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0, 2022

“감사로 그분을 높이리니” (I Will Magnify Him With Thanksgiving)

Preacher:
Passage: 시편 (Psalms) 69:30~31
Service Type:

“감사로 그분을 높이리니”

(I Will Magnify Him With Thanksgiving)

11-20-22

본문말씀: 시편 (Psalms) 69:30-31

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감사로 그분을 크게 높이리니 (I will praise the name of God with a song, and will magnify Him with thanksgiving)

31 이것이 또한 수소나 뿔과 굽이 있는 황소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로다 (This is also shall please the Lord better than an ox or bullock that has horns and hoofs)

[설교 요약]

이제 결실의 계절이 절정에 다다르는 ‘추수감사절’을 맞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어떤 추수의 열매를 드릴 것인가를 묵상하는 계절인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시편 69편>은 그의 여러 시편 가운데서도 슬픔과 고난의 시로서 대표적인 시입니다. 아마도 다윗의 통치기간 말년에 아들 압살롬의 반란 (삼하 15장)이나, 다른 아들 아도니야의 모반으로 인한 곤고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시로 추측됩니다.

한편 이 <시. 69편>은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는 시로 유명합니다. 비록 다윗은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그의 몸에서 나실 메시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예표 했던 것입니다 (v.4, 21, 29). 극심한 고난을 통해 장차 올 그리스도의 삶에 참예하는 역설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29절>에서 하나님께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라고 간구한 후에 그의 영혼은 놀랍게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진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감사로 그분을 크게 높이리니” (v.30)라고 말입니다. 그는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높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도는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 주를 기억함으로서” 입니다: 다윗은 <시편 63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읆조릴 때에 하오리니” (시. 63:6)라고. 그는 침상에 들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기억했고, 새벽에 눈을 뜰 때 마다 그 약속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한 것입니다.
  •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의 심각한 문제점은 ‘영적 건망증’에 걸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지하는 최선의 길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호흡일 뿐 아니라, 그분이 행하신 그 수많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길인 것입니다.
  •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입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를 자복하면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1)라고 주께 간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성령의 충만’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는 결코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 없고, 중심의 감사를 드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거짓없는 중심의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결실의 계절이 절정에 다다르는 ‘추수감사절’을 맞았습니다. 우리 공부하는 학생들은 추수감사절 연휴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곧 이제 이번학기가 그야말로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일하고 연구하고 열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추수감사절은 이제 올한해를 얼마 남겨 두지 않고서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게 하는 의미있는 시간입니다. 특별히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어떤 추수의 열매를 드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기회라는 은혜의 선물을 통해 어떤 열매를 이 결실의 계절에 거두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열매를 이 결실의 계절에 거두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의 중심에는 ‘감사’가 있어야 함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 가운데, 성도 여러분 각자 올한해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닫고, 감사의 제사를 올려 드리는 시간되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69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여러 시편 가운데서도 오늘 분문이 포함된 <시. 69편>은 특별히 슬픔과 고난의 시로서 가장 대표적인 시입니다. 아마도 이 시편은 다윗의 통치기간 말년 (BC 979-971년경)에 아들 압살롬의 반란 (삼하 15장)이나 또는 다른 아들 아도니야의 모반으로 인한 곤고해진 상황 (왕상. 1장)으로 인해 하나님께 탄원하며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시로 추측됩니다. 그만큼 <시. 69편>은 다윗의 시편 중에서도 그 고통과 슬픔의 강도가 남다르게 깊고 강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 왔나이다 ~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v.1-3)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v.8)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v.19)라고. 다윗이 그의 대적들로 말미암아 현실적으로 당하는 위기상황과 영적으로 겪는 고통이 구구절절이 그 고백속에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 69편>에서 또 한가지 유념해서 볼 점은, 이 시편에서 유독 예수님의 삶을 예언하는 말씀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자신의 삶을 이 다윗의 시편말씀을 인용하셔서 적나라하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주께서 오늘 시편 <4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요. 15:25>에서 말씀하셨고, 또한 주께서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장사꾼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보시고, 돈 바꾸는 자의 상을 엎으시고 성전 안의 짐승들을 채찍으로좇아니시는 장면을 보고 사도 요한은 이것을 오늘 시편의 <9절>말씀의 성취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라고 말입니다.

또한 다윗이 <21절>에서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는 고통의 고백이,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의 잔을 마시며 또 한번 그분 안에서 성취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바로 <마태복음 27장>에서 묘사되었듯이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마. 27:34)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우리 모든 인간을 위한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한걸음의 극렬한 육신적인 고통의 잔을 마시시는 장면을 기억하며, 주님의 제자 마태는 다윗이 오늘 시편 69편에서 고백했던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다)”는 내용이 메시야의 십자가 고난의 쓴잔을 마시는 성취의 말씀임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고난의 아픔과 쓸개를 탄 쓴 잔을 마신 후에 다윗은 놀랍게도 그의 영적 상태가 대반전을 가져옴을 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바로 앞의 <29절>에서 다윗은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라고 그의 영의 재도약이 시작됨을 보게 됩니다. 그 모든 고통과 죽음과 같은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서, 햇빛처럼 밝고 찬란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나서도 간절히 하나님께 구했던 것이 바로 <주의 구원>이었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2)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구원의 기쁨은 우리가 예수님 영접하고, 영적으로 처음 거듭날 때 한번 느끼고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과 수없이 신실한 성도들에게서 보듯이, 그리고 주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약속하셨듯이, 그 주께서 주신 구원의 기쁨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구원받은 성도의 영혼에서 영생토록 솟아나는 것’ (요. 4:14)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을 통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기쁨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요. 7:38).

중요한 것은 다윗이 <29절>에서 하나님께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라고 간구한 후에 그의 영혼은 놀랍게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진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감사로 그분을 크게 높이리니” (v.30)라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말씀을 곰곰히 묵상해봅니다. 과연 우리 성도, 곧 하나님의 자녀가 진정으로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사실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두주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고난 받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그분의 권능과 영광에 대한 우리 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우선적인 반응은 ‘찬양과 경배’요, 동시에 ‘기쁨 (=즐거움)과 감사’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성경전체를 관통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그의 자녀가 언제나 고백했던 중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 그리고 기쁨과 감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그 하나님께 그 선하심과 영광에 합당한 감사의 제사를 올려드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를 기억함으로서” 입니다. 다윗은 <시편 63편>에서도 이런 진실한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 하나이다 ~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1)라고. 그런데 저의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 그의 고백이 <6절>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읆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시. 63:6-7) 여기서 다윗이 어떻게 시편의 절반 가량이라는 70여편의 그 아름답고도 영감 넘치는 찬양의 노래를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 드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주를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밤마다 그의 침상에서 그 하룻동안 주님의 베풀어 주신 은혜와 피할 길을 예비시켜 주신 긍휼하심을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새벽마다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작은 소리로 읆조리며 그 말씀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신뢰하며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저는 지난 주말의 ‘찬양집회’가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 매우 의미있고 유익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중심의 찬양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영으로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청년들에게 대체로 약한 것이 기도인데, 우리는 함께 찬양 가운데 기도로 그분께 나아가는 것은 진정한 영성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의 치명적 문제점은 ‘영적 건망증’인데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 예외없이 하나님께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시길 구합니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대상 4:10)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이런 주께서 여러분의 지경을 넓혀 주시고, 환난을 지나 근심이 없도록 도우신 순간을 얼마나 경험하셨습니까?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요?! 문제는 무엇인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경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영적 건망증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입니다. 공기와 같이, 물과 같이 매일 매일 부어주시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이런 모습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이것이 바로 조금전 불렀던 찬송가사에서 여러분과 저에게 도전하는 핵심이 아닐까요? “세상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주신 복을 세어 보아야 합니다. 기도로 영적 눈을 뜨고 주의 행하심과 사랑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이, 다윗이 주 앞에서 범죄하고 나서 자신의 죄를 눈물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복하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2)라고. 그만큼 주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우리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 그로인한 감사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런 ‘주의 구원’을 어떻게 여러분과 저는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스스로의 ‘자기확신’이 아닙니다. 이 구원의 확신은 오직 ‘성령충만’을 통해 가능함을 다윗은 <시. 51:12>의 바로 앞 절인 <1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여기서 다윗이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는 간구는 성령이 완전히 소멸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정의하듯 ‘성령이 없이는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롬. 8:9). 다윗은 구원받은 자이기에 성령이 소멸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셨던 ‘성령 충만’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충만이 있을 때, 다윗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은 죄를 이기고 사단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진실로 즐거워하고 감사함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은 어떤 올 한해 동안 추수한 열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원합니까? 건강입니까? 학업입니까? 인간관계입니까? 재물입니까? 헌신입니까? 혹은 그 무엇입니까? 기대하기는 여러분 각자 한해동안 거둔 값진 추수의 열매로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리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심의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고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으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거짓없는 중심의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