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연합” (Union With Christ)
“그리스도와 연합”
(Union With Christ)
7-26-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6:1~3
1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설교 요약]
오늘부터 우리는 <로마서6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6장은 앞장 5장과 어떤 관계일까요? 간단히 말해, 6장은 새로운 주제를 사도가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5장의 주제가 되는 ‘성도의 변화된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밝혀 나가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6장>의 내용을 몇가지로 요약하면,
- 주제: ‘그리스도와 연합’ (v.1~23)
- 소주제: -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산다’ (전반부/v.1~14) (교리적 방식) - ‘그리스도인은 의의 종이다’ (후반부/v.15~23) (경험적 방식)
먼저, 사도가 6장을 시작하면서, <1,2절>에서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우리 성도는 결코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2절>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 (we that died to sin) (롬.6:2)라는 표현에 그 열쇠가 있는데, 로이드존스 목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동사시제가 <부정과거동사>임에 주목하며, 그 의미는, 사도가 앞장 <5장>에서 선언하듯 ‘그리스도 안에서 속했다’는 뜻입니다. 곧, 성도는
- ‘아담 안에서’ 이제 ‘그리스도 안으로’ 바뀐 존재요,
- ‘죄가 왕노릇하는 영역’에서 ‘은혜가 왕노릇하는 영역’으로 옮겨진 존재
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로이드존스 목사는 죄에 죽은 우리는 ‘죄의 죄책감 뿐 아니라, 죄의 지배와 통치 자체에서 벗어난’ 은혜가 통치하는 영역으로 옮겨진 존재라고 <2절>을 해석합니다.
한편, <3절>에서 사도는 ‘침례’를 언급하는데, 이것은 성도가 신앙고백으로 받는 ‘물침례’ (water baptism)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성령침례’ (baptism in the Holy Spirit)를 뜻합니다 (막.1:8; 고전.12:13).
결론적으로, 사도는 ‘우리 성도가 죄에 대해 죽고,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침례’를 통해 그분의 죽으심과 함께 죽고 또한 그분의 부활과 함께 살아남으로 아담에 속한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 안에서 은혜로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라 밝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은혜가 왕 노릇하는 우리 신분의 특권을 더욱 깨닫아 삶으로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로마서 5장>을 마무리하며, 사도 바울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v.20)라는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의미를 큰 그림에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5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는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축복된 신분의 변화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된 자녀>의 신분이요, 그럼으로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신분이요, 이로 말미암아 장차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신분의 변화’로 5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살아있는 믿음을 우리 성도가 소유했기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우리가 가진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왜일까요, 그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나, 우리의 의지와 실천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사도가 <5절>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기 때문)” (롬. 5:5)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구원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는 선언하고 나서, <5장> 후반절 (12~21절)을 통해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대조함으로 이런 우리 성도의 구원의 영광과 은혜를 더욱 드러냈던 것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첫 조상일뿐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는 막중한 위치를 저버리고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죄와 죽음’이라는 불행한 삶을 그에게서 태어날 후손 모두에게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물려준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속하여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의로우신 죽으심으로써 그를 믿는 우리 모두를 그의 생명 안에서 은혜가 왕 노릇하는 복된 삶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성도의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삶으로 요약되는 <5장>의 결론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부터 <6장>말씀을 묵상해 가면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영의 충만함으로 허락하신 놀라운 복음의 진리와 은혜로 인하여 누리게 되는 성도의 권세와 영광을 더욱 더 분명히 확인해 가고, 각자의 삶에 적용하는 시간되길 기대합니다.
먼저 <6장>은 지난번 잠시 살펴보았듯이 그 주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고 <6장>을 큰 그림에서 볼 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게 되는데, 먼저 <전반부>는 ‘1~14절’로써 그 소주제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산다”이고,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영적 의미에 밝히는 [교리적 방식]을 취합니다. 그런 반면, <후반부>는 ‘15~23절’로써 “그리스도인은 의의 종이다”라는 소주제로 요약되고, 그 내용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져오는 실제적 삶의 적용’을 관한 [경험적 방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서 5장>과 오늘부터 시작되는 <6장>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6장>은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는 장이 아니라, <5장>의 이슈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5장>을 마무리하면서 <20~21절>의 마지막말씀을 살펴보았는데, 사도가 ‘왜 다시 율법을 언급하는 것인지?’를 우리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가 율법을 언급한 것이라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그 당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적지 않은 유대인 기독교인들이나, 구약성경의 율법을 이해하는 (존중하는) 성도들 중에서 바울의 “죄가 더 한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 (롬.5:20)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이제 은혜가 넘침으로 율법은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라고 분명히 밝히는 것이 <5장> 끝절인 <20-21절>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6장을 시작하는 <1-2절>에서 계속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v.1,2)라고.
이어지는 <6장>을 시작하며 사도는 ‘왜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는지’를 설명합니다. 성도가 죄를 지을 수 없는 그 중심에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하여”라고 했을 때, 영어로는 “How shall we that died to sin”라고 번역됩니다. 제가 인용한 영어버젼, <KJV>의 “~ we that are dead to sin”는 번역도 그런 의미에서 좋은 번역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 오랜 기간을 거치며 여러 해석들이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영향력과 죄를 사랑하는 것에서 완전히 죽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완전주의자들’ (Perfectionists)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존재와는 전혀 맞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어 있어야 한다>’는 식의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죄에 대해 죽었다’고 분명한 과거동사로 선언했기에 ‘죽어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해석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우리가 <죄에 대해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식의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 또한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우리 성도가 죄에 대해 ‘점점 죽어가는 계속적인 현재시제’로 말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저명한 신학자 ‘찰스 핫지’는 이것을 ‘죄와 인연을 끊었다’는 것으로, 그리고 ‘로버트 할데인’은 ‘죄책에 대해여 죽었다’고만 해석했습니다.
이처럼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사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 동사의 시제는 <부정과거 동사>인데, 그것은 “언제나 일단 일어나고 다시는 바뀔 수 없는 어떤 사건이나 행동을 지시하는 동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런 동사의 시제를 고려한 가운데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은 궁극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죄책감 뿐 아니라, 죄의 지배와 통치 자체에서 벗어 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새사람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더 이상 죄는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가 근본적으로 우리의 ‘동작/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의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존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사도는 <5장>후반절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 ‘아담을 통해 죄와 죽음’이 가져왔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의로움과 생명’을 가져오게 되었음을 밝혀 나갔고, 죄를 통해 죽음이 왕 노릇한 것처럼, 이제는 더욱 더 은혜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그때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씻음 받아 의롭다고 불리는 순간, 곧 구원받는 (거듭난) 순간입니다. 이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죄를 통해 죽음이 왕 노릇하는 영토에서, 의를 통해 생명 안에서 은혜가 왕 노릇하는 영토로 완전히 옮겨오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5장 후반절>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 우리 성도의 변화된 존재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렇게 이제 주장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속함으로, 죄와 죽음이 왕 노릇하는 나라에서 이제 생명과 은혜가 왕 노릇하는 나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이 전혀 힘을 쓸 수 없고, 그것을 압도하는 충만한 생명과 은혜가 왕 노릇하는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짓겠습니까? 어떻게 그 죄 가운데 살겠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골로새 교회’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포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개념인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3~14)라고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또한 주께서 성도들과 주님을 박해하던 청년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시고 주신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어두움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로 돌아오게 하는 미션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저희에게 보내어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리라” (행. 26:17~18)고 말입니다. 이처럼 ‘죄에 대해서 죽는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영토에서 벗어나, 생명과 은혜가 지배하는 영토로 옮겨온 신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핵심적인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가 왜 죄를 결코 지을 수 없는지를 사도는 6장을 시작하며 <1,2절>에서 밝히고 나서, <3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v.3)고 말합니다. 사도는 이제 ‘침례’ (the baptism)를 통해 본격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에서 누리게 된 우리 성도의 신분의 놀라움을 밝혀 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침례>의 의미를 성도 여러분과 나눈 바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행하게 되는 ‘신앙고백의 행위’ 곧 ‘이제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그분과 함께 죽고, 또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난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행위’가 <침례의식>입니다. ‘내가 물 속에 완전히 잠김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었고, 또한 물에서 다시 일으킴 바 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믿는 것’이 ‘침례를 받는 이유’요, ‘침례의식’이 상징하는 영적 핵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로마서 6장3절>에서 묘사하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 받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볼 때 우리가 말하는 <물침례> (Water Baptism)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성령침례> (Baptism in the Holy Spirit)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어저께 두번째로 한달 간의 ‘성경필사’로 <마가복음>말씀을 함께 시작했는데, 필사하신 분은 기억하시겠지만, 마가복음은 먼저 침례자 요한의 스토리로 시작합니다. 침례요한은 자신이 사람들을 회개케 하고, 침례를 줌으로써 주의 길을 예비하지만, 진정한 침례 곧 ‘구원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침례’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음을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막. 1:8)고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 <성령침례>의 의미를 이렇게 잘 밝혔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라고. 이처럼 오직 <성령의 침례>를 받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그분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고, 그분의 살으심과 합하여 다시 살아나는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고, 더 나아가 그를 믿는 우리 성도 모두는 그분 안에서 연결된 지체로써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을 통해 내 속에서 역사하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구원의 사건’이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3절>에서 사도가 묘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받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신앙고백으로 행하는 <물침례>는 두말할 것 없이 복된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이지만, 우리가 잘 알듯이 ‘물침례’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는 근거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령침례’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지, ‘물침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죽고, 또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었음을 사람들 앞에서 신앙고백하고, 그리스도께 속한 구원받은 제자로써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물침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살펴보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의미를 결론적으로 묵상하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앞서도 함께 충분히 살펴보았듯이, <5장> 후반절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받은 성도, 곧 ‘영광스런 신분의 변화를 받은 성도’의 실존을 우리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성도의 삶은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죄가 더 한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0)라는 정도로 심히 혁명적이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사도는 밝히면서, 이런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필연적으로 ‘그럼 이제부터는 죄 지어도 상관없겠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니까, 죄를 더 짓는 것이 은혜를 더 누리는 길이겠네!?’라는 궤변을 늘여 놓는 ‘율법폐지론자’나 ‘무율법주의자’들이 있을 것을 사도는 예상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처럼 참되고, 풍성한 은혜가 왕 노릇하는 엄청난 복음의 진리는 종종 오해되거나 불법과 거짓선생들의 교묘한 거짓 가르침으로 오용될 수 있음을 사도는 충분히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결론은 단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By no means/ God forbid) (롬. 6:2a)라고 말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침례를 주심으로 구원받게 하셨다면,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순결하고 의로운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새 소망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본성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때로는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실수하기도하고, 죄를 짓기도 하지만, 결코 완전히 엎드러 지지 아니하며 죄의 종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속한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 속한 죄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아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안에도 있고, 그리스도 안에도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아담 안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 이유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 8:34)고 말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요, 아담 안에 속한 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실수나 일회성 죄’가 아니라, ‘고의적이요 죄의 종이 되어 죄의 막강한 힘 아래 벗어날 수 없는 죄를 계속해서 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믿고 그분께 속한 자들이 누릴 은혜와 자유를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6)라고. 주님 자신 안에서 생명과 은혜가 왕 노릇하는 영원한 자유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아담에 속한 자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 속한 자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믿으신다면, 과연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은혜’는 실로 하나님께 속한 거대한 힘이요 권능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은혜’입니까?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본질적인 목표는 ‘죄에 속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밝힌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3:8) 마귀의 일은 곧 ‘죄’인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은혜는 어마어마한 거룩한 영적 바이러스가 되어 철저하게 죄를 파괴하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렇 수 없느니라” (v.1-2)고 선언한 결론입니다. 바라기는 이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주의 제자되어 더욱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속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얼마나 축복되고 영광스러운지를 깨닫아 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 변화된 신분에 걸 맞는 은혜가 왕 노릇하는 의로움과 생명과 사랑을 성령충만 가운데 넘치게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