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8, 2018

“믿음은 들음에서” (Faith comes from hearing)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10:16,17
Service Type:

“믿음은 들음에서”

(Faith comes from hearing)

10-28-18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0:16,17

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But not all the Israelites accepted the good news. For Isaiah says, “Lord, who has believed our message?”)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설교요약]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그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우리가 믿음을 소유하는 영적 메카니즘을 핵심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본문의 ‘16,17절’은 그 복음을 듣는 자에게 집중되는 말씀 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앞절, <롬. 10:14,15절>에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전도자의 삶’을 묘사하고 나서, <16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v.16) 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 입니다.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민족이 복음을 복종치 않았다고 사도바울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 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순종치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v.17) 라고 선언 합니다. 우리 성도의 진정한 믿음은 복음을 듣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며, 그 듣는 것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복음을 듣는다는 뜻인가요?” (What means to hear the gospel?)

첫째, ‘내가 어떤 복음을 듣고 있는지를 분별해야’ 한다는 뜻 입니다: 20세기의 탁월한 복음 전도자이자 순교자였던 독일의 <디트리히 본훠퍼>목사는 그의 책, ‘제자도의 댓가’에서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도 죄를 용서하는 설교요, 죄의 고백도 없이 참여하는 성만찬이요, 십자가없는 은혜요 ~ 값비싼 은혜는 우리를 제자(도)로 부르신 것,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내어 주신것” 이라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곧 ‘복음’ 입니다. 값싼 은혜는 거짓복음이요, 값비싼 은혜는 바로 진정한 복음이요,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빠진 메세지는 값싼 은혜요, 거짓 복음인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복음을 듣고 있습니까?

둘째, ‘신앙주의가 아니라 신앙으로 듣는다’ 는 뜻 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여러차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막. 4:9) 고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도전 하셨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선포되는 말씀조차도 들을수 없는 귀가 있다는 것 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성경말씀을 읽고, 좋은 청각으로 복음의 메세지를 듣는다 할찌라도 진정한 신앙이 없다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나의 껍질과 외형만 추구하는 ‘신앙주의’ 가 아니라, 겸손함과 진지함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신앙’의 눈과 귀를 성도 여러분은 가졌습니까?

셋째, ‘복음에 순종한다’ 는 뜻 입니다: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로마서강해’ 에서 “내가 외적인 귀 뿐 아니라 내면의 귀를 통하여 정말 복음을 들었는지? 그를 통해 참된 믿음을 얻게 되었는지?를 우리 스스로 확인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 (touchstone) 은 <순종> 이다”  라고 말 합니다. 무엇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서 순종하는 자세인지 아십니까? 첫째, 말씀을 청종하는 변화 입니다. 둘째,죄를 회개하고 미워 합니다. 셋째, 기쁨과 감사로 열매맺는 삶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순히 복음을 듣는 것에서 거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참된 권세와 영광에 순종함으로 그의 뜻을 행하는 충성된 제자들 모두 되시길 기대 합니다.

 

[설교전문]

<서 론>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그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우리가 믿음을 소유하는 영적 메카니즘을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믿음의 출발이 바로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를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믿음의 출발을 통해 살펴 봄으로서 참된 믿음위에 굳게 서는 소중한 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 론>

저는 이번 가을학기를 시작하는 시점쯤에 <롬. 10:13~15> 설교말씀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그때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자랑스러워 하기 때문’ 이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도록 허락 하셨기 때문’ 이며, ‘이 복음 안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는 위대한 진리가 있기 때문’임을 그 말씀을 통해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 10장의 ‘13~15절’말씀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자에게 임하는 은혜와 복음의 능력이 그 주제가 될 것 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오늘본문의 ‘16,17절’은 그 복음을 듣는 자에게 집중되는 말씀임을 우리는 알수 있는 것 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해 나가는데 있어서 먼저 다시한번 성도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은 <롬. 9~11장>은 일차적으로 사도바울의 동족, 이스라엘민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왜 이스라엘민족이 구원에서 제외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와 불순종의 결과인 것 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롬. 10:2,3)  고 유대인들의 진정한 영적 문제점을 지적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유대인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남겨 두시고 , 이방인들의 구원받음으로 그들을 시기나게 하셔서 장차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될때 그들이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계시를 통해 밝히고 있는 것 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14,15절>에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전도자의 삶’을 묘사하고 나서, <16절>에서 이렇게 반대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v.16) 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 입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바로 일차적으로 구원의 복음을 받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민족이 복음을 복종치 않았다고 사도바울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 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일까요? 복음전하는 자가 믿음이 부족해서 일까요? 아니면,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 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순종치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과 ‘복음을 순종한다’ 는 것을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그는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라는 <이사야 53:1> 의 글 입니다. 바울은 먼저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 하였도다” 라고 밝히고 나서, 이사야가 선언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 입니다. 구약에서 이사야선지자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자들이 전한 복음을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받아 들이지 않고 배척 했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을 그는 <복음을 순종치 않았다/ they did not obey the gospel> 라고 묘사한다는 사실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함께 물어보아야 하는 것은 이것 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다시말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순종치 않고, 그 전한 복음을 믿지 않았다고 선언한 것이 실제로 어떤 영적 상태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이어지는 <17절>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v.17) 라고 말 입니다. 우리 성도의 진정한 믿음은 복음을 듣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며, 그 듣는 것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물어보지 않을수 없는 중요한 질문은 이것 입니다. 무엇이 복음을 듣는다는 뜻인가요?” (What means to hear the gospel?) 하는 것 입니다. 그것은

첫째, ‘내가 어떤 복음을 듣고 있는지를 분별해야’ (It means that I should discern about what kind of gospel I do hear) 한다는 뜻 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 ~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 갈. 1:6,7)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좇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 다른 복음이란 바로 ‘거짓복음’이라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 <17절> 에서 진정한 믿음이 듣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할때 이 논리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한가지 단어가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 (the Word of Christ)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그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우리 성도의 믿음을 결정짓는 것은 듣는 것을 통해서 되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바울의 논리에서 우리는 이해하게 되는 것 입니다. 결국 만약 ‘그리스도의 말씀’이 빠진 메세지는 거짓복음이요, 헛된 복음이요, 이런 메세지를 아무리 많이 듣는다고 해서 진정한 믿음을 얻을수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 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원인이요, 그것을 통해 얻게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결과인 것 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듣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나는 어떤 복음을 듣고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복음은 다 같은 복음 아닌가? 서로 다른 복음이 있는가?’하고 성도 여러분 중에 질문하는 분들도 있을 것 입니다. 여기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중 하나는 20세기의 탁월한 복음 전도자이자 순교자로서 짧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충성된 삶을 살다간 독일의 <디트리히 본훠퍼>목사의 글을 인용해 보는 것이 좋을 것 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도 죄를 용서하는 설교요, 공동체 훈련도 없이 베푸는 세례요, 죄의 고백도 없이 참여하는 성만찬이요,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 이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그것은(값비싼 은혜는) 우리를 제자도로 부르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기 때문에 은혜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자신의 삶을 대가로 지불하게 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내어 준 것으로 인해 그들을 살게 하기 때문에 은혜이다. 그것은 죄를 정죄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죄인을 의롭다 해주기 때문에 은혜이다. 무엇보다도, 은혜가 값비싼 것은 하나님께서 큰 대가를 지불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내놓게 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것이 은혜인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아깝다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본훠퍼목사는 그의 책 ‘제자도의 댓가’라는 책에서 무엇이 값싼 은혜이고 무엇이 값비싼 은혜인 것인가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곧 ‘복음’ 입니다. 값싼 은혜는 본훠퍼목사가 살아 있을때 뿐 아니라 언제나 존재해던 거짓복음이요, 값비싼 은혜는 바로 진정한 복음이요,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 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양심의 감동을 주고 인간의 발전을 촉진하는 듯한 반가운 소식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빠진 메세지는 값싼 은혜요, 거짓 복음인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복음을 듣고 있습니까?

둘째, ‘신앙주의가 아니라 신앙으로 듣는다’ (It means that I hear the gospel not by ‘fideism’, but by ‘fides’) 는 뜻 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무엇이 복음을 듣는다는 뜻인지를 살펴봄에 있어서 ‘우리가 듣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를 이해해야 하는 것 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들은 것이 아니다고 말 합니다. 이사야가 복음을 전했을때도,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을때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그것은 동일할 것 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귀를 통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말을 들을수 있는 청각기능이 떨어져서 말소리를 잘 못알아 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듣기는 듣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를 못한다는 것 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여러차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막. 4:9/ 마. 11:15) 라고 그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도전 하셨습니다.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데 바로 그분에게서 선포되는 말씀조차도 들을수 없는 귀가 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비극인 것 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알려주는 무서운 영적 진리인 것 입니다. 진리요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을수 있는 귀를 모두가 가지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고 듣는 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복음을 듣을수 있는 귀를 가졌느냐 혹은 가지지 못했느냐?’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이미 예정하셨으면 복음을 들을수 있고, 예정하시지 않았다면 들을수 없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 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을 귀 있는자는 들으라’ 고 힘주어 강조하시고, 또한 사도바울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고 선언했을때 이것은 결코 하나의 운명주의가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도전하는 것은 ‘너희가 마음의 문을 열고 듣고자 하는 신앙이 있느냐?’ 는 것 입니다. 이것은 바로 듣는자의 책임인 것 입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나의 ‘지정의’를 통하여 말씀에 반응하여 신뢰함으로 나아가는 것 입니다. 저는 ‘신앙주의’와 ‘신앙’을 구별해서 사용 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다를까요? 내가 아무리 좋은 시력으로 성경말씀을 읽고, 좋은 청각으로 복음의 메세지를 듣는다 할찌라도 진정한 신앙이 없다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나의 껍질과 외형만 추구하는 ‘신앙주의’ 가 아닌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들을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습니까? 겸손함과 진지함으로 살아 있고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고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내 영의 눈과 귀로써 ‘신앙’을 통해 보고 들을수 있는 눈과 귀가 있습니까?

셋째, ‘복음에 순종한다’ (It means that I obey the gospel) 는 뜻 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로마서강해’ 에서 “내가 외적인 귀 뿐 아니라 내면의 귀를 통하여 정말 복음을 들었는지? 그를 통해 참된 믿음을 얻게 되었는지?를 우리 스스로 확인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 (touchstone) 은 <순종> 이다” 라고 말 합니다. <17절> 의 ‘들음’ 이라는 말은 실제로 ‘누구 아래에서 듣는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어떤 권위 아래에서 듣는다’ 는 의미요, ‘그 권세와 권위 아래에서 들음으로 복종하고 듣은 바를 온전히 굴복한다’ 는 뜻 입니다. 주의 복음, 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하나의 사실을 지적으로 긍정한다는 뜻이 아닌 것 입니다. 그것은 그 진리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는 뜻 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언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롬. 1:5) 라고 말 입니다. 사도바울과 이미 믿은 성도들 뿐 아니라, 모든 이방민족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 진리의 말씀으로 그 예수의 이름아래, 그 영원하신 권세와 능력아래 복종함으로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로 세우신 목적이라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진리에 대해 인정할수는 있지만 그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것 입니다. (행. 16:14, 자주장사 루디아) 무엇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서 순종하는 자세인지 아십니까? 첫째, 말씀을 청종하는 변화 입니다. 둘째,죄를 회개하고 미워 합니다. 셋째, 기쁨과 감사로 열매맺는 삶 입니다 (살전. 1:5,6).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순종함으로 아름다운 복음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참된 믿음을 얻기 원합니까? 사도바울은 진정한 믿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듣음을 통해서 시작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듣는다는 것은 내 육신의 귀로 듣는것이 아니라, 내 내면의 귀로 내 영적 귀로 듣는 다고 말 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거짓되고 값싼 복음을 속에서 참되고 값진 은혜의 복음을 구별해 내는 지혜로운 주님의 제자가 모두 되시길 기대 합니다. 그리하여 단순히 듣는 것에서 거치는 것이 우리 주님의 참된 권세와 영광에 순종함으로 그의 뜻을 행하는 충성된 제자들 모두 되시길 기대 합니다. 그로말미암아 언젠가 주앞에 서는 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잔치에 참여할찌니라” (마. 25:23) 는 칭찬과 영광을 얻는 복된 삶 모두 사시길 간절히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