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 에브라다야” (Bethlehem Ephrathah)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Bethlehem Ephrathah)
12-19-21
본문말씀: 미가 (Micah) 5:2,4~5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But you, Bethlehem Ephrathah, 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 out of you will come for me 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He will stand and shepherd His flock in the strength of the Lord, in the majesty of the name of the Lord His God. And they will live securely, for then His greatness will reach to the ends of the earth.)
5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And He will be their peace.)
[설교 요약]
이번 주 토요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일입니다. 누가복음서에 보면, 아기 예수께서 태어 나셨을 때에 누울 자리가 없어 ‘말구유’에 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2:16).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이라는 말의 의미는 <집>을 의미하는 ‘Beth’와 <빵>을 의미하는 ‘Lehem’이 합쳐진 말입니다. 이것을 합치면 ‘빵집’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선언 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요. 6:51)고. 주님은 자신을 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생명의 떡”이라고 밝히시는 것입니다.
한편 ‘베들레헴’의 옛 이름인 ‘에브라다’는 (열매가) ‘풍성함/ 풍요로움’을 뜻합니다. 그럼으로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풍족하게 ‘에브라다’가 되어 차고 넘치도록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온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메시야는 본질적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오신 존재 (v.2)임을 밝히시며, 선한 목자가 되어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으로 그의 양떼를 충실히 먹이시고 장차 창대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v.4).
그렇다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는 왜 작고 미미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일까요? 이것을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 보자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따라 우리가 택함을 입고, 그 아들의 생명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작고 알려지지 않은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듯이 말입니다.
한편, 주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 (눅. 2:7)은 그 당시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된 사람 (=자신의 방을 비어드릴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음을 영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주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도 ‘라우디게아 교회’성도들 처럼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금으로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게 하는 믿음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각자 돌아보게 하는 도전의 말씀인 것입니다 (계. 3:20). 바라기는 크리스마스 하루만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그분 안에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거두며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이번 주 토요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일입니다. 누가복음서에 보면, 아기 예수께서 태어 나셨을 때에 누울 자리가 없어 ‘말구유’에 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2:16). ‘말구유’란 쉽게 말하면 ‘말 여물통’ 즉 ‘말밥통’ 입니다. 우리 주께서 ‘말밥통’에서 태어 나신 것입니다. 우리 선하신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누일 손바닥 만한 방도 없어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지도 이제 200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한 새해를 맞이하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 뭔가 들뜨고 연말연시의 감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곤 합니다. 그리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또 한번의 연례행사를 치루듯 성탄절을 보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성탄절은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기쁨과 감사의 날입니까? 바라기는 올해 크리스마스가 또 한번의 교회에서의 연례행사가 아니라, 성도 여러분과 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섬김을, 그리고 그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한 걸음 더 깊이 묵상하고 깨닫는 복된 크리스마스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잘 아시듯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날 밤에 들에서 양들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1)고 선포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이라는 말의 의미는 <집>을 의미하는 ‘Beth’와 <빵>을 의미하는 ‘Lehem’이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합치면 ‘빵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설명하신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요. 6:51)고. 주님은 자신을 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주께서 ‘떡집’이라는 의미의 ‘베들레헴’ 동네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한편 ‘베들레헴’의 옛 이름인 ‘에브라다’는 (열매가) ‘풍성함/ 풍요로움’을 뜻합니다. 그럼으로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풍족하게 ‘에브라다’가 되어 차고 넘치도록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온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된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시작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단순히 천국행 티켓을 주시는 것으로 미션완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속에 살아 계셔서 생명의 떡되신 자신으로 먹이며 날마다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아니 모든 민족을 다스릴 자 곧 메시야가 본질적으로 누구신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v.2) 여기서 “상고에 태초” (from of old, from everlasting)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영원 전’에서 부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시기에 태어나는 우리 인간의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의 독생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다 (=나온다/ 발출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나온다’는 의미는 <신명기서>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3)고 했을 때,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태초에서부터 나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천사나 그 어떤 피조물에게 붙일 수 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과 영원히 동거하셨던 독생하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붙일 수 있는 표현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요. 1:2) 그 영원하신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요. 1:14)는 것입니다.
이런 영원하신 아들,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되신 구원자 (=메시야)에 대한 묘사는 본문의 <미가서>가 전부가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성령의 충만을 통해 장차 800여년 후에 태어날 메시야를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이가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라고 말입니다.
그 메시야가 때가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 지극히 미미한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선지자 미가는 장차 오실 구원자를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의지하여 <그의 양떼를 신실하게 돌보는 ‘선한 목자’ (The Good Shepherd)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v.4)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진실로 그를 믿는 그분의 제자들, 그의 모든 양떼들을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위엄으로 지키시고 넉넉히 먹이시고자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양들과 영원토록 함께 동거하며, 함께 생명을 누리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10:11-12)
그렇다면, 누가 ‘삯꾼’ (The heirling/ hired hand) 입니까? 그는 ‘돈을 받고 돈 받은 만큼만 일하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위험한 짐승이 오면 양을 버려 두고 달아 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양의 생명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고, 돈이 목적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선한 목자’입니까?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자’가 선한 목자라고 밝히셨습니다. 마치 다윗의 어린 목동시절, 비록 어린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돌보는 양들을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사나운 사자의 이빨과 곰의 발톱에서 그의 양들을 지키듯이 말입니다. 아니 우리 주 예수님은 죽을 수도 있는 위험 정도가 아니라, 성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의 양을 살리고자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께서 예정하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그의 양들을 위해 주시고자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 제가 성도 여러분과 오늘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성탄절의 메세지를 마무리하며 함께 이해하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 여호와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양들을 먹이신 메시야는 왜 작고 초라한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미가의 예언대로 700여년이 지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앞서 말씀을 시작하며 살펴 본 것처럼 아기 예수께서 누울 손바닥만한 자리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기 예수께서 누울 자리가 없었다’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유다족속 중에서 작고 미미한 이름없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일까요? ‘떡방아골’이라고 불리는 촌스럽고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지역에서 태어난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깊은 영적 원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과의 영적 관계를 생각하면서 ‘지극히 작고 미미한 저에게 찾아오셔서, 생명의 떡으로 저를 구원하여 주실 뿐 아니라, 자신 안에서 풍성한 생명으로 창대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저의 선한 목자되셔서 내 영혼의 참된 만족과 안식을 허락하시는 예수님을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미가를 통해 구원자가 태어날 ‘베들레헴’, ‘이스라엘 가운데 지극히 작고 미미한 땅’ 베들레헴에 그의 독생자를 보내고자 하신 계획하신 은혜는 정확히 자격없는 저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자녀로 누릴 특권을 허락하신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잉태한 마리아에게 친척인 엘리사벳이 또한 침례 요한을 임신한 상태에서 방문하여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실 아기를 찬양했을 때, 마리아는 이렇게 그 기쁨을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6~48)라고. 이런 마리아의 고백은 자격없는 우리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가장 작고 미미한 베들레헴’에 임하신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주께서 태어나셨을 때 왜 하필이면 마굿간에서 나셔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언급했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놀라우신 예정하심은 다윗의 씨로 오시는 메시야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를 이루시고자 로마황제, ‘가이사 아우구스’를 사용하셔서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가 해산할 때에 맞추셔서 그들이 살았던 나사렛에서 230km가량 떨어진 베들레헴에서 도착했을 때 한치의 착오도 없이 아기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광스러운 메시야가 태어날 때 허름한 여관방도 아니고 화려한 왕궁은 더더욱 아니고, 말 똥 냄새나는 말구유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것까지 신경쓰실 여력이 없어서도 아니요, 능력이 부족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의 영적 상태로 이해하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 자신과 주님의 관계는 지금 어떠한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내 삶의 안방이나 사랑방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굿간에 거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를 영적으로 설명하며, ‘빛이 세상에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 이렇게 왕으로 오신 주님을 천사들의 찬양을 통해 깨닫게 된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과 동방박사 세 사람 밖에는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2천년전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실 때가 아니라, 2천년이 지난 지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서 그분은 어떤 존재인가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고. 우리는 아직도 주님을 마구간에 홀로 남겨 두진 않았습니까? 아직까지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은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 계획하신 모든 역사들을 남김없이 이루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는 자녀들에게 한량없이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누리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누릴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그분을 내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감으로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왕좌를 그분께 내어드리고,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드림으로 주님과 먹고 마시는 진정한 하나되는 삶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이요, 성탄절의 이유라고 믿습니다.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고,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거두며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