의 이름으로 엉뚱한 일들이 벌어져 왔는지, 수없이 많은 이단들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알수 있는 이유의 하나일 것 입니다. 성령님은 내가 마음대로 취하는 어떤 단순한 ‘파우워’나 ‘기운’ 이 아닙니다. ‘성령 받아라’ 고 감히 누구도 소리칠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약속하신 불의 혀같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이후, 2000년 교회역사를 통해서 성령님의 임하시는 역사는 우리 성도들이 ‘믿음으로 취한 것’ 이 아니라,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간절히 사모함으로 기다림’ 을 통해서 역사 하셨습니다. 다시말해, ‘성령의 세례’ 는 내가 그 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그 때를 결정’ 하시는 것 입니다. 내가 하는 것은 ‘그분의 인치심’ 을 인격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간절함으로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선하신 성령님을 신뢰하고 간절함으로 그분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함이 있습니까?

셋째, ‘성령께서 나를 다스리도록 결정해야’ (We should voluntarily decide let the Spirit lead me):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14: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5:16,17)

본문 16절의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도움’ 을 청교도로서 위대한 성도의 삶을 살았던 ‘토마스 굿윈’ (Thoman Goodwin) 은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아빠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아빠는 어린 아이의 손목을 잡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이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인 것을 압니다. 또 자기의 아버지가 자가를 사랑하는 줄을 압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멈춰서 그 어린아이를 들어올려 자기 팔로 껴안고 그에게 입맞추고 그를 얼러 줍니다. 그 다음에 그 아버지가 아들을 내려 놓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 합니다. 그 소년은 아버지로 부터 포옹을 받기 전이나 후나 똑같은 그의 아들 입니다. 그것이 그 아들의 신분을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에 있어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토마스 굿윈’ 은 <성도인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는 성령의 도우심> 이 무엇인지를 ‘사랑하시는 그의 자녀를 그 두팔로 번쩍 들어 올려 기뻐할뿐 아니라, 그의 가슴으로 마음껏 품어주는 아버지’ 의 모습으로 설명 드렸습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왜 <롬. 8:16절> 이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높은 경지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이 무엇 입니까? 그것은 <14절> 이 ‘성령을 통해서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 을, <15절> 이 ‘성령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사랑할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을 설명한다면, 이제 <16절> 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그분을 사랑함에 대해 아버지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지를 성령께서 증거해 주신다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단순히 깨닫거나,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사랑함으로 고백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내가 하나님을 사랑 함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시고, 증명해 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16절> 에서 사도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 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나의 사랑에 대해 아버지께서 지극한 기쁨과 사랑으로 보여 주시는 증거’ 를 받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축복된 것은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나를 심히 기뻐하시며, 사랑에 겨워 그 가슴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증거를 받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영광된 성도의 삶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 증거를 주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사도바울은 주장하는 것 입니다.

이제 제가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강조하기 원하는 것은 우리 거듭난 성도들이 성령의 증거(세례) 을 받는 것은 한편에서는 ‘수동적’ (성령님의 주체성, 그분의 임하심의 주도성의 관점에서) 이라고 말씀 드렸지만, 그렇다고 ‘나는 아무것도 않하고 그저 기다린다’ 든지 ‘자동적으로 그분이 하도록 비인격적으로 나를 내맡긴다’ 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반대로, 성령님은 우리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간절한) 그분에 대한 반응을 기뻐 하십니다. 우리 성도가 성령께 대한 관계는 ‘로봇처럼 비인격적으로 끌려가는 존재’ 가 결코 아니라, ‘지정의를 통한 전인격적으로 성령님께 반응하고 자발적인 의지로 결정함을 통해 인격적 관계’ 로 그분께 나아가는 관계인 것 입니다. 나의 의지와 인격적 결단을 통해 나는 성령을 좇아 행하길 결단 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분께 순종함으로 내 안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도록 결심하고 날마다 행함으로 나아가는 것 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성령하나님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자발적인 성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원하시는 것 입니다. 그 선하심과 긍휼하심과 의로우심을 믿음으로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이것을 깨닫을때, 우리는 그분의 철든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그 기쁘신 뜻데로 살고자 소원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그의 자녀’ 로 살고자 결심하게 되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머리로만이 아니라, 날마다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함으로 그분께 순종하고, 행함으로 성령의 열매를 지금 맺어 나가고 있습니까?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의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다스림 가운데 신뢰와 순종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를 성령으로 부터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성령이 누구신지?’를 날마다 성경말씀과 기도와 묵상 가운데 날마다 깨닫아 나가야 할것 입니다. 그리고, 깨닫은 만큼 그분을 신뢰하고 인내함으로 선하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 하십시요. 성령님은 자신을 신뢰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영혼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충만한 폭포수와 같은 은혜로 갈급한 영혼위에 임하실것 입니다. 간구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실 것 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나를 다스려 주실것을 인격적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가운데 결단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좇아 살아갈때 성령님은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서도 우리 주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열매를 끊임 없게 맺게 하여 주실것 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어떤 고난도 능히 이기고 승리하게 하실 것 입니다. 이런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령의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가 모두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