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9, 2017

“아름다운 발이여” (How beautiful are the feet!)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10:13~15
Service Type:

아름다운 발이여”

(How beautiful are the feet!)

10-29-17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0:13~15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For whosoever shall upon the name of the Lord shall be saved)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How then shall they call on Him in whom they have not believed? And how shall they believe in Him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shall they hear without a preacher?)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 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같으니라 (And how shall they preach, except they b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em that preach the gospel of peace, and bring glad tidings of good things!)

<론>

저는 몇주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의 한명이었던 ‘사무엘 무어’ 라는 선교사의 삶에 대해서 소개한 특집을 본적이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없이 힘들게 살아가던 조선땅에 복음을 들고 와서 그의 삶을 바쳐 그 복음을 씨앗을 뿌렸던 ‘사무엘 무어’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저는 오늘 말씀과 함께 살펴 봄으로서 성도 여러분의 삶에서도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아름다운 발’ 의 삶을 사시길 소원 합니다.

<론>

‘사무엘 무어’ 선교사님은 아펠젤러나 언더우더 선교사와 같이 조선말에 최초로 기독교신앙을 한반도에 전하신 선교사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의 우리나라 이름은 ‘모삼열’ 이었는데, 그분의 한국에서 지낸 기간은 10여년 정도었지만 한국 교회에 남긴 그의 영향은 지대 했습니다. 그는 청년시절 D. L. 무디선생의 ‘영적 부흥운동’ 에 깊이 영향을 받고 선교사가 되고자 결단 합니다. 무어선교사가 처음 조선에 들어온것은 1892년이었고, 그가 처음 시작한 곤당골 교회는 몇년후 1898년에 ‘중앙교회’ 라고 이름이 바뀌는데,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의 하나인 ‘승동교회’ 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그 당시 총출석 교인이 100여명인 가운데 조선말에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던 백정이 무려 30명식이나 나와서 ‘백정교회’ 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무어전도사는 구한말의 신분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을 펼친 선각자 였습니다. 이런 조선백성을 위한 신분의 악습을 폐지하는데 그가 앞장서게 된것은 곤당골 교회에 처음출석한 ‘봉줄이’ 라는 아이가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백정 ‘박씨’ (그당시 백정은 성만 있고, 이름은 없었음) 었는데, 어느날 그가 장티부스가 걸려서 거의 죽게 되었을때 그 소식을 들은 무어가 친구 의료선교사 ‘에이비슨’ (그는 고종의 주치의였고, ‘세브란스의대’의 전신인 ‘제중원 의학원’ 을 설립했음) 에게 부탁해서 그를 살린 것이 인연이 된것 입니다. 그 백정 박씨는 그 이후 교회에 착실학게 출석하게 되었고, 그의 동료 백정들을 함께 그 교회에 데려 왔습니다. 그는 ‘박성춘’ (朴成春) (내 인생의 봄을 맞았다) 이라는 이름을 무어 선교사로 부터 받고, 나중에 그 교회의 최초의 장로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봉줄이도 ‘박서양’ 이란 이름을 갖고, 그 이후에 ‘에이비슨’ 선교사가 설립한 ‘제중원 의학원’ 에서 의학대학의 1회 졸업생이 되고, 그 대학의대 교수가 되고, 일제시대때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의술로 도우며 (1918년)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 했습니다. 무어선교사는 천민들과 함께 지내다가 결국 장티푸스에 걸려 1892년 (32세) 에 조선에 처음 입국한 이후 14년이 지난 1906년에 조선땅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오늘 사도바울의 로마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듣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서양의 선교사들, 언더우더, 아펜젤러와 제가 말씀드린 사무엘 무어와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복음의 씨앗으로 인해 여러분과 제가 그 복음의 빛을 보게 되었고, 그 생명의 열매를 누리게 된 것 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은 내가 믿음이 좋아서라든가, 우리 집안이 신앙이 좋은 집안이라서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역사를 모르는 어리석은 말 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우리들에게 선포하는 것은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들고 수만리 먼 땅에 그 씨앗을 뿌린 아름다운 발이 있었기 때문에 생명으로 열매맺는 여러분과 저의 믿음은 가능했다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때만이 구원이 있음’ 을 <13절> 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로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다’ (V.13) 는 것 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구원의 길과 진리를 선언하는데 끝내지 않고, 그 ‘구원의 기쁜 소식’ 이 어떻게 나에게 전해질수 있었는가? 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한단계 나아간 질문을 합니다. 그는 오늘 본문 <13~15절> 에서 ‘여러분과 제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이 복된 삶이 주어진 것이 단순히 내가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된것이 아니다’ 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 입니까? 사도바울은 이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가 즐겨 사용하는 <결론을 선포하고 나서, 한단계 한단계 거꾸로 거슬러 올라 감으로서 결론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역추적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어떻게 나의 구원은 이루어지는가?” (How is my salvation completed?”;

첫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To call upon the name of the Lord by the faith); 가능하게 되었다고 지적 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겠느냐? 어떻게 그의 이름을 외치겠느냐?’ (v. 14a) 는 것 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이미 <13절>에서 선언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할수 있었겠느냐? 에 대한 답변인 것 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는 것은 무슨 뜻 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간절히 부르고, 그분께 간구하고, 그분께 나아간다’ 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에 이르게 위해서 첫걸음은 오직 ‘믿음’ 을 통하여 가능 하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기 때문’ (롬. 1:17) 이요, 믿음이 아니고는 ‘나사렛 예수를 나의 주’ 라고 고백할수 없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첫 걸음은 믿음을 통해서 주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둘째,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들음으로’ (To hear the good news by open heart); 가능 했다는 것 입니다. 바로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v. 14b) 라는 것 입니다.그리고,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 입니다. 비록,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이 그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지만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편견과 닫혀진 마음 때문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마. 11:15) 라고 도전하시는 것 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열려 있지 않으면 우리는 진리의 복음을 깨닫을수 없고 영접할수 없기 때문 입니다. 만약, 우리가 깨끗하고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때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10:17) 고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다음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믿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게 되었는가? 를 논리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은 ‘듣음에서 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 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때가 이르든지 이르지 않든지 말씀을 들고 나아가 말씀을 들려주는 이유인 것 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서,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를수 있도록 말 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 입니까”

셋째, 복음 전도자의 아름다운 ’ (To deliver the good news by preachers’ beautiful feet); 그렇게 된 것 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듣겠느냐?!” (v. 14c) 는 것 입니다. 그는 먼저 ‘우리의 구원이 믿음을 통해 주어짐’ (13) 을 전제하고 나서, 그것이 가능하게 된 ‘실제적인 근거’ (back-ground) 가 무엇인지를 <15절> 에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설명하는 것 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누리는 이 축복된 삶은 ‘그 누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아니 모든 생명의 위협과 환란을 무릅쓰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쁜소식을 전하고자 달려온 전도자들의 아름다운 발이 있었기 때문’ (V.15) 이라는 것 입니다. 그는 이 말을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 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 52:7) 라고 이사야는 선포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52:7> 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선언한 ‘좋은 소식’은 무엇이었으며, 그 소식을 전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그 좋은 소식은 1차적으로 <오랜기간동안 이스라엘 민족들을 괴롭혔던 애굽, 앗시리아 그리고 바벨론이라는 강대국들의 멸망의 소식> 인것 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바벨론’ 으로 상징되는 모든 세상강대국들과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영 사단마귀의 멸망소식을 이렇게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른 천사 둘째가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 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4:8) 라고. 이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하는 세상제국이고, 결국 이 세력은 그 배후에 있는 사단마귀의 권세임을 우리는 이해 합니다. 따라서, 이 기쁜소식은 악한 세상 제국과 그를 주관하는 사단마귀의 영원한 심판과 멸망으로 인해서 이사야가 선포하듯이 궁극적인 “ 하나님이 통치 하신다” (Your God reigns!) (. 52:7b) 는 사실 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세상의 위정자들과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홀로 통치하신다’ 는 사실이 진정으로 기쁘고 기쁜 소식인 것 입니다. 그것을 누가 전합니까? 그 당시 전쟁이 벌어졌을때, 전쟁의 상황을 전하는 자는 전령병’ (messenger) 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라톤의 유래도 ‘한 그리스의 전령병이었던 ‘필리피데스’ 가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42km의 장거리를 쉬지 않고 온힘을 다해 달려와 전하고는 숨진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것’ 임을 우리가 잘 알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서 52장> 와 오늘 본문의 <로마서 10장> 에서 나타내는 ‘전령병’은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이사야서 6장> 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6:8) 라고 물으실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 ~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도다)” (. 9:37) 라고 탄식하실때, ‘주여 저를 보내소서’ 라고 충성과 믿음으로 주님의 기쁨소식을 들고 나아가기를, 하나님의 통치 하심을 만방에 선포하고자 하는 자들이 바로 <영적 전령병> 이 될것 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전령병의 마음을 가졌습니까?

넷째,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음으로’ (To be sent by God); 우리의 구원은 가능하게 된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이런 영광된 삶을 가져오게 되는 원인을 살펴봄에 있에서 한가지 빠트리지 말아야 할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 이 어떻게 되어질수 있었겠는가? 하는 마지막 질문 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놓치지 않고 <15절> 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 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부름으로 구원받는 은혜가 우리에게 기쁜소식을 들고 온 전도자의 발’ 때문이라고 <14절>에서 밝히고 난 다음, <15절> 에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V.15a) (How shall they preach, except they be sent?) 라고 우리에게 반문 합니다. 왜요?! 그 이유는, 그들이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될수 있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1차적으로는 <이사야 6장> 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6:8a) 라고 물으실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Here am I. Send me!) (. 6:8b) 라고 응답한 이사야선지자와 같은 자발적이고 담대하게 복음을 들고 나가는 전도자의 충성과 믿음이 요구되지만, 그들의 그 마음과 모든 전도지를 향한 길을 인도하시고, 문을 열어 주시고 이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 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15절> 에서 분명히 지적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누구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수 없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복음 전도자의 발이 그토록 아름다운 이유인 것 입니다. 바로 내가 열심으로 결단하고, 충성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 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으면 누구도 복음을 들고 갈수없기 때문’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말씀드렸던 <이사야 52장> 에서 이사야가 묘사한 좋은 소식을 ‘이 세상 나라, 곧 큰성 바벨론과 그를 배후에서 조정하는 악한 영 사단마귀가 멸망’ 한것 보다도, 그 멸망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하심’ 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기쁜소식인 것 입니다. “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 ” (. 52:7) 라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시고, 기름 부으시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영광된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영광스러움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길 소원 합니까?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발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비록 우리가 복음이 아직도 전해지지 않고 있는 아프리카 어느 오지나 모슬렘지역이나 공산국가에 복음을 들고 나아가지는 못할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히 온 땅을 통치하신다는 이 기쁜 소식을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고 입을 열어 옆에 있는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전할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있든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실로 아름다운 발’ 의 삶을 사는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더욱 깨닫음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 이루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욱 깨닫음을 통해 ‘기쁜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전도자의 삶을 사시길 축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주님 만나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복된 소식을 전하며 날까지 충성되게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