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6, 2021

“부르심의 소망” (The Hope of His Calling)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1:18~19
Service Type:

“부르심의 소망”

(The Hope of His Calling)

12-26-21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1:18~19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I pray also that the eyes of your heart may be enlightened in order that you may know the hope to which He has called you, the riches of His glorious inheritance in the saints,)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His incomparably great power for us who believe. That power is like the working of His mighty strength)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 주실 때 비로소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유업이 얼마나 영화로운지 그리고 함께 하시는 그분의 능력의 크심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됨을 사도의 영적 가르침을 통해 그 요지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구체적으로 <18절>의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먼저, 무엇이 ‘소망’ (The Hope)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을 ‘영혼의 닻’ (an anchor of the soul)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 6:19)라고. 왜냐하면, 성도의 소망은 인생의 성난 파도가 몰려올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반석’에 소망의 닻을 내려 영혼을 지킬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도가 본문에서 ‘부르심’ (The Calling)이라는 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로의 부르심’ (The calling for the children of God)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2가지 부르심’을 살펴보게 되는데, 그것은 <일반적 부르심>과 <특별한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 <일반적 부르심>은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자에게 차별없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은 선포됨으로 그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 55:1/ 행.16:30)
  • <특별한 부르심>은 ‘유효적인 부르심’이라고 불리어집니다. <로마서 8장>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입은 자들은 그 뜻대로 부르심에 응답하여 구원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또한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롬. 8:28~31). 그럼으로 오늘 본문 <18절>의 부르심은 ‘일반적 부르심’이 아닌 ‘특별한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닻’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우리 거듭난 자들이 실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 6:20)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성도가 영혼의 닻을 내려 하나님의 성소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께서 먼저 들어 가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고 소망가운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근거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영적 진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의 자녀들의 어두운 눈을 열어 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이 영광스러운 부르심의 소망을 우리는 깨닫고 있는냐?’가 우리 각자의 미션인 것입니다.

2021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성도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부르심의 소망을 더욱 깨닫아 나가시는 복된 성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여러 해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 났습니다. 사람 목소리를 기가 막히게 따라하는 한 앵무새가 있는데 그 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은 마음의 태양이다! 희망은 마음의 태양이다!” 라고 말입니다. 정말이지 희망 곧 소망은 마음의 태양처럼 인간이 삶에 태양과 같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이제 올해도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일은 이미 2022년 1월 1일이 됩니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내려놓고 새해를 시작하며 새 소망 가운데 첫발을 내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 주실 때 비로소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됨을 사도의 영적 가르침을 통해 그 요지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구체적으로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유업의 풍성함과 능력의 크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제가 에베소 강해설교를 처음 시작하면서 성도 여러분과 나누었듯이, 에베소서는 근본적으로 불신자를 향한 초청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거듭난 성도를 향한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단순히 구원받았음을 확인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와 같은 구원받은 성도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를 놀랍게 선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미 말씀드린 데로 에베소서는 ‘바울신학의 면류관이요 절정이다’ 라고 수많은 성경학자는 평가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그의 자녀에게 허락하신 특권과 축복이 큰지를 에베소서 만큼 놀라운 통찰력으로 성찰해 나가며, 영의 충만함으로 밝혀주는 말씀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의 눈을 밝혀 주셨을 때 누리게 되는 영적 특권 (=은혜)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해서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해하기 원합니다. 먼저, 성도 여러분은 무엇이 ‘소망’ (The Hope)이라고 이해합니까? 여기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을 [영혼의 닻] (an anchor of the soul)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 6:19)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소망은 마치 영혼의 닻과 같아서 인생의 성난 파도가 몰려오고, 악한 영들의 불화살 같은 공격이 극에 달할 때도 우리 영혼이 깊은 침체의 바다로 침몰하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반석’에 소망의 닻을 내려 안전하게 자신을 지킬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악한 자의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닻이 끈어진 배처럼 작은 파도에도 쉼없이 흔들리다가 결국 좌초하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먼저 사도가 여기서 언급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한 교리적 (=신학적)으로 이해를 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18절>에서 ‘소망’이라는 말을 언급했을 때 이 말의 의미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선 적지 않은 논쟁이 있지만, 대체로 사도가 의미하는 소망의 의미는 성도의 ‘구원의 확신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이해합니다. 그리고, ‘부르심’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성경에서 가르치는 2가지 부르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일반적 부르심>과 <특별한 (=유효한) 부르심>이 그것입니다. 먼저 <일반적 부르심>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행. 16장>에서 바울은 그리스의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복음의 부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6:30)라고. 다시 말해, 모든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케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부르는 (=초청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특별한 부르심>은 ‘유효적인 부르심’이라고 불리어집니다. <롬. 8:28~31>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니라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 가운데 <특별한 부르심>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요 또한 ‘영화롭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본문 <18절>의 부르심은 ‘일반적 부르심’이 아닌 ‘특별한 부르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크리스챤도 특별한 의미에서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이 열릴 뿐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롬. 8:9). 이것이 대략적인 본문 <8절>에서 ‘부르심의 소망’이 의미하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마음의 태양’과 같고 ‘영혼의 닻’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우리 거듭난 자들이 실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지에 대해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나눴던 <히브리서 6장>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 6:19)라는 <19절>말씀에서 소망은 우리 성도들을 믿음 안에서 튼튼하고 견고하게 세워줌으로서 지성소 휘장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고 저자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을 이어지는 <20절>에서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 6:20)고 말씀합니다. 우리 성도가 피난처되신 하나님의 은혜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근거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영원한 대제사장 되셔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우리를 위해 나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능하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영적 논리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의로우신 옷을 입고 담대하게 지성소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누리는 소망의 이유요 근거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구원받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아바 아버지로 고백하고 그분의 임재 안으로 나아가는 자녀의 기쁨과 만족의 소망인 것입니다.

저는 성도의 소망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초대교회 성도의 삶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 성도들이 가진 믿음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체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신앙정보와 훈련을 마음데로 선택하고 누릴수 있는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챤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신앙훈련 등 모든 면에서 빈약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오늘날 성도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소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견고한 믿음의 능력이 그들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하는 순간 자신의 목숨과 바꾸는 엄청난 핍박과 고난의 현장 앞에서 조금도 주저하거나 두려워 떨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8) 라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구원을 설명하면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 (the hope of salvation as a helmet)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인이 전쟁에서 나가서 싸울때, 창도 방패도, 흉배도, 장화도 모두 필요하지만 투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머리를 다친다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것이 ‘소망의 투구’를 쓰고 영적 전쟁에 나가는 것이라고 사도는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칼의 위협과 배고픔의 위협과 헐벗음의 위협과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고 마침내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바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소망의 투구’를 쓰고서 싸워 이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5~39)라고. 무엇이 초대교회 성도들을 이와 같은 강력한 사랑의 끈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게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도들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삶으로 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언제나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신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실 구원의 능력과 유업의 소망을 끝까지 붙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제 2021년 한 해를 마무리해 나가면서 어떤 마음의 부담과 고통 가운데 한 해를 보내고 또한 새해를 맞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초대 교회 성도들이 보여주었던 상황과 형편을 초월한 참된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새해를 맞이합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자신의 영혼을 향해 외쳤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 42:5) 고 말입니다. 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스스로를 향해 ‘낙심하지 말라! 속에서 불안해하지 말라!’고 선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낙심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불안해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느 순간 낙심하고 불안에 떠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그는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분명하게 자신을 영적으로 추스리고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신앙의 전환점 (=반전)이 됨을 그가 성령으로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향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는가 ~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고 선포할 수 있는 근거는 단순한 ‘자기설득’이나, ‘자기체면’이 아닙니다. 그 근거는 구원의 확신이요, 성령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그분의 아들과 딸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소망의 이유요, 부르심의 소망의 근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심으로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이해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비밀의 소망’ (골.1:27)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자녀의 풍성한 유업과 함께 하시는 아버지의 능력의 크심을 경험해 나가고 있습니까? 이제 다사다난했던 2021년 한 해도 저물어 가고, 새해가 한주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여러분과 저는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주님을 다시 만나는 그날이 두려움과 후회의 날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그 날은 소망과 기쁨과 승리의 날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라기는 주님 다시 만나는 날까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깊은 영적 잠에서 깨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부르심의 소망을 붙들고 육신과 악한 영과 싸워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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